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5화
소리자를 비롯한 하인들이 다시 돌아와 황제의 시중을 들었다.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쓰는 모습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들은 혹시나 일이 잘못될 경우 황제가 꼬투리를 잡아 이들이 지닌 비밀을 진정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까 두려움에 떨었다.
구염락은 답답함을 느꼈다. 같은 상소문을 수차례 읽으며 그는 서풍엽의 말을 곱씹었다.
‘서풍엽은 대체 어떻게 안 거지? 그 외에 또 누가 알고 있는 걸까? 누가 중간에서 방해를 한 건가?’
“여봐라! 현천기를 들라 하라!”
현천기가 빠르게 도착했다. 털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짙은 남색의 금포에는 드문드문 눈이 떨어져 있었다. 흐릿한 냉기를 발산하는 꾸밈없는 이목구비 아래로 희한하게 비틀린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소신, 폐하를 뵈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현천기의 옷을 본 구염락의 입꼬리가 비웃듯 올라갔다. 대장부가 털로 옷을 장식하다니. 현천기는 사람들이 그가 태감으로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추측하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최근 몇 년간 백국에서 서풍엽과 접촉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거라.”
“예, 폐하.”
현천기는 올 때보다 더욱 빠르게 물러갔다.
구염락이 창문을 열었다. 끝없이 새하얀 바깥 풍경 위로 솔솔 눈꽃이 내리고 있었다. 구염락은 문득 눈이 쌓인 소나무 아래, 은백색 모피를 두른 소녀가 흥미 없는 얼굴로 작은 두 손에 하나씩 눈덩이를 쥔 모습을 본 듯했다. 눈덩이는 부드럽기도, 단단하기도 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녀는 그저 눈덩이를 쥐고 있을 뿐, 왁자지껄 소란을 피우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들 역시 약속이나 한 듯 소녀를 피하며 어울려 놀지 않았다.
‘괴팍했었던가…….’
구염락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장서열은 확실히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납고 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눈앞에서는 어떤 행동을 하든 다 비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따라서 배독이 되어 장서열의 시중을 들기 시작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고 행동에도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혹시라도 자신을 성가시다고 느낀 누님이 그를 등진 채, 그에게 유일했던 기회조차 빼앗아 갈까 두려웠다.
구염락의 시선이 먼 하늘을 향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서열이가 알고 있을까?’
그럴 리 없다. 최소한 자신이 궁에 있는 한 불가능했다. 감히 누가 황제가 걸러 내지 않은 말을 황후의 귀에 들어가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문득 구염락은 장서열이 보고 싶어졌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자애로운 미소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만약 자신을 위해 따뜻한 차를 데워 주거나 말을 걸어 주는 그녀를 본다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구염락은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장서열은 정오나 저녁이 아닌 때 불쑥 나타난 그에게 의문을 품었다. 장난을 치던 딸아이의 손을 놓은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대군이 국경까지 쳐들어왔나요, 아니면 다른 강적이라도 침입했나요? 당신이 어찌 이리…….”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간 구염락이 장서열을 끌어안았다. 태자 곁을 지키던 대마마는 안부 인사를 올리려는 태자를 아주 민첩한 속도로 제지한 뒤, 아이를 데리고 빠르게 사라졌다.
왕 마마 역시 즉시 하인들을 이끌고 물러갔다. 오랜 세월 이미 습관이 된 조용한 걸음으로 자리를 옮기며, 그녀는 여유롭게 이 상황을 분석했다.
‘폐하께서 또 무슨 일이 있으셨구나.’
장서열을 끌어안은 구염락은 자신을 원망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이기적인 마음을 앞세운 그는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곁에 있었다. 이제 와 그런 쓸데없는 것들을 묻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구염락을 안은 장서열이 그의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미소를 올렸다.
“왜 그래요. 정말 누가 괴롭히기라도 한 거예요? 세자의 일이 순조롭지 않아서 화가 났군요.”
순간 구염락이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질투심이 치밀어 올랐다. 역시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이라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이거지.
장서열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구염락이 더 해괴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얼른 정신을 차리게 해 주었다.
“요즘 계속 서풍엽의 일로 바빴잖아요. 그를 위해 혼기가 찬 여인을 찾아 줄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오늘은 특히 찬바람이 부니까요. 조정 대신들이야 당연히 당신의 기분을 건드릴 리가 없고, 다른 가능성이라면 당신 스스로 기분이 나빠진 건데, 지금 당신의 분부를 따르지 않아 끝내 화를 돋울 사람이 세자 말고 누가 또 있겠어요?”
말을 마친 장서열이 봄처럼 해사한 얼굴로 더는 도망갈 곳이 없는 부군을 바라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뜨린 구염락이 돌연 그녀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정말 그 녀석 때문에 기분 나빠 죽겠어. 또 내 명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짐이 틀렸다는 듯 한바탕 일장연설을 늘어놓더군.”
구염락이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처리할 업무가 그리 많은데도 그를 위해 일부러 시간을 쪼개어 혼처를 물색했어. 그게 황은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 것 같더군. 감사히 여길 줄 모른다면 됐어! 평생 혼자 살다가 늙어 죽으라고 하지. 장례조차 치러줄 사람이 없는 꼴을 보는 날에 이 빚을 다 갚게 될 테니까.”
순간 장서열이 묘한 눈으로 웃었다. 이건 필시 덫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타협한 것이리라. 그게 아니라면 당장 서풍엽을 혼인시키고도 남을 만큼 열정을 쏟던 그가 갑자기 입장을 바꿨을 리 없었다.
대체 서풍엽이 무슨 말로 이렇게 까다로운 사람을 떨떠름하게 포기 시켰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 그가 더 이상 한가하게 신하의 혼사에 몰두하며 서투른 연기를 보여 주지는 않을 테니까.
“식사하고 가실 건가요?”
갑자기 뛰쳐나온 탓에 구염락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여전히 산더미 같은 상소문이 쌓여 있었다.
“저녁에 다시 올게.”
“그럼 옷을 더 걸치세요. 밖에 눈이 많이 내려요.”
* * *
연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연못과 호수에 쌓인 눈은 세상을 끝없이 하얗게 만들어 주었다. 황궁의 땅은 발자국 하나 없이 놀라울 정도로 깨끗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권세를 좇게 만드는 황권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주인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만 남겨 쓸데없는 고민은 하지 않게 하는 것.
황후는 일찍이 두 마마에게 춘절 전후 연말연시 준비를 지시한 상태였다. 문제가 생겼을 때만 신경을 쓰면 그만이었다. 본래 후궁은 연말연시 물품 쟁탈전을 벌이느라 가장 떠들썩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너무나 조용하고 단조로워 장서열은 가끔 자신이 정녕 구염락과 혼인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구염황의 손을 잡은 장서열은 그들을 둘러싼 하인들과 함께 호숫가를 걸으며 온통 하얗게 변한 정원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일행들 중 가장 흥분한 구염황은 어머니의 손을 잡은 채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통통하고 작은 몸은 꾀꼬리처럼 활발하고 재빨랐다.
장서열은 구염황의 손을 놓지 않으며 계속해 천천히 가라고 일러 주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정성껏 빗어 넘긴 머리카락에는 미동도 없었다.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사라졌던 농교가 빠르게 다시 돌아왔다.
“황후마마, 여러 후궁들이 어화원 공터에 모여 눈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순간 작은 머리를 든 구염황이 호기심을 보였다.
“눈싸움이 뭐예요?”
궁금해하는 아들을 보자 장서열도 덩달아 흥이 일었다.
“한번 가 볼까? 어미가 눈싸움이 무엇인지 보여 주마.”
농교와 완정은 서로를 한번 쳐다본 뒤 다시 뒤에 선 왕 마마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이미 걸음을 옮겨 쫓아가는 왕 마마를 보며 급히 뒤를 따랐다.
어화원은 아직 시든 꽃들이 떨어져 있었지만 결코 단조롭지 않았다. 봄기운이 무르익은 정원은 사계절을 모두 담은 듯 파릇파릇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천천히 황후의 행렬이 다가오자 외진 곳을 찾아 놀고 있던 여인들은 마치 목욕하는 걸 들킨 선녀들처럼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다가오는 황후의 모습에 즉시 웃음기를 거둔 후궁들이 바른 자세로 서서 문안 인사를 올렸다.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마마 천세 천세 천천세.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전하,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장서열은 후궁들이 놀란 토끼 떼처럼 당황과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눈밭에서 뛰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결국 장서열이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일어나라.”
장서열의 시선이 눈이 쌓여 하얗게 변한 곳으로 향했다. 비록 발자국과 산산조각 난 눈덩이로 가득했지만 비교적 깔끔한 장소임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어린아이 같은 성격인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일찍부터 눈 내린 세상을 바라보며 자매들과 한바탕 웃고 떠들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문득 지난 생이 떠올랐다. 막 궁에 들어왔을 때 장서열 역시 이러한 취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장서열은 싫어하는 후궁 네댓 명을 불러낸 뒤, 시녀들을 시켜 그녀들의 옷깃 안에 눈을 밀어 넣는 짓을 일삼았다.
눈앞에 있는 여인들은 과거의 그녀보다 훨씬 단순한 사람들이었다. 괜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장서열이 웃으며 말했다.
“다들 본궁을 신경 쓸 필요 없다. 본궁은 그저 웃음소리를 듣고 와 본 것뿐인데, 자네들의 흥을 깬 듯하여 참으로 미안하구나.”
그들 중 대담한 이들이 즉시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황후마마와 같이 고귀하신 분께서 천첩들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러 오셨다니 참으로 영광이옵니다. 천첩들은 그저 보잘것없는 재주로 인해 마마의 눈을 더럽히고, 마마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장서열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눈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말솜씨가 훌륭하구나. 다들 본궁은 여기 없다 생각하고 즐기거라.”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찌하는 게 좋을지 의견을 모아야 했다. 아무리 본인이 없는 것처럼 즐기라고 하지만, 그녀들이 어찌 정말로 황후가 없는 것처럼 놀 수 있겠는가.
그러나 대담한 이들은 순간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생각보다 온화할 뿐더러 태자까지 데리고 온 황후를 보니, 이것이야말로 황후의 눈에 들 수 있는 좋은 기회인 듯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만에 하나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태자의 앞이기에 황후는 그녀들을 책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기회를 정확히 파악한 서徐 재인이 즉시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마마, 공연히 웃음거리가 될까 부끄럽습니다.”
가장 먼저 자리로 돌아간 그녀가 조금 전 던지지 못했던 ‘무기’를 집어 든 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친한 자매에게 던졌다. 그러자 상황 파악이 끝난 몇몇 후궁들 역시 순식간에 웃고 떠들며 서 재인과 행동을 같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