외전 구염상 1-7
한편, 현천기는 여전히 이 층 창가에 앉아 있었다. 부하의 보고를 들은 그가 손바닥으로 벽을 세게 후려쳤다.
“이렇게 사소한 일을 똑바로 처리하기는커녕 실수를 해? 이 쓸모없는 놈!”
노인은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입가의 핏자국도 채 닦지 못한 그가 다시 꿇어앉았다.
“도련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천기가 냉랭하게 웃었다.
“어떻게 하냐고? 그 놈팽이가 기회를 놓친다면, 이제 봉씨와 헌원씨가 부마가 되지 않겠느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노인이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 봉익을 이 일에 끌어들이지 않으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현천기의 웃는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걸 알면서 여태껏 지껄이고 있는 것이냐? 대체 왜 아직까지 여기 남아 있느냐!”
노인은 감히 다시 묻지 못한 채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 * *
세 사람은 그저 조용히 길을 걸었다.
헌원사책은 구염상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망설이다 매번 고개를 돌렸다. 과거 여인들에게 손쉽게 이야기꽃을 피우던 모습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는 무슨 말을 하든 경박해 보일 것 같아 여러 차례 입을 열다 다시 꾹 다물었고, 절망스런 마음에 감히 다시 말을 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맨 뒤에서 걷는 봉익은 평소처럼 유유자적한 모습이었다. 그는 생애 첫 출궁을 맞이한 공주가 언니에 대한 경계를 푼 뒤 장터의 왁자지껄한 모습에 매료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깨끗했던 봉익의 미간은 점점 구겨지기 시작했다. 상 공주는 줄곧 고개를 숙인 채 곁눈질도 하지 않고, 소리도 듣지 않았다. 마치 죄수처럼 그녀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만 걸었다. 아니, 죄수 같다 말하는 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었다. 죄수라면 이런 왁자지껄한 모습에 분명 한눈을 팔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 공주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몸을 사렸고, 외부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예 주변을 바라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봉익은 구염상이 소녀라면 마땅히 좋아할 만한 물건들에 빠질 거라 믿었다. 그래서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그녀가 관심을 보인 물건을 사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구염상은 좀처럼 보기 드문 자신의 호의를 낭비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일로 어린 소녀와 실랑이를 벌일 정도는 아니었기에 봉익은 너그러운 마음을 먹었다. 그는 구염상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틈을 타 소녀들이 좋아하는 노점에서 찹쌀가루로 빚은 인형을 산 뒤,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는 구염상에게 건넸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구염상은 순간 깜짝 놀랐다. 맨 처음 든 생각은 ‘혹시 뇌물인가?’였다.
순간 고개를 든 구염상이 봉익의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매번 아버지가 어머니를 바라볼 때의 표정과 견줄 만했지만, 그녀는 눈치껏 인형을 손에 받아 들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구염상은 신기한 마음에 계속해 인형을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봉황 모양의 인형은 살아있는 것처럼 날개의 색이 선명했으며, 은은한 설탕 향이 풍겼다.
‘먹을 수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구염상은 약간 배가 고픈 상태였다. 하지만 재차 생각한 끝에 그녀는 결국 인형을 먹으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만일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창피를 당할까 걱정스러웠다.
자신이 건넨 선물을 오래도록 감상하는 구염상을 보며 봉익은 언짢았던 감정이 희미해지는 걸 느꼈다. 그는 계속해 작은 노리개들을 산 뒤 구염상의 소매 안으로 몰래 집어 넣었다.
구염상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그녀는 과연 궁이 아닌 민간에서, 자신의 보잘것없는 위엄을 드러내며 나는 공주이니 감히 소매를 건드리는 짓은 하지 말라고 명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래도 되는 걸까?’
구염상은 아무리 자신이 부탁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해도 공주로서의 존엄성을 버리고 뜻을 굽히는 지경까지 이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구염상은 결국 뜻을 굽히고 말았다. 그녀는 감히 자신의 소매에 쑤셔 넣은 물건들을 봉익의 얼굴에 던지며, ‘다시 한 번 나를 건드리면 네 일족을 멸할 것이다!’라고 경고하지 못했다.
장터를 통과한 세 사람은 한산한 거리들을 지나 영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거리가 갑자기 넓어졌다. 위엄 있는 문돈門墩(중국 건축물에서 문기둥을 지지하기 위해 설치한, 장식성도 있는 돌 조각)은 마차 여덟 대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었지만 거리는 더 이상 좋은 문과 누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커다란 정원으로 들어가는 크고 깊은 문 너머로 돌을 깎아 만든 사자와 표범이 양쪽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어둠이 깔리자 웅장하고도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영정로路에 발을 내딛는 순간, 긴장했던 구염상의 마음이 순식간에 편안해졌다.
‘살았다. 살았어!’
마찬가지로 흥분한 헌원사책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입을 열 핑계를 찾은 것이다.
“아가씨, 댁이 어디십니까?”
헌원사책은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반드시 길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고…….
헌원사책은 다시 부끄러워졌다.
헌원사책을 쳐다본 봉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사책이 꾸고 있는 꿈은 황후의 시력이 시원치 않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봉익은 구염상의 소매에 든 물건들을 떠올렸다. 만약 황후가 이것들을 핑계로 기어코 자신을 사위로 맞아들여 황후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한다면, 그 역시 장단을 맞춰 줄 수 있었다.
“가자. 여기가 아니니 계속 앞으로 나가자고.”
이 말에 헌원사책이 봉익을 바라보았다.
“형님은 어딘지 아세요?”
헌원사책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까 그녀가 뭔가 털어 놓은 듯한 기억이 났다.
‘하인이 태감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왕부王府라는 소린데…….’
“어… 그럼 영강로永康路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영강로는 왕손과 귀족들이, 영평로永平路는 실권을 장악한 중신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중 유일한 왕부는…….
“혹 충왕부의 군주郡主(친왕의 딸)이신지요?”
충왕부의 지위는 헌원씨 가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충왕부라면 어쩌면 아버지의 자리를 잇지 못하는 둘째 아들에게 딸을 시집보내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헌원사책은 그녀의 옷차림을 떠올렸다. 그녀는 총애를 받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적출이 아니라는 뜻?’
헌원사책은 한시름을 놓았다.
‘정말 잘됐어. 적출이 아니라면 괜찮아.’
헌원사책이 다시 활기찬 모습을 되찾았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댁에 들어가시는 것을 보고 가겠습니다.”
구염상은 이에 감동할 새도 없이 더욱 난감해졌다.
‘어떻게 들어가지?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라도 으쓱거리며 들어가야 하나?’
안 될 말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궁을 나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된다. 어머니의 반응이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
살면서 한 번도 궁에서 나와 본 적이 없는 구염상은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대문 앞에 도착했다 해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처지라는 걸 깨달았다.
봉익은 갑자기 멈춰 선 구염상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구염상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사람도 별로 없는 데다 있다 해도 두 사람의 하인들뿐이니 굳이 숨길 것도 없었다.
“저는…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말을 마친 그녀가 봉익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지만 그라면 분명 자신을 들여보내 줄 방법이 있을 것만 같았다.
순간 봉익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떠안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즉시 정신을 차린 그가 이내 냉정한 얼굴로 깊이 생각에 잠겼다.
그를 본 구염상이 고개를 숙였다.
“난처하게 해 드렸군요. 입구까지만 데려다주시면 됩니다.”
기껏해야 평판이 나빠지기밖에 더 하겠는가. 어쨌든 아무 일이 없었던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돌아가서 혼자 몰래 나갔던 거라고 말하면 아바마마는 분명 넘어가 주실 것이다.
최악이라면 불쌍하게 시집을 못 가는 것이겠지만… 그렇다면 어마마마께서 앞으로 초조해 하시겠지…….
구염상은 점점 노처녀로 변해가는 자신을 보며 탄식할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홀로 밥도 먹지 못하게 된 늙은 어머니의 곁에 눈에 거슬리는 딸이 있다면, 부드러운 어머니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물론, 분명 어머니가 던진 그릇과 젓가락이 자신의 얼굴로 날아들 것이다.
상상하던 구염상이 순간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가시지요.”
말을 마친 봉익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신이 충동적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렇게 상 공주를 쥐도 새도 모르게 돌려보내면 궁에 심어 둔 자신의 세력이 드러날 테고, 이는 구염상을 해하려는 자들에게 눈엣가시가 될 터였다.
하지만 봉익은 다른 선택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로 인해 상 공주의 명성이 훼손된다면 결코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할 수 없었다. 자신의 가문에서는 이미 황후의 존재만으로도 상 공주를 용납하지 않았다. 거기에 공주 본인의 명성까지 문제가 된다면 그녀와의 혼인은 더욱 불가능했다.
봉익은 원하는 바를 위해 인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황성 금지 구역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헌원사책은 자신이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통행증을 꺼낸 봉익이 마땅히 밖에 있어야 할 아가씨를 데리고 당당하게 전진하자 헌원사책은 두근거리던 마음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다.
아무리 어리숙해도 어쨌든 헌원사책은 대사마 가문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모셔온 사람이 공주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진짜 공주였다!
구염상은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헌원사책이 초점 없는 눈으로 뒤에 선 소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마음속에서 여러 감정들이 솟구쳤다.
‘어떤 공주인 거지? 어째서 금비가 낳은 공주와 길거리에 나타난 걸까? 그럼 그녀를 잡으려던 자는 대체 누구고?’
미색에 빠져 판단력이 흐려졌던 헌원사책의 머리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지 구역 중 두 번째 성문을 통과할 때, 헌원사책은 봉익이 손을 쓰기 전 먼저 자신의 신물信物(증표)을 내밀었다.
황제는 ‘세상에 말 못 할 비밀은 없다’는 기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누군가 궁 안에 심복을 심어 놓고 정보를 파악하는 일에도 그다지 반감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보 없이 황제의 생각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것이야말로 재산을 몰수하고 멸문을 당할 대죄였다.
덕분에 3품 이상 고관들 중 궁 안에 심복을 키우지 않는 자는 없었고, 그들은 특히 이런 순간에 빛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