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50)화 (350/449)

제350화

‘몇 번이고 거듭해 나의 입궁을 막다니!’

아주 대단한 황후가 아닐 수 없었다. 역시나 고귀한 신분 출신이라 그런지 자신과는 한 마음이 아니었을 뿐더러, 제 모친처럼 이기적으로 자기 생각만 할 줄 알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생사를 걱정해 본 적이 없는 티가 났다.

화가 난 약연이 손수건을 비틀어 쥐었다. 절대 자신의 남은 평생이 그 두 모녀의 손에서 망가지도록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황제를 만나야 했다. 자신의 아들이 그 악독한 여인처럼 어머니가 입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리 없었다.

실로 오랜 세월을 참고 참아 간신히 기회를 얻었다. 약연은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장서열은 황궁에서 아쉬운 것 없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존귀한 나날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무슨 이유로 산속에 처박혀 고작 사찰 따위나 지켜야 한단 말인가!

자신은 황제의 생모인 성모 황태후였다. 평생 뜻을 굽히고 몸을 사리며 산속에 머무는 것이 아닌, 하늘을 찌를 만한 부귀영화를 누리며 세상 모든 부녀자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했다.

* * *

환궁한 장서열은 저녁 무렵 아이들을 재운 뒤, 머리에 꽂고 있던 주채를 떼어 냈다. 피곤한 듯 목을 움직인 그녀가 침대 위에 반쯤 드러누워 독서 중인 구염락을 보았다.

“어머니께서 정신이 온전치 않으신 것 같으니, 쉬는 날 찾아가서 좀 뵙도록 해요.”

고개를 들어 장서열을 한 번 바라본 구염락이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응.”

더 이상의 언급 없이 장서열은 곧 경칩에 있을 봄맞이 연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연회복이 벌써 도착했던데, 한번 입어 봐요.”

그러나 구염락은 별로 흥미가 없었다.

“내일.”

그리고는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장서열, 당신은 머리카락을 푸는 데만 대체 몇 시간이 걸리는 거야. 누군가 당신만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거울을 통해 구염락을 한 번 노려본 장서열이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주채를 다시 들고 머리 위에 꽂아 보였다.

구염락이 즉시 항복했다.

“부인의 행동이 우아하고 단정하여 보기만 해도 남편의 마음이 즐거운데, 내 어찌 정리에 시간이 걸린다고 싫어할 수 있겠소. 부인이 무언가 잘못 들은 것이 분명하오. 아니면 내 부군으로서 부인을 위해 다시 머리카락을 묶어 줄 테니, 푸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 주겠소?”

장서열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허튼 소리 하지 말아요.”

* * *

구염락은 조만간 찾아뵙겠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손자를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서신을 받았다.

서신을 받은 후, 구염락은 철저히 마음을 닫았다. 지난 이 년간 어머니는 확실히 인내심을 보여 주며 황실에 관하여 일절 묻지 않았고, 명예나 재산 등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절에서 오랜 세월 수양한 어머니가 지나간 일은 버리고, 불교에 귀의할 거라는 생각을 서서히 굳히던 참이었다.

구염락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의 서신은 뜻밖의 일도 아니었고, 따라서 딱히 실망했다 할 수도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친 끝에 수렁에서 빠져나와 오늘에 이르렀다. 어머니라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지금껏 그녀가 굳게 믿고 걸어온 길은 아들인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 터였다.

어머니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원했다. 아들의 위치에 기대어 권력을 휘두르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했다. 이는 구염락이 충분히 이루어 줄 수 있는 꿈이었다. 만약 어머니가 신하들을 보살펴 주기 위해 조정에 들어가고 싶다 해도 구염락은 마땅히 그 소원을 이루어 드릴 수 있었다.

하지만 구염락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여인이 한데 모여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는 건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구염락은 그 둘을 절대 함께 두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의 절박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평범한 삶을 견디지 못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혜령이 조심스럽게 한 발짝 다가가 물었다.

“폐하, 내일 국암사로 행차하시겠습니까?”

“아니다, 며칠 미루도록 하자.”

어머니와 따로 이야기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헌원씨 가문은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황제는 헌원오계로 이름을 바꾼 헌원상에게 한림원의 편수(編修, 국사편찬에 종사하던 사관)라는 직위를 내려주었다. 비록 요직은 아니었지만 한림원 편수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서책을 접할 수 있는 데다 국가의 대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자리이기에 많은 학자들이 꿈에 그리는 곳이었다.

소식을 들은 헌원오마는 온몸으로 기쁨을 발산하며 연로한 몸으로 원기왕성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누가 청하든 술까지 두어 잔씩 마셔 주었다. 딸과 아들을 향한 애정 역시 그대로였다.

사람들 역시 자연스러운 태도로 헌원 상서를 대해 주었다. 누가 감히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겠는가. 헌원 씨 가문의 여식은 황후와 친분이 두터웠고, 그런 황후를 무려 황제가 중시하고 있었다. 벼슬이 오가는 정도는 차 한 잔을 마시듯 쉬운 일이었다. 원망을 하려면 운이 좋지 않은 자신의 여식이 황후 앞에서 감히 입을 열 수 없는 사실을 탓해야 했다.

헌원 상서는 물론, 헌원 노부인도 기뻐했다. 이들은 새해 첫날 며느리 주 씨가 금 이랑을 잡아다 곳간에 가두는 심술을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간섭하고 싶지 않을 만큼 크게 기뻐했다.

헌원 노부인은 바보가 아니었다. 금용은 진작에 황은을 잃은 여인이었고, 자신의 딸은 황후와 친분이 두터웠다. 무엇이 더 중요하겠는가? 뒷배도 없는 일개 첩실을 며느리가 내쫓고 싶어 한다면 그대로 내쫓아 버리면 그만이었다.

곳간에 갇힌 금용은 이틀 밤낮을 굶었다. 남편을 위해 국을 끓이는 금용이 거슬렸던 주소유는 악랄하게도 남편이 외출한 틈을 타 금용을 곳간에 가둬 버렸다. 그녀는 이미 규율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금용은 처량하게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배가 너무 고픈 탓에 나무문을 두드리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이대로 죽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안 돼.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내…보내 줘……. 내보내 달라고…! 내보내 줘…….”

“소용없으니 소리 지르지 마시오! 부인을 불러 봐야 좋을 일이 없습니다, 금 이랑.”

한편, 주소유는 회임한 지 사 개월이 된 배를 내민 채 난로가 있는 방에 앉아 태아를 보호하는 인삼탕을 마시고 있었다. 눈앞에서 금용이 사라지자 그토록 속이 편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이 추운 날마저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리는?”

“한림원에 들어가시는 일을 상의하기 위해 주부에 어르신을 뵈러 가셨습니다.”

입을 닦은 주소유가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연한 일이지. 내 아버님께서는 한림원사翰林院士까지 지내셨으니 상공에게 많은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것이다. 아, 그 망할 것은?”

시녀가 즉시 대답했다.

“아직 갇혀 있겠지요? 어젯밤 나리께서 그 사실을 아셨지만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말을 하는 시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리께서 부인에 대한 애정이 갈수록 깊어지시는 게 보입니다. 누구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말이에요.”

주소유가 기분 좋게 웃었다.

“하여간 너는 말을 참 기분 좋게 하는 재주가 있다.”

‘감히 그에게 국을 끓여 주려 해?’

주소유는 금용이 정말 간이 부었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먹고 탈이라도 나면 어쩔 뻔했는가. 그러고도 아무 속셈이 없다고? 고약한 것 같으니!

‘실컷 갇혀 있어 보라지. 언젠가는 깨달으면 그 더러운 입을 다물고, 잘난 척도 멈추겠지. 곳간에서 다시 나와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자!’

* * *

농교는 아무리 생각해도 황후마마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마, 일전에 헌원 공자의 관직을 막지 않으셨습니까. 헌데 어째서 마음을 돌리셨습니까?”

농교는 당시 헌원상이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던 황후의 말을 직접 들은 터였다. 장서열은 살며시 웃으며 차를 우리는 농교의 실력이 늘었다고 칭찬할 뿐,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물론 장서열에게는 그만한 의도가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관직이나마 가지고 있어야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 아닌가. 헌원상은 이제 목표와 기대를 갖게 될 것이다. 장서열은 헌원상이 그렇게 줄곧 노력하면서도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해 긴 시간 허송세월을 하길 바랐다.

‘평생 한림원에서 썩으며 편수나 하라지.’

얼마나 좋은가. 그렇게 된다면 주소유 역시 높은 지위에 오른 남편에게 의지하여 어린 아들에게 다른 집 아가씨를 유혹하라고 가르치는 짓 따위는 하지 못 할 것이다. 더할 나위가 없었다.

* * *

국암사 아래, 드디어 어머니를 뵈러 온 황제의 의장이 도착했다.

흥분한 약연은 산 아래까지 내려와 아들을 맞이했다. 오늘 그녀의 옷차림은 아주 평범했다. 황후를 고자질하기 위해 특별히 궁상을 떨지도, 그간 좋은 물품을 받지 못 했다고 암시하지도 않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약연의 머리에는 주채가 하나 꽂혀 있었다. 매우 값비싼 흑단목에 금을 입힌 것으로, 그 안에 담긴 절제미로 보아 최상급의 물건이 분명했다.

약연은 황제가 내린 뒤에도 계속해 시녀의 부축을 받으면서 힐끔힐끔 머리를 내밀었다.

“우리 황손은. 응? 황손은?”

그야말로 손자를 보고 싶어 하는 인자한 할머니의 전형이었다.

구염락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좋은 분이었다. 그녀는 다른 어머니들처럼 아들을 위해, 아들을 생각해 행동했다. 어머니는 자신을 키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저 기회와 능력이 없었을 뿐이다.

구염락이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머니, 들어가시지요.”

약연이 실망한 듯한 눈빛을 거뒀다.

“그래요… 황아는 어찌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구염락이 묘한 말투로 답했다.

“황아를 가졌을 때 황후가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병이 또 도졌나 봅니다.”

일순간 약연의 입가가 어색하게 경직되었다.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듯했다.

구염락은 딱히 폭로할 의도가 없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머니, 왜 그러십니까? 혹 어디가 불편하신 거면, 제가 업어 드릴까요?”

구염락은 이것 외에는 어머니가 원하는 걸 해 드릴 수 없었다. 만약 삼 년 전과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진다면 이렇게 운이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약연의 시선이 아들이 내민 손으로 향했다. 자신을 반쯤 닮은 얼굴에는 제왕의 냉혹함과 자식의 온화함이 동시에 드러나 있었다. 두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얼굴을 보며, 순간 약연은 구염락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설마 서숭산이 나를 팔아넘긴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래도 아들은 그리 생각지 않을 것이다.

구염락은 마치 약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어머니, 이 새들을 좀 보십시오. 먹이를 찾으려고 일찍 일어났군요. 소자가 어머님을 위해 음식을 준비한 것을 알고 먹이를 얻고자 일찍 나와 있는 듯합니다. 정말 골치 아픈 녀석들이에요.”

“…….”

“가시지요, 어머니. 앞쪽은 산길이 가파르니 소자가 업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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