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7화
서 소의에게 경옥전을 내어 준 것은 장서열이 왕 마마의 제안을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왕 마마의 한마디는 때가 되었다는 신호이자 황후가 온화한 태도를 드러낼 기회이기도 했다. 황제가 서 소의의 품계를 네 품계나 높여 주었는데 실질적인 권력을 움켜 쥔 황후가 전각 한 채를 내어 주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무리 아름다운 전각이라도 주인을 위해 쓰이지 못하면 모두 헛된 것이었다.
장서열은 모든 여인들이 바라 마지않는 경옥전을 대범하게 내주었다.
이어지는 성지는 대동소이했다. 하지만 서 소의만큼 품계가 높이 올라간 이는 없었고, 낭독하는 혜령의 열정도 처음처럼 뜨겁지는 못 했다.
성지가 내려진 후, 내명부는 순식간에 뒤집혔다.
모두들 운이 좋은 서 소의를 부러워했지만, 뒤에서는 황후의 비위를 맞추는 소인배일 뿐 실제로 황제의 마음에 든 것도 아니라며 은근히 그녀를 깔보았다.
‘왜 이렇게 좋은 기회가 어느 것 하나 뛰어나지 않은 그 계집에게 간 거지?’
이러한 생각에 분에 못 이겨 주먹을 불끈 쥐는 이가 적지 않았다. 누군가는 씁쓸한 마음에 얼굴이 그리 박색이니 황후가 발탁할 만하다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속으로 어떤 생각을 품고 있든 후궁이라면 누구나 이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갑자기 내명부의 이인자가 된 서 소의 앞에서 공손하게 예를 갖추어야 했다. 또한 이번 일로 인해 웃전의 입맛에 맞게 줄이 세워진 뒤에는 특히 찍소리도 낼 수 없었다.
서 소의 역시 바보가 아니었다. 황제의 매몰찬 수법을 직접 경험한 뒤, 그녀는 원대한 꿈과 포부를 모두 버릴 만큼 영리했다. 황제는 ‘반은 군주요, 반은 호랑이다’라는 풍문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웃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끌어 내는 황후보다 모시기 어려운 존재였다.
현재 서 소의는 황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었으며, 짜증이 나면 화풀이를 할 아랫사람도 있었고, 그녀를 위해 사태를 수습해 줄 자매들도 있었다. 그녀는 황후마마를 정성껏 모시기만 하면 된다는 걸 알았다. 비록 높은 권세와 지위를 손에 넣지 못한다 해도 구태여 다른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짓밟도록 내놓을 필요는 없었다.
서 소의는 주제를 아는 사람이었다. 성지를 받는 그 순간에도 그녀는 황제가 아닌, 황후의 은혜에 감사했다.
장서열도 인색함 없이 좋은 물건들을 적지 않게 하사했다.
서 소의는 황후의 재력까지 실감하게 되었다. 그녀가 하사한 장신구들 역시 세간에서는 구하기 힘든 보물로, 모두 세상에서 유일한 것들이었다.
서 소의는 황후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황실에서 더 이상 희망을 걸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황후가 명실상부한 황족으로서 그 위엄을 두루 갖춘 인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후궁들이 동요하자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조정 중신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드디어 황제가 생각을 바꿨다고만 생각했다. 대주국의 후궁들이 마침내 정상 궤도에 들어서는 모양이었다.
장서열은 더욱 바빠졌다. 그녀는 때때로 수려한 해서체로 쓴 후궁들의 글씨, 혹은 정성껏 수를 놓은 손수건을 받기도 했다. 다들 수줍고도 주눅이 든 듯, 차마 하고픈 말을 하지 못 한 채 황후에게 경치를 보러 가자, 담소를 나누자, 금을 타자, 혹은 활을 쏘자고도 청했다.
하지만 후궁들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날 때를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그저 청하기만 할 뿐, 절대 먼저 조로전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또한 황후의 눈치를 보며 절대 문제를 일으키려 들지 않았는데, 이렇게 눈치 빠르게 행동해야만 상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또 총명한 이들은 아마도 왕 마마가 황제로부터 진작에 창고 열쇠를 받았을 거라 짐작했다. 후궁들은 언행에 따라 왕 마마로부터 상을 받곤 했는데, 잘못을 저지르면 상은커녕 벌을 받았다.
‘황후의 기쁨’이 기준이 된 상벌 제도 아래서, 후궁에는 빠르게 암묵적인 규칙을 만들어 냈다. 이들은 누군가를 만나면 즉시 무릎을 꿇는 걸 개의치 않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별것도 아닌 일에 허리를 굽혀야 했다.
연말연시에 부모님을 만날 기회를 얻은 이가 서 소의라는 게 알려지자 본래 냉철하여 시류에 휩쓸리지 않던 후궁들조차 더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은 황후의 취미가 무엇인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중 어떤 이가 황후가 기마와 궁술을 좋아한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황후는 정말로 말을 타러 나왔다. 황후의 궁술 실력은 여전히 노련했고, 말 위에 오른 자태는 여느 사내들 못지않았다. 겉으로 아첨하는 척 속으로 끝까지 불복하던 후궁들은 이날 내심 황후를 업신여기던 유일한 소일거리마저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 * *
후궁들이 황후의 호감을 사느라 연신 바쁜 나날을 보내는 동안 소리 없이 춘절이 다가왔다. 집집마다 등을 달고 오색 천을 두르며 거국적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백성들은 노래하고 춤을 췄으며, 궁에서는 하루 종일 큰 연회를 벌였다.
그날 이른 아침, 구염황은 단정하게 갖춰 입고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경사에 입는 붉은색 옷으로 갈아입은 구염상 역시 마마에게 안긴 채 황후를 따라 향을 올리고, 조상들에게 절을 했다. 이어 공주 역시 조로전으로 축하 인사를 하러 온 부인들을 접견했다.
정품 궁장宮裝(궁정 여인들의 일상 예복)을 차려입은 장서열은 머리에 태양을 향한 아홉 마리 봉황 장식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었다. 머리 위를 채운 순금 장식과 두껍고 무거운 봉포鳳袍가 보여 주는 그 위엄과 기품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장서전의 아내 주사섬은 만삭이었기에 장서열은 올케의 알현을 면해 주었다. 전각 안에서 황후를 기다리던 여인들은 하해와 같은 사랑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일국의 어머니를 알현했다.
장서열은 상서로운 말을 전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선물을 하사했다. 그리고는 함께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장서열은 굳이 지정할 필요 없이 늘 하던 것처럼 자신의 왼쪽에 앉아 있는 권 노부인과 권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관례에 따라 권씨 가문의 종부宗婦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친절하고 사근사근한 권 노부인은 대화에 충실히 임하며 황후의 말에 적재적소의 대답을 했다.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여인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으로, 황후가 며느리에게도 관심을 보일 수 있도록 권 노부인은 연령대에 맞지 않는 우스갯소리까지 참아 가며 화제를 며느리에게로 돌렸다.
장서열은 나이 든 어른의 체면을 세워 주고자 일면식이 있는 권서함의 부인을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녀는 소소한 일상을 질문하며 자신이 사가에 있을 때 보고 들은 것을 얘기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장서열은 곧 속이 갑갑해지는 걸 느꼈다. 특히나 최근 아랫사람들이 치켜세워 주는 데 익숙해진 데다 딱히 난처한 일도 없었는데, 난데 없이 비위를 맞춰야 하는 상대를 만나자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장서열이 다섯 마디를 하면 권 부인은 그제야 쌀쌀맞게 한 마디를 대꾸했다.
장서열은 즉시 권 부인을 포기했다. 그나마 창피를 주지 않도록 장신구 몇 개를 상으로 하사한 그녀는 바로 말재간이 좋은 부인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대화를 나눴다.
장서열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부인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긴장해서 감히 말을 붙이지 못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도 분간하지 못 할 그녀가 아니었다.
그러나 권씨 가문의 백 씨는 달랐다. 그녀는 확실히 마치 뭐라도 묻을까 두려워하는 고결한 존재라도 된 듯 자신과 대화하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된 이상 장서열 역시 굳이 긴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서열은 흐트러짐 없이 권 부인에게 상을 내렸다. 이는 전부 권 노야와 권서함의 체면을 봐서 해 준 행동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예 백 씨를 무시했을 것이다.
장서열은 다른 사람들과 무리 없이 대화를 나눈 후, 천천히 충왕비와 조 부인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련한 권 노부인이 황후의 안색이 변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 했을 리 없었다. 그녀는 며느리가 황후에게 냉대를 받고도 태연히 손에 든 차를 음미하는 모습을 보았다. 고결한 자태에 단정한 행동거지였다.
순간 권 노부인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린 나이에 어디서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을 배웠단 말인가. 이토록 우매하다니!
물론 며느리는 나라에서 명문 중 명문으로 지지를 받는 백씨 가문 출신이었다. 하지만 황후가 누구인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아무리 황후가 독단적으로 총애를 독차지하고, 황실의 기강을 어지럽힌 것처럼 보인다 해도 이는 대단한 백씨 가문과 하등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황궁 안에서 황후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제 성질을 그대로 드러내다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행동이란 말인가!
권 노부인은 당장 며느리를 끌어내지 못 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심지어 그녀는 주위에서 쏟아지는 곱지 않은 눈초리를 보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며느리는 세상에서 자기 하나만 고결할 뿐, 다른 이들은 모두 권력에 빌붙어 아부하는 바보이자 아첨에 능한 소인배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권 노부인은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어쩌다 이런 애물단지 같은 아가씨에게 아들을 내주었단 말인가. 그나마 말이라도 잘 듣는 며느리일 거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정말로 말을 잘 ‘듣기만’ 하는 며느리였다. 권 노부인은 백 씨를 선택한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
대전에 든 이들은 모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연장자들과 이야기를 마친 황후는 곧장 당 부인과 섭 부인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가 보아도 권 부인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헌원가는 말재간이 좋을 뿐만 아니라 황후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녀는 애교 섞인 말로 농담 속에 진담을 섞어 말단 관직이라도 좋으니 부디 아우를 위해 황제에게 힘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시달리던 장서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끝내 농담을 섞어 대충 한 마디 대꾸했다. 이를 본 여인들의 마음에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 어쩌면 헌원씨 가문에 재기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공에게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알현은 밤까지 이어졌다. 연회의 마지막은 신하와 부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웃고 떠드는 자리였다. 모든 일과는 해시亥時가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해가 뜨기 전 시작하여 하늘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끝난 새해 연회는 가뿐하다 느끼는 사람 없이 모두가 피곤함을 느꼈다.
거의 뜯어내듯 무거운 봉채를 떼어 낸 장서열은 탑 위에 쓰러진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농교와 완정은 그런 주인을 조금씩 부축하며 평상복으로 갈아 입혔다. 장서열은 그제야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