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1-5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던 헌원사책이 덩달아 같이 밀리며 비틀거렸다. 높은 신분을 지닌 그의 시선이 순간 자신을 민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곱지 않은 눈길이었다.
“죽고 싶은 것이냐!”
동시에 재빨리 똑바로 선 구염상이 그의 두 손에서 벗어났다.
헌원사책은 손끝에 남아 있는 부드러움을 느꼈다. 분명 여인이었다. 평소 예법에 얽매이지 않는 호방한 성격을 지닌 그는 본능적으로 여인을 아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완벽한 바람둥이의 모습을 풍기며 조금 전 자신에게서 떨어진 아가씨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구염상은 드디어 주변에서 밀어 대는 압박이 줄어들었다는 걸 알았다. 상대의 호위가 도착하여 그들의 도련님을 위해 두 사람을 지킬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순간 구염상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한 번은 법도를 어겨야 한다는 걸 알았다. ‘헌원’이라면 분명 눈앞의 소년은 헌원 대사마 가문의 공자일 것이다.
구염상은 헌원 대사마가 깨끗한 사람이라 첩실을 두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자녀들은 모두 적출이었고, 높은 지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아버지의 강직한 신하였다. 또한 헌원씨 가문은 조정과 내명부에서 딱히 누구의 편이라 할 만한 세력이 없기에 그라면 마땅히 도움을 청할 만했다.
돌연 고개를 든 구염상이 마지막 동앗줄을 붙잡는 표정으로 헌원사책을 바라보았다.
“공자, 제가 언니와 하인과 헤어지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혹 저를 집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을지요?
구염상이 고개를 들던 순간, 자유분방한 헌원사책의 웃는 낯이 잠시 경직되었다. 그간 수많은 미인을 보아 왔으나 이토록 하얀 얼굴과 청아한 눈망울은 처음이었다. 헌원사책은 순간적으로 그간 보아 온 모든 여인들을 잊어버렸다. 마치 ‘미인’이라는 두 글자가 눈앞에 선 이 소녀를 위해 생겨난 듯했다.
다시 고개를 떨군 구염상이 앞서 했던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헌원사책은 일순간 여인 앞에서 저절로 짓던 미소를 거두고, 정중한 모습을 보였다.
“가족분들을 잃어버렸다고 하셨습니까?”
헌원사책은 자기도 모르게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 구염상이 하인의 보호 아래 들어오도록 해 주었다. 덕분에 비좁은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지며 구염상은 마침내 제대로 설 수 있게 되었다.
구염상은 본능적으로 남자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가장 적절한 위치에 섰다.
“네.”
동시에 봉 시랑侍郞이 다가왔다. 준수하고 강인한 이목구비에 있는 듯 없는 듯 여유로운 시선이 헌원사책에게 머물렀다.
“헌원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께서는 아직도 아니 가신 건가?”
헌원사책은 자신의 평판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봉 공자의 성격은 평소 괴팍하기로 유명했다. 오해를 살까 두려웠던 헌원사책이 다급히 말했다.
“아가씨가 길을 잃었다며 제게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셔서요.”
“그래?”
팔짱을 낀 봉익封益이 탐색하는 눈빛으로 고개 숙인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어 헌원사책이 입은 옷을 한 번 훑은 봉익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길을 잃었다……. 대체 나이가 몇인데 밖에서 집도 찾아가지 못 한다는 것이지? 꼭 누군가를 잡아서 함께 돌아가야만 하나?”
순간 헌원사책이 반발 섞인 표정으로 큰형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치기 어린 얼굴에는 약간의 원망이 서려 있었다.
어찌 이렇게 함부로 말할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 여인은 천한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형님, 이 여인은…….”
봉익이 재차 우습다는 표정으로 친구의 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여인은 대체 누구기에 조금 전에는 나를 밟고, 이제는 너까지 밟은 것이냐?”
‘의도가 너무 명백하지 않은가.’
구염상은 봉익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완벽히 이해하지 못 했으나 마지막 말이 뜻하는 바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고개를 든 그녀가 격식을 갖추어 입을 열었다.
“공자의 발을 밟은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헌원 공자까지 밟은 것은 아닙니다.”
구염상을 바라본 봉익은 속으로 과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안타까울 정도였다. 소녀의 눈은 어떠한 불순물도 찾아볼 수 없이 너무나 맑았고, 반박하는 말에도 결코 반격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녀는 그저 사실을 진술하고 있을 뿐이었다.
봉익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소녀는 비록 광목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지만 피부는 투명하게 반짝거렸고, 밖으로 드러난 목은 옥처럼 새하얬다. 귀를 뚫은 흔적이 있었으나 장식품은 달지 않았고, 체구가 여리고 작았지만 기품이 넘쳐흘렀다. 낯선 사람을 향한 어색함과 불안감이 보이긴 했지만 끝까지 태연한 모습이었고 행동에는 절도가 있었다.
구염상은 자신을 살펴보는 시선에 거북함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자신의 신분이 고귀하다 해도 이 순간 어머니처럼 상대의 뺨을 때릴 수는 없었다. 구염상은 누군가에게 부탁을 할 때는 지나치게 꼿꼿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문득 구염상의 얼굴을 스친 표정이 봉익의 시선에 들어왔다. 사라질 것처럼 옅은 꽃향기가 코끝을 감쌌다. 비단결처럼 차갑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었다.
봉익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 그녀는 지체 높은 집안의 여식이 분명했다.
복식과 관포처럼 모든 물건은 이를 사용할 수 있는 신분이 정해져 있었다. 머리카락의 향기가 이렇게 오랫동안 남아 있으면서도 원래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는 건 그녀가 귀족이라는 뜻이었다.
형부시랑 봉익은 오랜 기간 다양한 사람들과 왕래해 온 자였다. 그는 자신이 조금 전 사람을 잘못 봤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대의 말에 자신이 손님을 끌어들였다는 모욕의 뜻이 숨어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 구염상은 그가 더 이상 옹졸한 얼굴을 하지 않자 예의를 갖추었다.
“정말 길을 잃었습니다. 죄송하지만 헌원 공자께서 저를 데려다주실 수 있으실지요?”
헌원사책은 감탄했다. 목소리까지 이렇게 좋다니! 대체 어떤 가문에서 이렇게 물처럼 부드러운 여인을 키워냈단 말인가.
그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아가씨, 댁이 어디십니까? 마침 저에게 시간이 있습니다.”
여인은 지나간 일에 얽매이지 않는 데다,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소란 없이 차분했다. 다만… 혼담이 오가고 있는지를 알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헌원사책은 왠지 살짝 민망해졌다. 하지만 그는 형님의 혼사가 정해지는대로 어머니에게 찾아가 혼담을 청하자고 말씀드려야겠다 생각했다.
구염상이 감격한 듯 웃었다.
‘정말 잘 됐어.’
“영정문永定門까지 데려다주시면 됩니다.”
순간 봉익이 놀란 눈빛을 했다. 영정문이라면 일품 고관들의 저택이 있는 곳이었다.
헌원사책이 즉시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그러시군요. 저희 집도 그 거리에 있습니다. 형님, 저희 사사 형님께서 앞에 계시니 이만 가 보세요. 저는 아가씨를 모셔다 드리고 금방 다시 오겠습니다.”
헌원사책의 말에 봉익은 속으로 그가 정말 생각이 짧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 아가씨의 하인들은? 정말로 잃어버린 거라면 그녀는 어찌 이런 모습으로 밖에 나왔는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고?’
그렇다면 여인의 가족들도 너무 어리석지 않은가. 가문의 아가씨가 지금 어떤 꼴이 되었는지 정말로 모른다고? 옷 한 벌로 신분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만약 신분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도 그런 거라면?’
이렇게 천하절색인 아가씨인데, 데리고 나와서 사람들 앞에 일부러 드러내려는 목적이 아니었다면 하인들은 그녀에게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조금 전 그녀는 계속해 한쪽 방향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찾는 쪽에서는 전혀 주인을 찾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집안에서 누군가 고의로 그녀를 내버려두고 간 건가?’
봉익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아가씨는 헌원사책에게 잃어버린 일행을 찾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곧장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하자, 기뻐하기는커녕 한숨을 내쉬었다.
‘왜지?’
봉익은 이 거리에 그녀를 향한 독사와 맹수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니면 집안에 분명 남모르는 다툼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지 않나?’
여인은 말하는 모습이나 기개로 봤을 때 틀림없는 적출이었다. 헌데 적출 아가씨에게 이렇게 실의에 빠질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한편, 구염상과 헌원사책은 봉익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한 명은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한 명은 데려다주기로 결정했기에 자연스레 공통의 목적이 시급할 뿐이었다.
구염상이 막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노비 차림의 노인이 땀을 철철 흘리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가와 말했다.
“아가씨! 늙은 종이 드디어 아가씨를 찾았군요! 어서 저와 함께 가시지요. 큰아가씨께서 앞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애가 타서 어쩔 줄을 모르십니다.”
비록 아가씨와 함께 할 수 없음에 실망했으나 즉시 정신을 차린 헌원사책은 노인에게 친한 척 말을 걸려고 했다. 그러나 돌연 자신을 잡은 노인에게서 몸부림쳐 벗어난 구염상이 헌원사책의 뒤로 몸을 숨겼다.
헌원사책의 옷자락을 붙잡은 구염상은 긴장해 있었다. 구염상은 혹시라도 노인에게 넘겨질까 두려웠다.
“저는 저 사람을 모릅니다. 저희 집의 노비는 모두 태감입니다. 태감이라면 저 나이에는 모두 고관이 되어야 합니다만, 공자께서 보기에 저자가 그런 것 같습니까? 저는 모르는 자입니다!”
다시 다가온 노인이 빠르게 손을 내밀어 구염상을 붙잡으려 했다.
‘못된 계집, 태감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순간 빠르게 손을 내민 봉익이 구염상을 자신의 뒤로 잡아당겼다. 동시에 옥으로 만든 접선이 일순간 여섯 개의 얇은 날로 나뉘며 빠르게 늙은이를 기습했다.
누군가 감히 손을 쓸 거라 예상하지 못 한 노인이 재빨리 후퇴했다. 이어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노인의 표정이 급변했으나, 그는 이전과 다름없이 차분하게 말했다.
“공자, 늙은 노비는 그저 아가씨를 모시고 가려는 것뿐이니 방해하지 말아 주시지요.”
헌원사책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밀치락달치락하던 사람들은 구경거리가 생기자 갑작스레 방향을 바꾸어 구염상에게로 몰려들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어쩌다 저들을 마주쳐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노인이 쳇 소리를 냈다. 달갑지 않은 눈빛으로 어사대의 큰 공자가 보호하는 여인을 쳐다보던 노인은 돌연 사람들 틈에 섞여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도련님의 계획을 망치다니! 빨리 도련님께 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