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1-2
시간은 무심히 흘러 푸른 새싹이 돋고 나무들이 솟아났다. 오랜 세월 버티고 섰던 고목들은 강산을 이루었다.
열세 살이 된 구염상은 가냘픈 몸에 당대 제일이라 할 만한 미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는 아무리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해도 스스로 반짝이는 빛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자녀들을 혼인시키는 데 있어 영덕제에게 혼인 의사를 묻는 일은 필요하지 않았다. 구염락은 황권을 위해 딸을 권문세가에 시집보낼 필요도, 역으로 그들의 아들딸을 끌어들일 필요는 더더욱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딸의 혼사는 그 어머니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금용은 장녀 구염예락의 부마로 헌원 대사마大司馬(병조판서)의 장자인 헌원사사史師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헌원사사는 남자다운 품위를 갖춘 자로, 학식은 더욱 훌륭했고 가문 또한 나무랄 데가 없었다.
헌원 대사마는 황제에 의해 중용된 사람이었다. 능력이 부족하고 외모 또한 별 볼 일이 없는 그가 황제의 눈에 든 건 그야말로 천운이 따른 결과였다. 특히 그의 다섯 아들은 모두 하나 같이 뛰어난 인재로, 문관과 무관을 가리지 않고 고루 등용되어 있었기에 행여나 시집간 딸이 잘 지내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금비는 황제가 찾아와 쉬는 기회를 틈타 열네 살이 된 딸 예락의 혼사를 언급했다. 별것도 아닌 단순한 혼사를 구염락이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헌원 가문은 발칵 뒤집혔다. 헌원사사는 무어라 말할 겨를조차 없었다.
손을 흔들어 하인들을 물린 주소유가 격분하여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당신이 예락 공주가 어떤 성품인지 몰라서 그럽니다! 어찌 감히! 사사에게 교만방자하고 제멋대로인데다, 안하무인이라 항상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다니는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하라니요? 이건 우리 가문을 통째로 다 바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줏대가 없는 헌원상은 이제껏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는 모든 일을 지휘하며 한 번도 잘못된 결정을 내린 적 없는 부인이 격렬한 반응을 보이자 더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부인이 화를 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화가 난 주소유가 남편을 노려보았다. 비록 남편은 평소 말을 잘 못 알아들어 잔소리를 하게 만들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체면을 잘 세워 주는 사람이었다. 헌원상은 그녀의 말이라면 두말없이 따라 주었고, 첩도 두지 않은 채 성심성의껏 부인에게 최선을 다했다.
더구나 최근에는 아들들도 하나둘씩 출셋길에 올랐고, 하나뿐인 딸 역시 흡족하게 자라 주었다. 여태껏 주소유에게 불만이란 없었다. 그런데 별안간 금비 그 여우같은 계집이 자신의 잘난 아들을 눈독 들일 줄이야!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생고생해서 키운 아들을 어찌 그 거만한 공주에게 보낼 수 있겠는가. 주소유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헌원상은 공처럼 둥글둥글한 몸이 온통 떨리는 와중에도 아내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작은 부채를 흔들어 보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아내를 살피면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부인, 흥분을 좀 가라앉혀 보시오. 혼담을 건넨 분은 폐하이시오. 우리가 안 된다고 해서 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않소.”
오랜 세월 관직 생활을 한 헌원상은 자신의 분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무리 부인이 대단하다고 해도 그 영향력은 오직 집안에서나 먹힐 뿐이었다. 아무리 성질을 부리고 독기를 뿜어내도 황제가 윤허하는 범위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었다. 황제가 딸을 위해 사윗감을 고르고 있다. 헌원씨 가문은 감히 무어라 말할 자격이 없었다.
“만에 하나 우리가 폐하의 비위를 거스르면, 폐하께서 우리 가문이 지금처럼 권력을 잡고 있도록 놔두려 하시겠소? 부인은 정녕 우리 가문이 약해지길 바라시오?”
헌원상은 자신이 결국은 첩실의 아들일 뿐이며, 덕분에 학식이 얕고 근본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오늘날 누구나 바라는 ‘대사마’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건 모두 황제의 한마디 덕분이었다. 헌원상이 황제에게 맞서는 건 불가능했다.
손수건을 꽉 쥔 주소유의 주먹이 탁자 위를 세차게 내리쳤다.
“그럼 사사더러 정말 예락 공주와 혼인을 하라는 거예요? 안 돼요! 그 기고만장한 모습은 당신도 잘 알잖아요. 당신이 매일 그녀에게 지극히 예를 갖추는 것까지는 어떻게 참을 수 있다고 해도, 사사는 절대 안 돼요!”
“하지만 폐하께서…….”
아래쪽에 선 헌원사사는 표정 변화 없이 줄곧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논의 대상이 마치 자신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끔하고 준수한 얼굴에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를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 폐하께서 명하신다면 도리상 어찌 거스를 수 있겠어요.”
주소유가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지금 이리 화를 내는 것이 다 누구 때문인데! 사사야,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부인을 맞이할 때는 모름지기 얼마나 현명한지를 우선으로 보아야 한다. 만약 정말로 네가 예락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면, 앞으로 우리 가문에 좋은 날은 없을 것이다!”
순간 신경이 곤두선 주소유가 걱정하듯 물었다.
“사사, 너 설마 예락 공주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
헌원사사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어머니의 터무니없는 생각에는 수치를 느꼈다.
“어머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헌원사사 역시 구염예락을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말씀처럼 떠받들기 힘든 성격이었다. 하지만 신하 된 도리로 어찌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만에 하나 혼인이 성사된대도 기껏해야 잘 달래 주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주소유는 아들의 대답에 아니면 되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자신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아들이 금비가 낳은 딸과 사랑에 빠진다니. 생각만 해도 울화통이 터질 일이었다.
주소유는 일단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을 놓았다. 거만한 표정으로 무능한 남편을 한 번 훑어본 그녀는 시선을 돌려 그와 달리 마음에 쏙 드는 자식들을 바라보았다.
현재 주소유에게 가장 큰 만족을 주는 건 바로 그녀의 자식들이었다. 다섯 명의 아들들은 하나같이 훌륭한 인재였고, 딸은 사리분별에 능해 마음에 꼭 들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아들들이 너무 여리기에 좀 더 단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나마 가문에 자신이 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황실로 인해 생기는 자잘한 손실들을 어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주소유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냉소했다. 감히 황권에 대항할 수 없다고는 해도 아예 빈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헌원씨 가문의 뛰어난 장자라면 누구나 사윗감으로 탐낼 만했다. 황실에서의 문제는 황실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속으로 생각해 둔 바가 있는 주소유가 기분이 좋은 듯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안심하세요. 설령 사사의 부인이 정말로 공주가 된다 해도 그 말썽꾼은 아닐 것입니다. 폐하께 딸이 예락 공주 하나뿐인 건 아니니까요.”
주소유는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 비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제는 혼담을 남편에게 개인적으로만 언급했을 뿐, 아직 정식으로 혼사를 공표하지 않았다.
주소유가 노리는 건 바로 이 틈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암암리에 마치 모함을 하듯 황제의 뜻을 황후에게 알렸다. 또한 그녀는 황후의 오라비인 장서전이 자신의 남편인 대사마의 수하에서 얼마나 우수했는지를 누차 언급했고, 자신의 아들이 황제의 눈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문무에 모두 정통하다며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았다.
장서열은 조금만 불씨를 당기면 금방 불이 붙는 성격이었다. 금용이 헌원사사를 구염예락의 부마로 점찍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장서열은 그 즉시 금용을 누르고 싶어 했다. 오랜 세월 앙숙으로 지내며 금용을 없애지 못해 속으로 분노를 억누르고 있던 장서열은 사위를 들이는 문제에서도 절대 금용에게 그 무엇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서열은 처음에는 헌원씨 가문의 아들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게다가 금용이 고른 인물을 굳이 아쉬워할 이유도 없었다. 자칫했다가는 괜히 안목이 없다는 소리만 들을 터였다.
장서열은 며칠간 남몰래 사람을 시켜 3품 이상 모든 관리들의 아들들이 어떤 재목인지 알아보게 했다. 반드시 품행과 용모가 단정하고 성격이 활달해 상아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렇게 몇 단계를 거친 후, 황후와 왕 마마는 어사대 가문의 대공자를 사윗감으로 결정했다. 사람들이 치를 떨 정도로 법에 엄격한 소년이었다.
장서열은 그가 자신에게 꼭 맞는 사윗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일을 처리한다면 죽는 건 영원히 자신이 아닌, 상대방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위를 통하여 사적인 원한까지도 예법과 도덕으로 포장한다면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는 눈들 또한 완벽히 납득시킬 수 있었다.
장서열은 자신이 상대보다 능력이 부족하기에 지금껏 실패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윗감이 총명하다면 분명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해결해 주리라.
결정을 마친 장서열은 즉시 사람을 보내 사윗감의 품행을 알아보게 했다. 아무리 황후라도 사람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었기에, 사윗감과 그 가문이 설령 상아를 싫어한다 해도 딸에게 일평생 평안한 삶을 제공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가 알아보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면에서 훌륭하던 어사대 가문의 장자가 현재 형부 좌시랑이라는 직책에 앉아 나쁜 짓을 일삼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는 미녀를 통방으로 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싸움을 일삼지 않는 것이 다행인 자라고 했다.
장서열은 매우 화가 났다. 이렇게 악질적이고 품행이 좋지 않은 자가 사위라니 어찌 체통이 서겠는가? 그녀는 과감하게 사윗감을 포기했다.
장서열은 재빨리 다른 가문에 눈을 돌렸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헌원씨 가문의 아들에 맞먹는 이는 어사대의 아들뿐이었다. 그나마 다른 한 명은 이미 혼인을 한 상태였다. 그건 이제 연경에 남은 사윗감들이 일등 신랑감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장서열은 절대 금용의 사위보다 못한 이를 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즉각 선택을 보류했다. 차라리 금용의 뺨을 두어 대 더 후려치고 화를 푸는 것이 체면을 위해 딸을 시집보내는 것보다 나았다.
사실 이때쯤 장서열에게는 체면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금용에게 눌리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연경의 소년들이 하나같이 별 볼 일이 없으니, 차라리 다음 세대 소년들이 제일공자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딸을 시집보내는 편이 백 번 나았다.
한편, 주소유는 황후가 여기저기 사윗감을 찾으면서 정작 자신의 아들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바보 같은 황후는 다른 사람이 선택한 것을 빼앗는 게 가장 쉬운 길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잘 일깨워 주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