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8화
한편, 권 노부인은 돌아가는 길 내내 며느리와 말을 섞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며느리는 제 명성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황후에게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집으로 돌아와 한바탕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던 권 노부인은 시원하게 답하는 며느리가 다행히 납득을 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오늘, 며느리가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심한 태도로 자신의 화를 돋울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다.
마차가 멈추었다. 권서함이 가장 먼저 말에서 내렸다. 관복 덕분에 의기양양한 모습이 더욱 돋보였다. 어머니를 위해 마차의 주렴을 걷은 권서함이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며느리 때문에 속으로 울화가 치민 권 노부인은 아들을 보자 화풀이를 하고픈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들을 무시한 채 혼자 내려 버린 그녀가 소매를 뿌리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어머니의 싸늘한 모습에 권서함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뒤따라 내리는 부인을 쳐다보며 소리 없이 어머니가 왜 저러시는지를 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상공의 시선에 백 씨가 즉시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아직 거두지 않은 상공의 손에 수줍게 손을 걸친 채 마차에서 내렸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상공의 자상함에 백 씨는 기분이 좋아져 어쩔 줄을 몰랐다.
때마침 고개를 돌리다 이 장면을 본 권 노부인은 화가 나서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설마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체 권씨 가문이 무슨 대죄를 지었기에 이다지도 예의범절이 지극한 며느리가 들어왔단 말인가!
권 노부인은 누구도 기다리지 않고 두말없이 대문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권 노야와 권서함은 모두 문 밖에 갇힌 형국이 되었다. 빠르게 물러섰기에 망정이지 권병준은 하마터면 대문에 코를 부딪힐 뻔했다.
권병준은 화를 내고 싶었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날인 만큼 부인처럼 행동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는 말없이 다시 문을 밀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어느 새 부인에게서 손을 거둔 권서함이 백 씨를 바라보며 직접 물었다.
“어머니께서 무슨 일이 있으셨소? 기분이 언짢으신 것 같은데.”
즉시 눈웃음을 친 백 씨가 자못 정의로운 기세로 함축적인 대답을 들려주었다.
“상공은 모르시지요. 어머니께서는 황후마마의 환심을 사지 못한 소첩 때문에 기분이 상하신 것입니다.”
말을 마친 백 씨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부군을 바라보았다. 눈물 고인 눈에는 아집이 담겨 있었다.
“소첩은 어려서부터 권세에 빌붙어 아부하지 말아야 한다, 원칙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덕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어머니께서 제게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예의범절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황후의 비위를 맞추어 환심을 사라 하신다면, 소첩은 차마 할 수 없습니다.”
백 씨는 억울한 얼굴로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마치 황후의 환심을 사라는 게 세상에서 가장 모욕적인 말이라는 태도였다.
마침 아들이 마음에 걸려 되돌아온 권 노부인은 정의구현에 앞장 선 백구아의 말을 듣고 화가 나서 피를 토할 지경이 되었다.
즉시 몸을 돌려 자리를 피하던 권 노부인은 뒤따라오던 남편을 마주쳤다. 드디어 마음 속 가득한 분노를 분출할 대상을 찾은 권 노부인이 멈추지 않고 걸으며 화를 냈다.
“좀 들어 보십시오! 세상에 얼마나 고결하고 대단한 며느님이신지, 아주 열녀문이라도 세워 줘야 할 지경입니다!”
권병준 역시 머리가 아팠지만 아녀자의 일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됐소. 아직 어려서 뭘 잘 모르는 것이겠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오. 어쩌면 태후마마와 여아를 생각해 황후를 가까이 대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지 않소. 너무 화내지 마시오.”
하지만 권 노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진정 태후와 여아를 생각한 것이라면 자신이 눈치채지 못 했을 리 없었고, 이렇게 크게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
“저 아이는 제 스스로도 뭔지 모르는 그 대단한 고결성을 위해 저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황후를 비방하니 고귀한 자신은 황후와 어울릴 생각도 없고, 심지어 자신이 한 수 위라고 생각하는 게지요. 기가 찹니다!”
한숨을 쉰 권병준은 부인에게 조급하게 굴지 말고 기다려 보자고 손짓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쩌겠는가. 게다가 며느리는 부인이 지적한 단점 외에는 딱히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됐소. 앞으로 궁에 데려가지 않으면 될 일이오.”
“무슨 수로요!”
권 노부인은 더욱 불쾌해졌다.
“당신이 오늘 저 아이가 하는 꼴을 못 보아서 그럽니다! 모든 가문이 다 모인 자리에서 오랜 벗들이 저를 보는 눈빛이, 정말 하나같이, 마치 우리 가문이 집안을 말아먹을 며느리를 들였다 말하는……!”
말을 하던 권 노부인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불길한 말을 감히 입에 올릴 수 없다는 생각에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 저 아이는 절대 누군가의 모범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 아닌데도 자신의 행동이 남편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내일 날이 밝자마자 서함이에게 첩실에 평처平妻까지 얻어줄 것입니다. 저 아이가 과연 여인의 모범이 되어 상공을 위해 첩을 들이는 데 앞장설지 어디 두고 보지요!”
권병준은 굳이 부인에게 따지고 들고 싶지 않았다.
“점점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려. 혼인한 지 아직 일 년도 되지 않은 며느리를 두고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지도 않소?”
골치 아픈 소리가 듣기 싫다는 듯 권병준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권 노부인은 마치 자신이 얼마나 빠른지를 보여 주겠다는 듯 곧장 남편을 쫓아갔다.
“대관절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까!”
한편, 권서함은 아직 대문 밖에 있었다. 부인의 말을 들은 그는 잠시 멍해졌으나 곧 마치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방대한 언어들이 한데 섞이면 이토록 터무니없는 말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부인을 바라보는 권서함의 표정은 한결 같았다. 웃음 띤 얼굴에 맑은 바람 같은 기질은 평생토록 기분 나쁜 얼굴을 할 것 같지가 않았다.
“부인. 과연 부인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부인은 옳고 그름이 분명한 데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귀족들 중 부인처럼 상황만 보고 신분은 고려하지 않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백 씨는 수줍어했다.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사내에게 인정받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 했기에 기분이 좋은 것도 당연했다.
권서함은 줄곧 백구아가 꿈꾸어 오던 상대였다. 그와 혼인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크나큰 복이었기에 그녀는 그가 자신의 언행을 칭찬해 줄 거라는 기대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남편의 이 한마디는 백 씨로 하여금 시어머니의 분노와 잔소리에 맞서고, 다른 사람의 눈빛에 대항할 만한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권서함은 부인의 손을 끌고 집으로 들어가며 담담하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황후마마가 이기적으로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모든 게 폐하의 뜻이라는 건 전혀 모르고 있소. 다른 여인들을 거들떠보지 않고, 황후를 제외한 모든 여인들을 다 짐승 취급하는 건 전적으로 황제 폐하의 뜻이오. 당당한 천자에게 짐승과 어울리라 강요하는 건 폐하의 존재를 더럽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
권서함이 매우 난처하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폐하께서는 여색을 질색할 뿐만 아니라 예법도 존중하지 않는 분이시오. 황후마마를 어찌 얻었는지는 차치하고, 태후마마를 박대하는 것만 보아도 불효자라는 멍에를 피하기 어렵지. 황제의 권위를 위해 전쟁을 벌여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것 또한 대죄요.”
어떤 슬픈 추억에 빠지는 듯하던 권서함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부인과 이런 이야기를 해서 무얼 하겠소. 허나 불의에 저항하는 대쪽 같은 성품으로 보아, 부인은 필시 때가 오면 우리 주국을 위해 황제를 끌어내린 뒤 스스로 태평성세를 이룰 인재가 틀림없소. 나 권서함은 실로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부인의 강단과 의리에 미치지 못하니, 부끄럽기 그지없구려.”
돌연 걸음을 멈춘 백 씨가 그 자리에 섰다. 눈물이 고인 눈은 비통했다.
“상공께서는…….”
백 씨의 득의양양한 얼굴이 일순간 굉장히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얼굴로 변했다. 그녀는 남편의 비아냥에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권서함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했다. 쉬이 볼 수 없는 새해의 달빛을 바라보며, 그가 환한 얼굴을 들었다.
“억울하오? 허나 어머니를 생각해 보시오. 어머니는 권 비와 태후라는 엄청난 짐을 견디며 황후에게 고개를 숙이고 계시오. 이는 오로지 나와 아버님이 평온하고 순탄한 관직 생활을 이어 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지. 비록 오늘 부인께서 황후에게 거리를 두는 바람에 이제껏 어머니께서 치욕을 참아 가며 품었던 시간이 훼손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쇠한 어머니께서는 또 기꺼이 고개를 숙이실 것이오. 그리고…….”
권서함이 백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가 맞서는 상대는 황후가 아니라 황제라는 걸 알아야 하오. 그래도 부인의 눈에 황후가 그리 우습게 보인다면, 어디 마음대로 괴롭혀 보시오. 어쨌든 명성 때문에라도 황후께서 그대를 어찌하지는 못 할 거 아니겠소?
혹시라도 부인이 생각한 바가 이러한 것이라면, 그대의 부군으로서 나는 고작 일시적인 통쾌함을 위해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은 참으로 부적절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구려. 또한 나는 부인께서 부디 용상에 앉지 않기를 바라는 바요. 나라를 세운 황제의 남편이 되는 일이라니, 실로 감당하지 못 하겠소.”
말을 마친 권서함은 발길이 가는 대로 떠나 버렸다. 그 자리에 남겨진 백 씨는 남편의 말에 큰 상처를 입고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권서함에게 백구아를 진심으로 대할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부인을 맞이할 당시, 그는 한 여인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니 백 씨가 이토록 고집불통이라면 황후에게 미움을 사지 않도록 어떻게든 나서서 부인을 깨우쳐 주는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황제에게 덜미가 잡힌다면 결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날, 권 노부인은 아들이 며느리를 훈계했고, 그로 인해 며느리가 밖에서 밤새 무릎을 꿇은 채 잘못을 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늘 아침 권 노부인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러 왔을 때에도 며느리는 여전히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늦잠을 자는 바람에 권 노부인은 며느리를 만나지 못 했다.
권 노부인은 갑자기 기분이 상쾌해지는 걸 느꼈다. 올해 춘절은 유난히 떠들썩했다. 이제 며느리가 세상에서 저 하나만 깨끗하다는 표정으로 또 주변 사람들을 업신여기는지 두고 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