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6화
황후의 존재로 인해 약간 어색해하던 후궁들은 곧 날아드는 눈덩이와 함께 서서히 승부욕에 불타기 시작했다. 어화원에는 금세 웃음꽃이 피어났다.
지켜보던 구염황 역시 즐거워했다. 아이는 이쪽저쪽으로 눈망울을 굴리며 퉁퉁한 다리에 힘을 주었다. 후궁들과 놀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놀란 대마마가 식은땀을 흘렸다. 태자를 위해 재빨리 작은 눈덩이를 손에 쥐여 준 그녀는 태자가 조금 전 무의식적으로 뛰어나가려 했던 행동을 잊길 기도했다.
그러나 장서열은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마주하던 그녀가 말했다.
“태자에게 겉옷을 걸쳐 주고, 가서 놀게 해 주어라.”
대마마는 깜짝 놀랐으나 곧 태자를 보내주었다.
구염황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퉁퉁한 다리를 내딛으며 무기를 손에 쥔 그가 미인들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첫 번째 목표에 다가가기도 전, 아이는 퍽 소리를 내며 땅 위로 거꾸러졌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아들에게 달려가려던 장서열은 아이가 환한 미소와 함께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보자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초록색 옷을 입은 여인을 향해 계속해 휘청거리며 다가갔다.
황후가 웃자 모두가 자연스레 따라 웃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좋아졌다. 태자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아이는 던져도 아프지 않을 만한 작은 눈덩이를 들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여인을 향해 던졌다. 태자의 목표물이 된 여인은 짐짓 억울한 척 가볍게 반격했다.
후궁들은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사고가 단순한 구염황을 웃게 해 주었다. 입을 헤 벌린 아이의 통통한 얼굴은 싱글벙글 웃기에 바빠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마마의 손에서 힘차게 무기를 받아 든 아이는 동서남북이 어딘지도 모른 채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상황 판단이 빠른 후궁들은 자연스럽게 태자와 한데 어우러져 아이가 즐거워하게끔 놀아 주었다. 여인들은 포동포동한 태자가 제법 심각한 얼굴로 웃는 걸 보며 가끔씩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리를 잡고 웃는 여인들은 태자의 체면은 조금도 세워 주지 않았다.
장서열도 따라 웃었다. 줄곧 외출을 하지 못하던 아들은 이제야 겨우 거리낌 없이 눈밭을 구를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위해 장서열은 꼬박 이 년이라는 시간을 바쳤다. 그동안 그녀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줄곧 아이를 옆에 데리고 있었다.
다행히 구염황은 잘 자라 주었고, 지금은 상아처럼 통통하게 살도 올라 있었다. 이제 봄이 오면 아이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스스로의 삶을 시작해야했다. 그런 황아를 보면서 장서열은 그저 마음 편히, 세월이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황후가 화를 내지 않자 후궁들은 더욱 대담하게 태자와 장난을 쳤다. 이들은 통통한 구염황의 다리가 눈밭에 빠지는 걸 보며 있는 힘껏 쫓아가면서도 최선을 다해 태자의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오후 내 즐겁게 논 구염황은 떠날 때가 되자 아쉬워하며 ‘누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감동한 후궁들은 몸을 숙여 예를 갖추어 배웅해 주었다. 이들은 태자 전하의 깊은 친분을 감히 받들 수 없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은 구염황이 발그레한 얼굴을 들고 물었다.
“어마마마, 황아가 앞으로도 누님들과 자주 놀 수 있어요?”
언제나 막힘없이 답을 해 주던 장서열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일국의 태자가 부황의 비빈들과 놀 수 있냐고 묻다니, 무슨 이유에서든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모호한 항렬은 차치하더라도, 사내아이가 줄곧 여인이나 아이와 어울리는 건 구염락을 화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장서열이 대답했다.
“황아, 누이들은 다른 일이 많아 바쁘기 때문에 항상 황아와 놀아 줄 수는 없단다. 하지만 태감들은 언제나 황아 옆에 함께 있으니, 돌아가면 황아가 좋아하는 태감들과 놀 수 있도록 장소를 마련해 주마. 어떻니?”
구염황이 바로 대답했다.
“좋아요. 황아는 명 공공이 필요해요.”
아이가 무심코 내뱉은 이름에 장서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즉시 여느 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명 공공은 몸이 아파 황아와 놀아줄 수가 없단다. 다 나으면 그때 황아와 놀면 어떨까?”
놀 수 있다는 말에 줄곧 웃고 있던 아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약간 사라졌다. 또 그 이유였다. 매번 명 공공을 찾을 때마다 어머니와 주변의 마마들은 모두 그가 아프다고만 했다.
‘명 공공은 앞으로 다시는 나와 놀아 줄 수 없는 걸까?’
실망하는 아들의 모습에 장서열의 눈에 옅은 슬픔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구염락이 난처하게 하진 않았을까?’
장서열은 한숨을 쉬었다. 구염락의 성격이라면 그를 가만히 두지 않고도 남았다.
“왕 마마.”
“예, 마마”
“명 공공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좀 알아보거라.”
“예, 마마.”
그러자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진 구염황이 몸을 돌려 어머니의 다리를 끌어안고 몸을 비비적거렸다. 그는 어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어머니는 분명 명 공공을 만나게 해 줄 것이다.
막 조로전으로 돌아온 장서열이 아직 몸에 걸친 겉옷도 채 벗지 않았을 때였다. 혜령이 황제의 성지聖旨를 들고 왔다.
“황후마마, 폐하께서 성지를 보내셨습니다. 내용은 모두 작성하였으니 황후마마께서는 봉인鳳印만 사용하시면 된다 하셨습니다.”
혜령은 황후가 편히 볼 수 있도록 공손하게 성지를 바쳤다.
장서열이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성지를 받아 들었다. 자신이 봉인을 찍어야 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성지에는 한 무더기의 이름과 그들의 품계를 모두 승급시킨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서 재인은 가장 높은 품계를 받아 무려 3품 소의에 올랐다. 이는 모든 귀인과 재인들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장서열은 한참을 생각해도 서 재인이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성지에 쓰여 있는 대부분의 이름이 익숙하지 않았다.
‘갑자기 대여섯 명이나 되는 후궁들의 품계를 올린다고? 구염락이 드디어 후궁을 살뜰히 보살피기 시작한 걸까?’
꿈도 꾸지 마시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황후를 보며 앞으로 다가가 성지를 훑어본 왕 마마가 오히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공손하게 말했다.
“황후마마, 이들은 황후마마께서 다 아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조금 전까지 함께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태자 전하와 함께 놀았던 후궁들이지요. 그중 서 재인은 황후마마를 위해 가장 먼저 눈싸움을 시작한 후궁입니다.”
왕 마마는 어쩔 수 없이 한 마디를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황후마마, 폐하께서는 지금 후궁들이 황후마마와 태자 전하를 즐겁게 해 드린 것을 치하하고 또 장려하시는 것입니다.”
왕 마마는 이 감격스럽고도 황당한 상황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폐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보통 사람은 실로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황제는 정말로 후궁들을 그저 황후를 즐겁게 해 줄 존재로 키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후궁들에게 기대를 버리게 하는 것도 방법이었다. 황제는 워낙 다른 이의 의견을 듣지 않는 무뚝뚝한 성격인 데다, 후궁들도 멍청하게 죽음을 자초하는 이들은 아니니 목숨을 부지하며 그럭저럭 괜찮은 날들을 보낼 수 있다면 굳이 황제의 사랑에 목을 맬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얼음장 같은 황제를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은 이 세상에 황후 이외에 몇 명 있지도 않을 터였다.
‘그래서 이렇게 바로 픔계를 높인다고?’
장서열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참지 못하고 고개를 저으며 실소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자기도 모르게 약간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본궁의 봉인을 가져와라.”
“예, 마마.”
왕 마마가 곧장 입을 열었다.
“마마, 노비의 생각에 폐하의 혜안이 참으로 지당한 듯합니다. 궁에서 품계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내명부가 오랫동안 잠잠했던 탓에 시기적으로 경솔한 마음이 들기 쉬운 때입니다. 이럴 때 폐하께서 마침 후궁들을 위해 밝은 길을 찾아 주신 것이지요. 어쨌든 삶에는 끊임없이 정진해야 할 목표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서열은 웃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이 자리는 그 누구도 흔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 뒤, 여러 공공과 궁녀들을 이끈 혜령이 후궁들의 처소에 나타났다. 그는 조금 전 나온 새로운 품계를 공표했다. 첫 번째로 명을 받든 건 소의昭儀로 봉해진 서 재인이었다. 무려 4품계나 훌쩍 오른 그녀는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벼락같은 출셋길에 올랐다. 그녀는 내명부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위에 오른 여인이 되었다.
혜령이 성지를 상세하게 읽어 내려가는 동안 서 소의는 침착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혜령은 똑똑하고 부드러운 발음으로 서 소의의 언행을 대대적으로 칭찬한 뒤, 그녀가 태자를 즐겁게 하고 황후를 활짝 웃게 함으로써 황제와 함께 걱정을 나눈 것을 특별히 치하했다. 이것이 그녀가 소의라는 지위를 얻게 된 이유였다.
한참을 멍하니 무릎을 꿇고 있던 서 소의는 정신을 차린 뒤 미친 듯이 기뻐하며 성지를 받았다. 품계가 올랐는데 더 이상 무서울 일이 뭐가 있겠는가. 정말로 무서운 건 이러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전까지 서 소의는 어느 것 하나 두드러지지 않는 일개 재인이었다. 가문도, 외모도 특출할 게 없었을 뿐더러 반년 전에는 같은 후궁에서 이용당하기도 했을 만큼 머리도 좋지 않았다. 이런 그녀가 첫 번째로 품계가 오르는 영광을 맞았다.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천첩, 황후마마의 은혜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혜령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지금처럼 분발하면 더욱 밝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암시하는 것이었다.
“또한 황후마마께서는 오랫동안 비어 있던 경옥전 편전을 서 소의에게 하사하신다는 특명을 내리셨습니다. 다만 성지가 다급히 전달되어 편전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으니, 며칠만 기다려 주시면 소의께서 곧 들어가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서 소의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경옥전이라니! 그곳은 조로전 다음가는 총애를 상징하는 전각으로, 영광 그 자체였다.
비록 지금은 경옥전 자체가 유명무실한 상황이긴 했지만, 후궁들 중 이토록 큰 은혜를 얻은 사람은 없었다. 서 소의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