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1-6
이어서 구염예락이 나타났다. 다른 곳에서 즐겁게 놀고 있던 그녀가 이쪽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며 사람을 이끌고 다가왔다.
구염상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는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
구염상을 바라보는 봉익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 자가 공주였다고……? 어떤 공주인 거지?’
외간 남자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구염상의 모습에 당황한 구염예락이 소리를 질렀다.
“상아! 지금 뭐하는 거야! 안 오고 여기서 뭐해!”
구염상은 망설였다. 지금 이곳에는 헌원 대사마 가문의 둘째 공자와, 자신이 무사히 환궁할 수 있도록 도와줄 능력을 갖춘 듯한 사람도 있었다. 드디어 가장 불안한 선택지를 포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니요. 저는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기 공자께서 저를 데려다주기로 했어요.”
옷자락을 잡은 손을 푼 구염상이 헌원 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을 가리켰다.
헌원사책은 구염상이 자신을 지목하자 마음이 두근거렸다. 회색 무명옷을 입었어도 밝은 달 같은 여인의 아름다움은 감춰지지 않았다.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봄바람 같이 부드러운 여인이었다.
봉익은 보일 듯 말 듯 눈살을 찌푸렸다.
‘상? 황후가 낳은 적공주잖아. 정말 돌연변이로군… 황후의 성격을 물려받았다면 난폭하기 이를 데 없을 텐데.’
순간 봉익의 머릿속에 얼마 전 자신을 부마로 삼기 위해 수소문을 한 황후의 행동이 떠올랐다. 놀란 어머니는 즉시 거짓 정보를 퍼뜨렸다. 당시에는 우습게 여겼으나, 지금 보니 어머니께서 쓸데없는 걱정을 하신 게 분명했다.
그간 한 번도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상 공주는 결코 모든 세도가 공자들이 걱정할 만큼 난폭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 그녀의 모습은 많은 공자들이 그동안 알지도 못하고 괜한 반응을 한 데다 상당히 소인배처럼 굴었다는 걸 알려 주었다.
“고맙습니다.”
살짝 몸을 기울인 구염상이 감사를 표했다.
봉익은 구염상을 바라보았다. 단아하고 온화한 얼굴은 언뜻 내성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빠져나갈 방법을 찾을 줄 아는 아가씨였다. 이는 그녀의 어머니가 무슨 일만 있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반드시 누군가를 때리고 죽이려 드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비록 그녀의 외모가 어머니보다 낫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미색을 좇는 자라면 아무리 난폭한 여인이라도 전혀 개의치 않아 할 만큼 아름다운 건 사실이었다.
봉익은 돌연 구염상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는 걸 느꼈다. 세상에 외모가 빼어난 여인들은 많았지만, 이를 과시하지 않는 여인은 드물었다. 하지만 상 공주는 분명 외모를 이용해 몸값을 올리는 짓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순간 봉익은 자기도 모르게 악독한 황후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다 해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가씨, 천만에요.”
조급해진 구염예락이 발을 동동 굴렀다.
“상아!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빨리 돌아오라니까!”
저 두 남자는 대체 누구이기에 구염상과 같이 있단 말인가!
‘정말 뻔뻔스럽군! 평소에는 단정한 척하더니, 궁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로 잽싸게 남자를 유혹해? 그리고 저 두 놈들은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냐? 저 희끄무레한 게 뭐가 좋다고!’
헌원사책은 비단옷을 걸친 여인과 거친 옷을 입은 아가씨를 번갈아 바라본 후 완전히 멍해졌다.
“언니…예요?”
‘차이가 너무 큰데, 설마 서출인가?’
헌원사책은 조금 전 구염상이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구염예락의 귀가 빨개졌다. 남자가 자신을 이렇게 쳐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구염예락은 즉시 고개를 쳐들고 거만하게 그들을 노려보았다.
‘흥!’
그녀의 신분은 고귀했다. 이들은 마땅히 아바마마 앞에 무릎을 꿇어앉아 부디 예락 공주를 시집보내 달라고 간청해야 했다. 구염예락은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라고 굳게 마음 먹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정말 아바마마께 혼담을 건네면 나는 누구를 선택해야 하지?’
구염예락의 눈이 저절로 단정한 두 남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특히 냉정한 표정으로 줄곧 입을 열지 않고 서 있는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헌원사사를 떠올린 구염예락이 즉시 정신을 차렸다. 그녀에게는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었고, 따라서 두 남자는 자신에게 버려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흥! 하지만 넓은 아량을 베풀어 오늘 일을 계기로 날 남몰래 사랑하는 건 허락하도록 하지.’
헌원사책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구염상이 미안한 듯 말했다.
“저희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번거로운 일이라는 걸 알지만 일찍 돌아가고 싶거든요. 늦게 돌아가면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하실 거예요.”
구염예락은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여우처럼 천한 것 같으니! 제 어미처럼 머리를 써서 자길 좋아하는 남자들을 꾀어내?’
심지어 조금 전 그 표정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일국의 공주로서 마땅히 보여야 할 위엄조차 없는 모습은 미천한 집안의 여식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부탁하는 처지인 구염상은 거만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구염상은 먼저 몸을 낮추어야 상대방에게 철이 들었다는 걸 알려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측은지심이라도 느껴야 자신을 나쁜 사람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 아닌가.
구염상의 부드러운 눈빛을 본 헌원사책의 호방한 기세가 즉시 하늘을 찔렀다.
“좋아요.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봉익은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 구염상을 구한 건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사근취원捨近取遠(가까운 데 것을 버리고 먼 데 것을 구하다)하다니.
‘계속 헌원씨 가문의 별 볼 일 없는 둘째 공자를 붙잡겠다고?’
보아하니 상 공주의 결점이 어머니뿐인 건 아닌 듯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이리 좋지 못해서야.
묘한 미소를 지은 봉익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떠날 준비를 하는 구염상을 향해 고개를 숙인 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 사책이 조금 전 맞닥뜨린 그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구염상은 태연한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그를 피한 그녀가 인내심을 갖고 반박했다.
“헌원씨 가문의 둘째 공자시니까요.”
구염상은 특히 ‘헌원’이라는 두 글자를 힘주어 강조했다. 대사마라는 신분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미소 띤 얼굴로 구염상의 말을 듣고 있던 봉익이 몸을 곧게 세웠다. 그가 ‘착’ 하는 소리와 함께 접선을 펼치자 옥으로 장식된 단면이 드러났다.
“궁에서 나왔다면 아가씨의 신분은 필시 사책보다 더 고귀할 텐데, 굳이 불편하게 헌원이라는 두 글자에 기댈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셔야지요.”
구염상은 봉익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줄곧 냉담한 표정으로 자신을 무시한 사람이었다. 부탁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상대가 어떻게 자신을 무사히 데려다줄 거라 기대하겠는가.
헌원사책이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어찌 오시지 않습니까?”
“네, 곧 갈게요.”
별안간 구염상의 분홍빛 손톱이 거친 옷자락을 쥐었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작게 말했다.
“그렇다면 저를 가장 가까운 어문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으세요?”
봉익은 그제야 마음이 후련해졌다. 잘 익은 포도처럼 촉촉한 눈망울이 눈앞에서 초롱초롱 반짝이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말투는 누이동생이 기르는 고양이보다도 더 고요했다. 그녀가 확실히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 주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바로 고개를 숙인 봉익이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공주 전하의 친절을 신하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가시지요.”
말을 마친 그가 고의로 고개를 기울이며 묘한 눈빛으로 구염상을 바라보았다.
구염상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설렌 것이 아니라 화가 났다. 자신의 신분을 진작 알고 있었으면서 감히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다니.
어머니는 이렇게나 인심을 얻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보잘것없는 신하조차 자신을 존중하지 않다니!
그러나 구염상은 분노한 기색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살짝 무릎을 굽히고 감사 인사를 건넸다. 자신의 꾸밈없는 모습을 보고 상대가 조금이나마 어머니를 좋게 생각해 주길 바라서였다.
봉익은 살짝 놀랐다. 만져 보고 싶을 만큼 부드러운 피부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가슴이 조여들었다.
‘이렇게까지 꾹 참는 모습이라니, 설마 궁에서 지내기가 녹록지 않은 건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봉익은 왜인지 알 수 없이 기분이 아주 언짢아지는 걸 느꼈다. 동시에 뒤에서 쉬지 않고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이를 바라보는 시선에 살기가 더해졌다.
그 서슬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구염예락이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몸을 떨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더는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세 사람이 그녀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다시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다 손이 없는 것이냐, 발이 없는 것이냐! 저들이 상 공주를 데리고 가는 걸 가만히 두고 보다니! 어서 가서 그들을 잡고 상 공주를 구해 와! 대체 뭐하는 짓이냐!”
그러나 양쪽에 선 이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움직이기는커녕 눈에 띄게 고개를 더 깊숙이 숙였다.
구염예락은 더욱 화를 냈다.
“뭣들 하는 게냐! 내가 명령하지 않느냐!”
두 사람 중 다른 한쪽을 힐끗 바라본 자가 공손하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저희도 명을 받들고 싶지만 지금은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상대는… 어사대 가문의 대공자인 형부시랑입니다. 노비들이 아가씨를 데리고 궁 밖을 나온 것이 들통나면 노비들은 그 즉시 죽은 목숨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가씨까지 비참한 상황에 놓일 것입니다. 아가씨, 이만 돌아가시지요. 물론 노비의 생각에는 이미 들킨 것 같습니다만…….”
하인들은 정말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주인에게 해결책이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요리조리 생각하던 구염예락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무서울 게 뭐 있어! 그가 감히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고? 증거도 없는 주제에! 됐어. 가자! 다시 가서 놀자! 그것들을 무서워해서 뭘 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