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1-3
다행히 헌원사사가 아예 장서열의 눈에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는 삼 년에 한 번 치르는 전시殿試(황궁 대전에서 거행되며 황제가 친히 주최하는 최고의 시험)에서 장원으로 급제하며 만천하에 이름을 알렸다.
일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때마침 장 부인 주사섬과 장 노부인 조옥언이 입궁했다. 헌원사사가 특별히 우수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한데 모여 앉은 여인들은 분위기에 맞춰 헌원 대사마 가문의 장자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평소 입이 무겁고 말이 적은 주사섬 역시 헌원사사의 인품을 칭찬했다.
장서열은 그제야 헌원사사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올케가 떠난 뒤, 즉시 조사를 명한 장서열은 예상보다 좋은 결과를 얻었다. 헌원사사는 특출난 인재였으며 사생활도 깨끗했고, 인품과 자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태부의 딸인 주소유가 가르치며 키운 덕분에 인품과 학식 모두 매우 출중했다.
헌원사사의 모친 주소유의 품성은 밖에서 볼 때 더욱 훌륭했다. 헌원사사는 첩실이 없는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친형제가 많은 데다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훌륭한 인재였다. 또한 가족 구성원 모두가 신중한 언행으로 유명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들이 문란할 리가 없었다.
순간 장서열의 마음이 움직였다. 이렇게 좋은 남자라면 딸을 위해 빼앗아 와야 마땅했다.
‘아니지, 아니지. 아직 구염예락의 남자도 아닌데, 어찌 빼앗아오는 것이겠는가?’
장서열은 기세등등한 태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 * *
구염상의 생활은 언제나처럼 평온했다. 그나마 가장 규범을 벗어난 일이 있다면 제방 난간에 엎드린 채 물고기를 보다 옷을 더럽힌 일이었다. 물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가벼운 옷자락, 그 위로 이어지는 가늘고 긴 금 소리… 이러한 단조로운 것들이 구염상의 일상이었다.
구염예락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단연코 구염상이었다. 그녀는 구염상을 볼 때마다 그녀를 밀어서 물속에 빠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며 충동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러나 현명한 구염상은 구염예락이 다가오면 제방 중간에 걸터앉은 채 절대 상대에게 상상을 행동으로 옮길 기회를 주지 않았다.
“언니, 어쩐 일로 오셨어요?”
담담하게 웃는 구염상은 약간 백치처럼 보였다. 어머니처럼 거리낌 없이 웃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영된 탓이었다. 비록 사람들이 멍청하고 어리석다 손가락질해도 상관없었다.
그 모습을 본 구염예락의 마음이 그제야 균형을 찾았다. 아무리 예뻐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저런 바보일 뿐인데! 황후 모녀 중 하나는 화만 낼 줄 알았고, 하나는 바보처럼 웃을 줄만 알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구염상은 어머니보다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한 뒤로 한 번도 벽지원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덕분에 대주국 제일공주라는 명성은 구염예락의 차지가 되었다. 이는 다른 사람의 눈에 구염예락이 구염상보다 예쁘고 철이 들어 보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람들은 구염상이 아홉 살이 되던 해부터 벽지원 문밖을 나선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구염예락은 구염상을 도발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구염예락은 바보 같은 동생과 동맹을 맺고자 했다.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희생양으로 삼기 딱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큰 그림을 떠올린 구염예락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가 빠르게 동생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가자! 이 언니에게 네 정원을 좀 구경시켜 줘.”
구염예락은 다짜고짜 구염상을 잡아끌며 빠르게 하인들을 따돌렸다.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녀가 서둘러 말을 꺼냈다.
“며칠이 지나면 벌써 칠석인데, 그날 열리는 걸교乞巧회(칠석날 밤 부녀자들이 바느질을 잘하게 해 달라고 직녀성에 빌던 민간 풍속)가 정말 시끌벅적하대. 나가는 법은 내가 알아. 비밀통로가 있거든.”
바짝 다가온 구염예락이 구염상의 귓가에 마지막 말을 속삭였다.
“가든 말든 이 언니가 너를 챙기지 않았다고 딴소리만 하지 마.”
말을 마친 구염예락은 누가 이야기를 엿들은 건 아닌지 두려워하며 긴장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어머니 금비의 말을 어기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혹시라도 생각하지 못한 사고가 발생할까 두려웠다. 희생양이 필요한 건 그 때문이었다.
구염예락에게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칠석 같은 날에는 곁을 지키는 호위들이 있으니 안전했고, 궁 밖으로 나갈 통로까지 찾은 마당에 혼인을 하기 전 바깥세상을 보고 싶다는 소원이 그리 잘못된 것 같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향을 바치러 갈 때 이외에는 궁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문제는 혼자 나가는 게 두렵다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그래서 구염예락은 구염상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사실 구염상이 자신보다 더 예쁘고, 어리석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만약 마마들이 겁을 줄 때 한 말처럼 정말로 바깥에 인신매매범이 있다면, 그들은 둘 중 분명 구염상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꼭 인신매매범 때문이 아니라도 몰래 나간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키게 된다면 구염예상은 모든 게 구염상이 계획한 일이라고 말할 참이었다. 구염상이라면 매일 홀로 정원에 머무른 탓에 바깥이 궁금했을 거라고 뒤집어씌우기도 쉬웠고, 또 특유의 음울한 성격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핑계를 대기도 좋았다.
‘일석이조의 방법을 생각해 내다니!’
구염예락은 생각할수록 자신이 똑똑하다고 느꼈다. 어쨌든 겁이 많은 구염상은 이 일을 일러바치지 못할 것이고, 설령 말한다고 한들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무려 궁 밖으로 나가는 일이었다. 구염예락은 구염상의 마음이 움직일 거라 믿었다.
그러나 구염상은 전혀 내키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눈을 깜박이며 갈수록 머리를 이상하게 쓰는 언니를 바라보았다.
‘금비의 머리가 어린 딸의 목 위에서 자라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구염상은 구염예락이 대체 왜 항상 제 잘난 맛에 사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구염예락의 모친인 금비조차도 그리 총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가 어머니를 지키는 일에 있어 여러 차례 실수를 저질렀을 뿐.
구염상은 한숨을 쉬었다. 내명부란 직접 겪지 않으면 누구도 속단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상이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어려운 상황을 많이 보아 온 구염상은 어머니에게조차 마음을 합해 선을 행하자고 감히 설득하지 못했다. 만약 그녀가 어머니를 설득한다면 어쩌면 그 틈을 타 아랫사람들이 보란 듯이 어머니를 쳐낼 수도 있었다.
구염상이 놀란 척하며 말했다.
“언니는 궁 밖으로 나갈 수 있어요?”
“조용히 해!”
깜짝 놀란 구염예락이 급하게 구염상의 입을 막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하인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왜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는 거야! 나를 해치고 싶은 거야?”
보아하니 구염예락은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 듯했다. 구염상은 온순하면서도 달콤한 표정으로 웃었다.
손을 푼 구염예락은 속으로 맹한 얼굴을 한 동생을 더욱 업신여겼다.
“이렇게 분별력이 없어서야! 그래서 나랑 나갈 거야, 말 거야? 밖에는 모든 게 다 있어. 등불들, 수많은 인파, 그리고 우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도 아주 많대!”
가장 중요한 것은 어디선가 전해지는 전설처럼 어떤 남자와 옷깃이 스쳐 고개를 돌렸을 때 평생 잊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지는 일이었다.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하지만 구염상은 그런 일을 동경하지 않았다. 그저 구염예락이 궁을 빠져나가는 통로를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목숨을 걸 만한 일을 무려 공주에게 발설한 간 큰 이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군가가 구염예락을 해치려는 걸까? 아니면 그녀를 해치는 틈에 어머니의 지위를 흔들려는 목적?’
반달처럼 반짝이는 눈을 뜬 구염상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바깥세상에 정말 그렇게 좋은 것들이 많대요?”
“그야 당연하지!”
구염예락은 최선을 다해 구염상을 유혹했다.
하지만 구염상은 시큰둥했다. 그녀는 구염예락이 돌아가면 곧장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구염상이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뿐이었다. 아버지의 관심을 끄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 * *
한편, 구염예락을 바라보는 현천기의 눈빛은 극도로 차가웠다. 뒷짐을 진 채 꽃이 만발한 후궁에 선 현천기는 관목을 기어오르는 뱀처럼 음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늘에 걸린 밝은 달을 마주하고도 하얀 서리처럼 냉랭한 표정이었다.
모든 하인을 물린 구염예락은 두려움에 고개를 숙인 채 창문 안쪽에 서 있었다. 대체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현천기가 이렇게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나… 나는…!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상대가 주는 압박을 견디며 구염예락이 거만한 머리를 치켜들었다. 이곳은 자신의 처소였다. 그런데 자신이 왜 갑자기 튀어나온 이자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현천기의 입꼬리가 비아냥거리듯 올라갔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만약 빠르게 소식을 듣지 않았다면 내일 밤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다.
현천기는 여러 차례 구염예락에게 경고해 왔다.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마지막 순간에 바로 구염상을 잡아끈 다음, 누구와도 접촉할 기회를 주지 말고 제일 먼저 궁을 나가라고.
그런데 이 백치는 끝내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계획을 하루 앞당겨 버렸다. 만약 현천기의 수하가 이를 놓쳤다면, 지금쯤 그들은 모조리 황후에게 발각되어 이 일을 꼬투리 잡지도, 황후를 끌어내지도 못 했을 것이다.
제때 구염상을 통제했다는 생각에 현천기의 마음에 일던 경멸이 약간 가라앉았다. 이것이야말로 거사가 아닌가. 현천기는 금비가 높은 자리에 오르도록, 그리고 금비는 앞으로 황제 앞에서 현천기를 추켜세워 주기로 약조한 상태였다.
이것이 금비와 현천기의 거래였다. 하지만 그것도 다 구염예락 같은 백치가 자신을 그저 궁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태감으로 믿어야만 성사될 수 있는 일이었다.
벽지원에 사는 그 적공주 역시 이 공주처럼 멍청하면 더 좋겠다고, 현천기는 생각했다.
* * *
정신을 차린 구염상은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베고 있던 베개가 부드럽지도, 옥침만큼 시원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순간 커다랗게 뜬 눈으로 신중하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일어났어?”
살구빛 비단 치마를 입은 구염예락은 찰랑이는 긴 머리카락을 어깨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순간 빼어난 이목구비가 더욱 아름다워 보였지만, 눈을 너무 높이 치켜뜨지 않았다면 더 보기 좋았을 거라고 구염상은 생각했다.
“여기가 어디예요?”
구염상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록 주변에 자신의 하인은 하나도 없었지만 일단 구염예락 옆에는 시위侍衛가 둘이나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안전하다는 의미였다.
일어나 앉은 구염상의 귀로 밖에서 떠들썩하게 물건을 파는 소리와 인파가 넘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염상은 놀랐지만 빠르게 표정을 숨겼다.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분명 조로전으로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눈 깜짝할 새 이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