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55)화 (355/449)
  • 외전 구염상 1-4

    시끌벅적한 바깥으로 석양이 낮게 깔려 있었다. 구염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지금 이곳은 궁 밖이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황궁의 공주를 소리소문 없이 궁 밖에 옮겨 놓을 수 있는 자라면 상대의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놀라지 않도록 자신을 조용히 이곳에 옮겨 놓을 수 있으면서, 왜 구태여 손을 대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구염상의 시선이 구염예락에게 머물렀다. 여전히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설마 내가 자기를 꾀어내어 궁을 나왔다고 덮어씌우려는 걸까?’

    멍한 구염상을 본 구염예락의 눈빛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뾰족하게 변했다. 입을 삐죽 내민 그녀의 얼굴에서 소녀의 가냘픔과 여인의 자태가 동시에 드러났다.

    “좀 괜찮아진 거야? 정말 성가셔. 나와서도 이렇게 번거롭게 굴다니!”

    구염예락은 말을 하면서도 줄곧 여러 소리가 들려오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우리도 어서 가자. 궁문이 닫히기 전에는 돌아가야 한다고.”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밖을 향해 걸어 나가는 구염예락의 뒤를 구염상이 다급히 쫓아갔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혼자 남아 외톨이가 될 수는 없었다.

    구염상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구염예락을 뒤쫓았다. 아무리 상대가 자신을 적대시하고 있다 해도 지금 반항하는 건 헛수고일 뿐이었다. 또한 구염상은 구염예락이 직접 자신에게 맞서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구염예락의 뜻대로 동행해 준다면 어쩌면 어머니에게는 폐를 끼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구염상은 객잔을 나서자마자 흥분한 구염예락의 뒤를 쫓으며, 자신을 옮긴 사람이 구염예락일 리 없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구염예락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구염상은 대마마가 과연 언제쯤 자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지 궁금했다.

    그 시각, 궁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고요했다. 상 공주는 어제 감기에 걸려 약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침대의 휘장은 내려져 있었고, 침대 밖에는 야간 당직을 서는 시녀 두 명이 서 있었다.

    침대 위에 누운 주인은 가끔씩 기침을 했다. 두 시녀는 괜찮으시냐 묻는 말에 기침 소리가 잦아들자 긴장을 놓았다. 공주께서 아픈 탓에 잠을 푹 못 주무시는 모양이었다.

    * * *

    궁 밖의 밤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칠월 칠석은 그야말로 여인들의 명절이었다. 칠석이 오면 따로 이를 위한 시장이 열릴 뿐만 아니라, 가문의 여인들을 위해 복을 비는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었다.

    칠석을 챙기는 사람들은 딸이 한걸음씩 높이 오르기를 바라며 새빨간 등을 내걸었다. 백성들은 딸에게 붉은 천 몇 자를 잡아당기게 하여 특별한 의미를 지닌 옷을 만들어 주었다.

    그중에서도 칠석에 가장 신경을 쓰는 이들은 바로 조정의 관리들이었다. 이날은 자녀들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하는 날로, 이들은 달빛이 밝은 밤 사원의 문이 열리면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렸다.

    물론 황궁에서도 칠석을 그냥 넘기지는 않았으나 황제가 이날을 그저 아이들의 명절이라고 여길 뿐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탓에 딱히 시끌벅적하게 보내지는 않았다.

    해질 무렵, 연경의 거리는 마치 바다처럼 놀라웠다. 향료, 도구, 등불 등 없는 게 없을 정도로 가지각색의 신기한 물건들이 즐비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님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부모님의 어깨 위에 앉아있었다. 길상吉祥 인형 같은 옷차림에, 손에 다양한 먹거리를 든 아이들은 사람들이 바글대는 거리에서 실컷 웃고 떠들었다.

    나이가 찬 소년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한가로이 돌아다녔고, 학문과 품행이 단정한 이들은 자연스레 청산靑山의 이름을 딴 찻집 ‘육대락천六臺落天’으로 모여 들었다. 문학적 소양을 자신하는 이들은 호숫가로 모였고, 무예가 출중한 이들은 무술 경기를 위해 만든 무대에 올라 무예를 겨뤘다.

    각양각색의 인파가 몰려든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구염상은 구염예락의 시종들이 인파 속에서 자신의 안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염예락을 따라가기 위해 그녀는 스스로 인파를 헤치고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구염상이 혼자 환궁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데다 이미 객잔에서 나올 때부터 인파가 몰려 어디를 봐도 거리에는 그저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느니 일단은 구염예락을 따라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구염상은 구염예락이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구염예락이 계략을 꾸민 것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대책을 강구할 수는 있으리라.

    “언니, 기다려요!”

    구염상은 인파를 헤치고 멀리 달려가는 구염예락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다. 궁 밖으로 나와본 적이 없는 탓에 바깥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매우 적었기에, 도움을 청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아문衙門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야 했다.

    그러나 구염예락은 이미 번화한 장터와 가지각색의 물건에 시선을 빼앗겨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만약 들었다고 해도 뒤에서 쫓아오는 배다른 동생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두 명의 시위 뒤를 바짝 뒤쫓던 구염상은 숨이 가빠오는 걸 느꼈다. 이렇게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는 동안 부디 어머니가 갑작스레 자신을 보러 벽지원에 와 주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한편, 현천기는 길가에 위치한 찻집의 별실에 앉아 있었다. 거리 위 사람들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아래에는 계속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오는 어린 아가씨와 거침없는 대갓집 아가씨의 모습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대인, 도착했습니다.”

    현천기의 경직된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그의 눈에는 적공주가 발버둥치는 모든 행동이 헛수고처럼 보였다.

    “지키고 있거라. 반 시진 후에 다시 움직이겠다.”

    “네.”

    현천기의 눈은 인파 속에서 발버둥치는 회색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입가에 조롱하는 듯한 미소가 퍼졌다.

    ‘은밀히 서로 주고받는다’고 했던가. 자신의 딸이 가난한 서생과 인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과연 황후는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화가 나서 죽으려 들겠지?’

    딸을 잘못 가르친 것은 어미의 죄였다. 그리고 그 기회를 잡는 건 금비의 몫이었다.

    두 명의 시위가 길을 열어 준 덕분에 구염예락은 아주 즐겁게 놀았다. 양손에 좋아하는 물건을 가득 든 그녀는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한 후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구염상은 너무나 피곤했다. 인파 속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느라 정신이 없던 나머지 장터에 푹 빠져 있는 구염예락과 달리 그녀는 어떠한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앞쪽에 위치한 노점은 매우 컸다. 위에는 한 노인이 손에 든 종이를 통해 문제를 냈고, 그 아래에는 학생으로 보이는 많은 이들이 글자를 적고 있었다. 주위는 구경꾼들로 가득했다. 노점을 메운 사람들을 울타리라고 한다면, 이곳은 마치 철옹성 같았다.

    가냘픈 구염상이 눈 깜짝하는 사이, 구염예락의 시위가 벌려 놓은 인파가 일순간 빠르게 합쳐졌다. 순간 구염상의 눈앞에 펼쳐진 건 쉴 새 없이 떠드는 사람들과 의제를 제시하는 시문時文 소리 뿐이었다.

    ‘언니는 어디 있는 거지?’

    구염상은 너무나 초조했다. 그녀는 혹시라도 인신매매를 당해 다음날 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일 따위는 겪고 싶지 않았다. 비록 일을 꾸민 자가 자신을 그리 처리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지만, 혹시라도 작은 이익에 급급해진 자들이 엉뚱한 짓을 벌인다면 앞일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언니! 언니!”

    구염상은 조급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쉴 새 없이 발돋움을 하며 어떻게든 구염예락이 사라진 쪽을 확인하려고 했다.

    “언니!”

    아무리 철이 들었다고 해도 구염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궁 밖으로 나와 본 적도, 누군가를 해쳐 본 적도 없는 열 살 안팎의 소녀일 뿐이었다. 낯선 무리 속에서 본능적인 불안이 그녀를 위협했다. 울어도 소용없다는 걸 몰랐다면 아마 진작에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울었을 것이다.

    구염상은 있는 힘껏 뛰었다. 작은 몸으로 계속해 인파를 뚫고 또 뚫으며 그녀는 구염예락을 찾으려 노력했다. 비록 큰 눈은 빨개져 있었지만 놀랍게도 마음 속 깊은 곳은 매우 평온했다. 이는 자신의 앞에 놓인 결말이 결코 바람직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의 자포자기에 가까웠다. 지금 그녀의 발버둥은 그저 헛수고에 대한 위로일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높이 뛰어오른 구염상의 발이 아래로 떨어지던 순간이었다. 땅이 아닌, 딱딱한 물체 위를 밟은 구염상이 다급히 옆으로 움직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 잘못이에요. 죄송합…….”

    고개를 든 구염상의 눈앞에 은백색의 비단 장포가 눈에 들어왔다. 구염상은 다시 빠르게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뒤를 쫓던 하인은 마치 구염상을 못 본 척, 과감한 손길로 뒤엉킨 사람들과 그녀를 떨어뜨렸다. 도련님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남자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길에서 좀 부딪혔다는 이유로 상대를 못살게 굴 생각은 없었다.

    인파에 휩쓸린 구염상이 순식간에 납작해졌다.

    “…봉 형님? 와, 정말 형님이시네요! 저는 사책史冊입니다. 저희 형님도 안에 계세요.”

    순간 고개를 돌리고 웃는 척을 한 남자가 곁눈질로 인파 속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작은 얼굴을 힐끗 바라본 후, 곧장 헌원사책에게로 달려갔다. 세상에 예쁜 여인은 많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저는 헌원씨 가문의 둘째 아들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구염상은 그의 머리에 장식된 전기석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는 어머니의 침소에서 본 옥채의 비취색 방울과 같은 것이었다. 어마어마하게 값비싼 물건임을 보아 그는 부자가 아니면 귀한 집 자제임이 분명했다. 문득 ‘헌원’이라는 두 글자가 구염상의 귓가에 꽂혔다.

    빠르게 허리춤을 더듬어 본 구염상은 손에 느껴지는 거친 질감에 순간 실망을 느꼈다. 그녀에게는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고, 하필 입고 있는 옷도 회갈색의 시녀 복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이 유일하게 환궁할 절호의 기회였다.

    하인들의 시중을 받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주인을 위해 왼쪽에서 길을 정리하는 사람과 오른쪽에서 길을 정리하는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자 조금 전 오른쪽에서 밀려났던 구염상은 갑자기 왼쪽에 의해 다시 오른쪽으로 밀려났다. 순간 기댈 곳이 없어진 그녀가 휘청거렸다. 덕분에 구염상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의 몸으로 밀려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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