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49)화 (349/449)

제349화

‘분명 그 정도 인품이 안 되는 아이이거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그리도 뻣뻣하게 굴었으니 고통을 겪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권 노부인은 악한 시어머니가 아니었고, 며느리 역시 명문가 출신이었기에 정도껏 체면은 지켜줘야 했다. 냉대받은 며느리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권 노부인은 즉시 선물을 준비해 며느리에게 보냈다.

백 씨는 너무나 무서웠다. 남편은 가차 없이 그녀의 속마음을 폭로하고, 부인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녀는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남편이 말 한마디로 정곡을 찌르는 특기를 자신에게 사용하다니. 백 씨는 몹시 고통스러웠다.

백 씨는 남편이 자신을 만날 생각조차 없으며, 다시는 자신 같은 여인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 권서함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순간 백 씨는 너무나 감격했다. 그녀는 오는 보름에 입궁하면 반드시 황후마마께 사죄하리라 마음먹었다. 자신이 틀렸음을 분명히 밝히고, 처벌을 청할 작정이었다.

사실 권서함은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어젯밤 그는 자신이 심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마음 때문에 부인의 체면을 무시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 모두에게 잘못이 있었기에 권서함은 기꺼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 * *

새해맞이는 언제나 번거로웠다. 황실에서는 첫날 조정 대신들을 맞이한 뒤 다음날 나라를 위해 복을 빌었다. 그 다음날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다음날에는 종묘에 가야 했다.

구염락은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평소 국무를 처리하는 것보다 더욱 번거로운 일들이 이어지자 그는 어째서 이 세상은 황제에게 마음 편히 휴일 한 번을 주지 않느냐고 남몰래 원망을 늘어놓았다.

구염락을 보던 장서열은 만족을 모른다며 웃었다. 그녀는 어서 종묘로 떠나라며 남편을 발로 차 침대에서 밀어냈다.

이쯤 되자 구염락도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날이 밝기 전부터 일어나 세수를 마친 그는 소리자가 허리띠를 매어 주는 틈을 타 침대에서 나오기 싫어하는 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황아와 함께 국암사에 좀 다녀오는 게 어때? 상아를 위해 평안부平安符도 하나 청할 겸.”

말을 마친 구염락은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장서열을 바라보지 못했다. 장서열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럴게요.”

약연을 모셔와 봉호를 내리지만 않는다면 구염락을 대신해 시어머니를 섬기고 공경하는 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할 수 있었다.

아침 일찍 구염락이 떠난 후, 장서열 역시 아들을 데리고 국암사로 향했다.

아버지를 따라 몇 차례 국빈을 맞이하는 연회를 경험한 덕분인지 이제 구염황도 제법 태자다운 품격을 보이고 있었다. 비록 해가 바뀌며 더욱 통통해졌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은 모습은 매우 단정했다.

“어마마마, 어디 가는 거예요?”

“할머니를 뵈러 가는 거란다.”

장서열은 아이가 약연을 가까이 한대도 말릴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기껏해야 일 년에 몇 차례 볼 뿐인 할머니를 아들이 기억할 수 있을 거라 믿지 않았다.

국암사는 반나절이면 도착할 만큼 황궁에서 가까웠다.

왕 마마는 황후가 왜 황제에게 성모를 모셔오자고 제안하지 않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성모가 들어온다면 황후의 권력이 나뉘기는 하겠지만, 황제의 마음을 차지한 비중으로 보아 분명 성모는 황후의 지위를 흔들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왕 마마가 황후에게 무턱대고 성모를 들이자고 제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황후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 있어 성모가 입궁하는 건 분명 장점보다 변수가 더 많았다. 작은 의문을 참지 못해 큰 계획을 망칠 수는 없었다.

국암사가 위치한 산 뒤의 행관行館(관리들이 외부로 나갈 때 임시로 묶던 거처)은 아침 일찍부터 황후의 의장儀仗을 맞이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하나같이 새로 만든 물품들은 평소 이 행관의 주인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물건들이었다.

약연은 적절히 손질된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위로 올린 채, 통이 넓은 유군에 감청색 배자를 받쳐 입고 있었다. 충만한 산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요정이 산림의 모든 아름다움을 흡수한 양 우아한 자태였다.

약연을 다시 마주한 장서열은 변함없는 그녀의 용모에 놀랐다. 전과 마찬가지로 올림머리에 진부한 옷차림이었지만 그녀에게서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평온함과 너그러움, 그리고 천하를 불쌍히 여기는 자비와 관용이 흐르고 있었다.

성모를 알현할 때, 그 얼굴에서 살아 있는 관세음보살이라는 느낌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장서열은 그녀가 얼마나 독한 여인인지 알고 있었다. 사실 전생에서 장서열과 약연 사이에 대단히 깊은 원한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저 아들을 통제하고 싶은 이와 남편을 통제하고 싶은 여인이 둘 다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이다.

이번 생에서 장서열이 약연에게 태후 자리를 내어 주지 않는 건 ‘아무리 사나운 호랑이라도 제 새끼는 잡아먹지 않는다’는 말이 감히 약연에게 통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약연이 분하고 부끄러운 나머지 자신의 자녀를 해친다면? 구염락에게 다시금 여인을 들이도록 강요하여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장서열은 차라리 이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시어머니를 모실지언정, 굳이 자신의 명성 때문에 약연을 모셔 오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공연히 자신이 나서지만 않는다면 구염락 역시 이를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황후를 손가락질한다 한들 조정 중신들 역시 감히 기녀 출신을 궁에 들이자고 권할 수는 없었다.

장서열이 앞장서서 인사했다.

“어머님을 뵙습니다. 어머니, 그간 평안하셨지요?”

물처럼 부드럽게 장서열을 스쳐 지나간 약연의 시선이 곧 감격한 듯 구염황에게 머물렀다. 하지만 그녀는 감히 손을 내밀어 구염황을 만지지는 못했다. 마치 벅차오르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 하겠다는 듯, 약연은 감정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럼요, 좋지요……. 이렇게 오시니 참으로 좋습니다. 황아가 이렇게 컸군요…….”

약연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녀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장서열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속으로 꾹꾹 눌러 참으며 차마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이토록 쉽게 무너지는 감정에, 이렇게 서러워하는 모습이라니. 약연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진심으로 연민을 일으키고, 마음을 아프게 할 만했다.

만약 마음이 약한 보통의 며느리였다면, 이렇게까지 불쌍한 표정을 짓는 시어머니를 보며 반드시 이 고통 속에서 구해 주겠노라 약속하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했으리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장서열은 보통의 며느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시어머니와 함께 그리움을 표하고, 함께 눈물을 몇 방울 흘리는 것 외에는 약연이 입궁하고픈 마음을 어떻게 암시하든, 손자에 대한 애정과 한 번도 보지 못한 손녀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든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장서열은 약연이 얼마나 무서운 여인인지 이미 겪어 본 사람이었다. 절대로 같은 전철을 다시 밟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약연이 장서열에게 연로한 노인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토로하는 건 그야말로 소 귀에 경 읽기였다.

며느리와 대화를 나누며 약연은 그녀가 전혀 긴장하지 않고 있다는 걸 빠르게 알아차렸다. 며느리는 시종일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자잘한 부탁을 들어주고 심지어는 근처 마을의 길까지 보수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정작 자신의 입궁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약연은 장서열에게서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계집은 누군가 자신의 권세를 나누어 가지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약연은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 장서열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통통한 손자에게 관심을 쏟았고, 아이와 장난을 치며 놀아 주었다. 약연의 얼굴에는 자애로운 미소가 가득했다.

약연의 자애로운 모습이 과연 진실인지 거짓인지, 장서열은 구분할 수도 없었고 구분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든 매년 새해를 맞이하는 날을 제외하고 약연과 만날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시어머니가 위선을 떨고 있는지의 여부는 장서열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왕 마마가 다가왔다. 산길이라 밤이 깊어지면 위험하니 지금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에 장서열은 잠시 약연과의 이별을 아쉬워한 뒤 어떠한 감동도 없이 헤어졌다. 언급할 만한 점이 있다면 약연이 황후 일행을 산 아래까지 배웅한 뒤 도보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국암사가 멀어지자 구염황은 헤어지기 섭섭한 얼굴로 할머니를 불렀다. 아쉬움이 남은 눈은 환궁해서도 한동안 할머니를 잊지 못할 듯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약연은 이 활발하고 귀여운 손자가 아들의 앞에서 감히 제멋대로 굴지 못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 손자의 호감을 사기 위한 절실한 노력이 그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진작에 알았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연이 온 힘을 다해 손자에게 잘해 주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장서열은 아들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철이 든 착한 아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그런데 어마마마… 왜 할머니는 우리와 함께 살지 않는 거예요?”

장서열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할머니는 나이가 많으시기 때문에 공기 좋은 산에서 몸을 보양하셔야 한단다. 보렴, 여기는 우리 황아도 남아서 더 놀고 싶을 만큼 풀이 울창하고 아름답지?”

구염황이 즉시 머리를 끄덕였다. 장서열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황아의 할머님이 여기에 남아계시는 건, 산에는 물도 있고 재미있는 것도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 계셔야만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 사실 수 있기 때문이란다. 만약 할머니가 산을 떠나시면 산신의 보호가 사라지기 때문에 빨리 늙어 버려서 더 이상 황아와 놀아 주실 수가 없어. 설마 황아의 욕심을 위해 할머니의 건강을 해치고 싶은 건 아니겠지?”

고개를 저은 구염황이 진지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황궁은 하나도 재미가 없으니, 할머니는 여기에 남아서 즐겁게 지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앞으로 황아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자주 할머니를 만나러 오면 되니까요.”

장서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착한 아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한편, 별관에 들어온 약연의 얼굴은 분노로 인해 온통 새빨개져 있었다. 그녀는 사소한 트집을 잡아 찻잔을 엎었고, 자리에 앉은 후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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