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51)화 (351/449)
  • 제351화

    약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들의 넓은 어깨에 몸을 기댄 그녀는 순간 어떤 마음으로 아들을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들의 등에 기댄 채 단조로운 주변을 바라보던 약연이 문득 말했다.

    “황상, 아십니까? 어미에게는 소원이 하나 있어요… 이 어미보다 낫다고 자처하는 이들을 모두 내 발아래 꿇어앉히는 것이지요.”

    구염락의 걸음은 안정적이었다.

    “마땅히 그러셔야지요. 짐이 환궁하여 국암사를 제일 사원으로 명하겠습니다. 앞으로 어머니께서는 사원에서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보이는 즉시 어머니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리라 하십시오. 어머니께서 받아 마땅하신 대우입니다.”

    약연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기껏해야 이 정도인 것인가.’

    “좋은 생각이군요.”

    구염락도 웃었다.

    “어머니, 줄곧 산속에만 계실 것이 아니라 일이 없으실 때는 나와서 다니십시오. 어디를 가시든 크게 한 곡조 뽑는 소리를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약연은 제왕의 생모였다. 세상 모두가 다 모욕을 당한다고 해도, 누구든 그녀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약연이 갑자기 자조하듯 말했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궁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구염락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사랑할 수 없는 녀석 같으니…….”

    약연이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됐습니다. 아직 늙지 않았으니, 그만 내려 주시지요.”

    “업어 드리게 해 주십시오. 아들의 효도를 받기도 쉽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약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들은 궁 안의 그 여인을 선택했다. 그러니 이제 분수에 맞게 살라고 모친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 * *

    “…입국하여 현사賢士(현명한 선비)를 아껴 주지 않으면, 이내 패망케 된다. 현사를 보고도 임용을 서두르지 않으면, 군주를 오도하게 된다. 현사가 아니면 서두를 필요가 없고, 함께 국사를 논할 것도 없다. 현사를… 소홀히 대하거나 내버리고도, 능히 그 나라를 보존한 경우는 일찍이 없다.”

    초혜전 대전에 선 구염황은 외운 구절을 단숨에 읊은 뒤, 등을 곧게 세우고 권서함을 바라보았다.

    권서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께서 적지 않게 정진하셨습니다. <친사(親士)>를 외우셨으니, 오늘은 바로 이 친사에 대하여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이 말의 뜻은 군주가 국정을 운영할 때, 현명한 선비를 아끼지 않으면 국가를 잃게 된다는 뜻이고, 현명한 인재를 만나면…….”

    시간이 흘러 구염황은 다섯 살이 되었다. 초혜전에서 오랜 세월 떨어져 지내던 권서함은 다시 등용되어 종1품 태자의 태부가 되었다.

    하지만 평온해 보이는 궁은 실상 보이는 것과 달리 전혀 안녕하지 않았다. 삼 년간 웅크린 채 힘을 키운 황제가 호국에 대항해 군사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간언해도 고칠 줄 모르고, 누구도 고집을 꺾을 수 없는 황제는 그렇게 천하제일의 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황제의 웅대한 청사진 속에서 전쟁은 무려 1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구염락은 호국을 아예 뿌리 뽑고 적진의 모든 세력을 궤멸시키려 했다.

    권서함은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버드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 위에는 여전히 과녁과 함께 거만한 표정의 소녀가 활을 잡고 서 있는 듯했다.

    이번 전쟁은 호국이 죽음을 자초한 결과였다. 심지어 권서함과 같이 전쟁을 지지하지 않는 문신조차 호국이 화를 자초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재작년, 외교 사절로 주국을 방문한 호국의 황자는 황후를 알현한 자리에서 자국의 강한 국력을 등에 업고 황후를 향해 대단히 불경한 언사를 내뱉었다.

    황제가 이러한 수모를 참을 리 만무했다. 그는 즉시 호국의 황자를 법으로 다스리겠다고 선언했다. 조정 대신들은 아연실색했고, 조금 전까지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던 황자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어리둥절해진 쪽은 황후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황제는 호국의 사절단을 돌려보내는 척 위장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 * *

    삼만 리 밖 혹한의 땅은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불었다. 주국과 호국의 군사들은 수차례 교전을 벌인 후, 지금은 양측 모두 후퇴하여 방어에 전념하는 상황이었다. 누구도 세 번째 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호국의 장수들은 주국의 황제를 일컬어 살인도 서슴지 않는 미치광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는 매번 직접 친정에 나섰다. 누군가 황위와 더불어 아름다운 황후를 빼앗아갈까 두렵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호국의 장수들은 괜한 욕설을 퍼부어서라도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했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높은 산 위에는 악독한 독사가 똬리를 튼 채, 언제든 그들에게 치명상을 입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이제 막 전장에서 퇴각한 구염락은 탕약을 한 모금 마시며 선혈로 인해 흥분한 뇌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투구를 꽉 쥔 채 혈관에서 펄떡이는 피를 가라앉혔다.

    소리자가 물러간 뒤, 막사 안에는 냉혹한 얼굴을 지운 구염락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언제든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듯 살육을 즐기는 표정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그 순간, 구염락은 갑작스런 어지럼증을 느꼈다. 흐릿한 그의 시야에 또 다른 자신이 용병 계획을 들춰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과거의 경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또 다른 자신이 아주 늙고 쇠약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어깨까지 드리워진 흰머리와 달리 그의 표정은 반짝반짝 빛났다. 또한 언제나 젊은 자신을 향해 비아냥거리던 모습과 달리, 지금 이 순간 그는 아주 평온했다. 마치 떠돌아다니던 영혼을 되찾은 듯 덤덤하고 침착한 모습이었다.

    “또 무슨 일이냐!”

    젊은이의 호통에 백발의 구염락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노련하고 차분하지만 여전히 패기 있는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호국과의 전쟁은 좀 어때?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충동적으로 벌인 행동이라니, 감당하기 힘들 텐데.”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꺼져!”

    연로한 구염락이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급하고 난폭했던 어린 시절의 성질을 견디지 못 하겠다는 듯,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끄럽기는. 죽은 뒤에도 그대를 보는 게 내게도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야.”

    갑옷을 입은 젊은 구염락은 그 말에 순간 고개를 들었으나 즉시 냉소했다.

    “늙어서 기력이 쇠할 때까지 천수를 누리고 죽다니 참 대단해. 진작 죽었어야 했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구염락은 언젠가 꿈속에서 장서열이 죽던 날, 무덤덤하게 하품까지 하던 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용포 차림의 연로한 구염락은 여전히 화를 내지 않았다. 젊고 경망스러운 자신이 아직까지는 참고 견딜 만하다는 태도였다.

    “짐도 과거 호국를 상대로 군사를 일으켰던 적이 있지……. 내가 어떻게 이겼는지 알고 싶지 않아?”

    갑옷을 입은 구염락이 아주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가 진정 나라도 된다는 말인가? 짐이 온전히 죽지도 않은 늙은이가 내뱉는 헛소리를 아쉬워할 것 같아?”

    연로한 구염락은 순간 분노가 치솟는 걸 느꼈다. 젊은 시절 자신이 정말 이렇게 소통이 안 되고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던가? 이자는 진정한 자신이 아니었다.

    연로한 구염락의 기억 속 자신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 중년에는 넓은 영토를 점령했고, 이후 스무 해 동안 나라를 안정시키며 마침내 자신이 거대한 제국의 황제임을 증명해 냈다. 당시 주국은 세상에 우뚝 선 왕조로 최강의 병마와 가장 날카로운 무기를 자랑했기에 향후 백여 년 이내로는 감히 대적할 나라가 없었다.

    연로한 구염락은 상대가 자신이 제안한 선물을 기뻐하기는커녕 불같이 화를 내자 대뜸 입을 열었다.

    “우리 두 사람이 기억하는 소년 시절이 왜 그렇게 다른지 알고 싶지 않나?”

    꺼지라는 신호로 손을 내저은 젊은 구염락은 자리에 앉아 지도를 펼친 후 다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관심 없어. 죽어 마땅한 너의 그 갑갑한 인생 따위 듣고 싶지도 않아. 어차피 죽은 몸, 당장 나가서 한 번 더 죽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짐은 바빠서 너와 놀아줄 시간이 없다.”

    호국과의 전쟁은 예상대로 힘들었다. 하지만 이미 뽑은 칼을 그대로 다시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또한 자신이 전쟁을 너무 서두른 탓에 장서열이 나라를 위험에 빠뜨린 황후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건 더더욱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구염락은 늙은이와 잡담을 주고받을 시간이 없었다. 늙은이의 기억 속, 장서열이 가슴 따뜻한 사랑을 주었던 일을 다시 돌아볼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지금 구염락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힘이었다. 이 비옥한 영토를 차지할 힘!

    젊은 구염락은 옆에서 쉴 새 없이 지껄이는 늙은이에게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연로한 구염락은 죽어서도 여전히 오만함을 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젊은 자신의 오만함 역시 그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연로한 그의 마지막 말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참담한 결말을 맞이했다.

    그 시각, 장서열은 국사國寺에 꿇어앉아 있었다. 그녀는 공물을 들고 한걸음 한걸음 산을 오르며 성심을 다해 부군의 평안과 건강, 그리고 승전을 빌었다.

    용포를 걸친 연로한 구염락은 장서열을 지켜보며 지금 이 상황이 참으로 역설적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낯익은, 그러나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여인을 보게 되다니.

    연로한 구염락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자신했다. 그러니 젊은 자신 역시 그녀를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다.

    만약 나뉘어진 두 구염락의 영혼이 하나가 된다면, 영문도 모른 채 속박되었던 젊은 자신의 영혼을 떠나 온갖 계략에 통달한 저 여인과 멀리 떨어질 수 있으리라.

    ‘반쪽 영혼을 붙들어 팔자를 고치다니, 실력도 좋군!’

    연로한 구염락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순간, 갑자기 눈앞의 여인을 심히 염려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백발을 흩날리며 웃고 있던 구염락의 얼굴이 일순간 더욱 냉혹해졌다.

    ‘망할 자식! 계략에 걸려들고도 알아채지 못 하다니!’

    불상 앞에 꿇어앉은 장서열이 웃는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어린 시절, 당신을 제 옆에 두고 잘해 주지 않았다면, 또한 당신이 나를 사랑해 준 것처럼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당신은 지금처럼 나를 지켜 주고 사랑해 주었을까요?”

    이 순간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남자, 당신의 거만한 모습마저 나를 기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인생의 갈림길에서 다시 한 번 생이 주어진다면, 그래도 당신은 나를 사랑할 건가요?

    나 장서열이 지금 이 순간 멀리 떨어져 있는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아나요?

    당신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전쟁터에 뛰어들었어요……. 그 사실이 내게 기쁨과 위안을 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요?

    본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