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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44)화 (344/449)
  • 제344화

    서풍엽은 오래도록 아무것도 모른 채, 구염락이 장서열을 버리지 않고 황후까지 오를 수 있도록 마음 쓴 것을 내심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의 음모였다. 진심? 형제애? 과거에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던 녀석은 두 연인이 가르쳐 주었던 지식을 이용해 자신들을 갈라놓는 데 이용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을 불만스러워하는 것도 모자라 혼인을 하라고 종용하기까지 하다니!

    “구염락! 그래, 지금 네가 이룬 것들을 생각하면 내게는 감히 널 이렇게 부를 만한 자격이 없지. 하지만 네가 나와 서열이에게 과연 떳떳한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우리는 진심으로 너를 대했어! 그런데 너는 대체 무슨 짓을 했지? 형제에게서 연인을 빼앗아 가다니!”

    “…….”

    “폐하, 폐하께서는 정녕 소신이 폐하를 원망하기를 원하십니까?”

    구염락이 원한 섞인 눈빛으로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변에는 온통 어두운 기운이 가득했다.

    “모두 썩 꺼져라! 누구든 감히 방금 들은 말을 단 한 마디라도 발설한다면 반드시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게 해 줄 것이다.”

    소리자와 하인들은 감히 멈춰 설 생각을 못 한 채 놀라서 급히 물러갔다. 이들은 속으로 이렇듯 엄청난 비밀을 안겨 준 서풍엽을 원망했다. 만에 하나 이 사실을 황후가 알게 되고, 이로 인해 황제가 폭주한다면 그들의 머리는 전부 날아갈 터였다.

    서풍엽을 바라보는 구염락의 눈빛은 증오로 가득했다.

    “그래, 그대는 줄곧 그대가 나를 보살펴 주었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그대 스스로를 퍽 대단한 사람이라 여겼을 거야. 당연히 서열이는 너의 것이어야 하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여겼을 테지. 너 역시 서자 출신인 황자는 서열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다는 걸 알아.

    진심? 말은 참 청산유수로군. 짐을 그저 서열이에게 붙어 있는 고양이나 강아지 정도로 여겼으면서, 네게 거들떠볼 가치조차 없는 것들을 선심 쓰듯 베풀며 서열이에게 잘 보이려고 한 주제에!

    대체 짐이 왜 고마워해야 하는 거지? 그대가 잘난 척을 하며 내게 하사한 것들을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뻔히 아우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던 그대가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서열이와 손을 잡고 연인임을 과시하던 과거를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알량한 내 자존심까지 짓밟으려 든 것을 고마워해 줄까?”

    “…….”

    “서풍엽. 그대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은 짐도 잘 알고 있어. 이유야 어찌 됐든 그대가 실의에 빠진 나를 도와 준 건 분명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짐이 서열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 그대의 곁에 서열이가 없는 건 그저 사랑이라 믿었던 것이 사라진 탓일 뿐, 앞으로 그대와 함께 늙어갈 사람까지 사라진 건 아니야.

    하지만 짐은 그대와 달라. 서열이가 없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되지. 서열이가 없다면 살 수 없는데, 당연히 빼앗아야지. 무슨 수를 쓰든, 어떤 대가를 치르든 난 기필코 그녀를 빼앗아야 했어. 그리고 결과는? 결국 내가 이겼잖아. 서열이는 지금 내 것이야.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고!

    그대가 구태여 다시 과거를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설마 짐과 달리 대단한 사랑을 하고 있는 그대가 다시 그녀를 품에 안기 위해 모든 것을 발설할 생각은 아니겠지?”

    구염락이 가소롭다는 듯 재차 입을 열었다.

    “그대가 감히 그럴 수 있을까? 아니, 두려워서라도 못 하지.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서열이가 그래도 그대를 보지 않는다면? 심지어 짐의 과오에도 개의치 않고 여전히 그녀가 짐의 곁에 남는다면? 허면 그대는 무엇이 되는 걸까……. 사랑의 실패자, 아니면 사랑도 지키지 못한 남자?”

    이로써 서풍엽은 또 한 번 철저하게 패배했다. 그를 먼지처럼 산산조각 내고도 기쁜 기색 없이, 그저 사실을 나열할 뿐인 구염락이 이어 말했다.

    “짐의 눈에 그대의 기다림이 어찌 보이는지 아나? 그대는 이기적으로 황후에게 계속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뿐이야. 대소신료들이 그대를 어떻게 생각할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도록 해.

    이미 오래 전 정혼자는 떠나갔는데, 줄곧 새로 정혼을 하지도, 혼인을 하지도 않고 있다면 그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대가 여전히 황후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만천하에 알리려는 게 아니면 대체 이런 태도가 다 무엇이냔 말이야! 참 애석한 일이야. 그대의 기억은 오로지 서열이의 과거에 멈춰 있으니!

    서풍엽, 나였다면 서열이가 입궁했을 때 바로 다른 여인과 혼인했을 거야. 대체 짐이 지금 그대에게 혼처를 마련해 주는 것이 뭐가 문제지? 온 연경 바닥을 들쑤셔 모두가 이 난리를 알게 되니 만족해? 요란한 연애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로군. 기어코 혼인을 거절하여 그대의 사랑을 과시하려는 걸 보니. 이 점에서는 그대가 권서함만 못해.”

    구염락이 마치 아름다운 추억 속으로 빠져들 듯 말을 이었다.

    “권서함이 어째서 혼인을 하게 됐는지 알려 줄까? 짐은 이미 그의 비밀을 알고 있고, 그로 인해 기분이 좋지 않다고 말했어. 그러자 권서함은 혼인을 했지. 여기서 그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구염락이 더욱 경멸하는 눈초리로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그대도 짐작할 수 있겠지. 권서함은 서열이를 좋아했어. 참으로 눈이 높더군. 하지만 권서함의 사랑과 비교하면 그대는 훨씬 많은 것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짐이 분노하고 있는데도 혼인은커녕 서열이가 황궁에서 평온하지 않길 바라는 사람처럼 굴고 있어!”

    “…….”

    “권서함은 달랐지. 일개 신하의 마음은 부담일 뿐이니까. 그는 떳떳한 길을 택했어. 그러나 그대는 아니야. 그대는 얼토당토않은 고집을 부리고 있어!”

    돌연 서풍엽에게 다가간 구염락이 그의 귓가에 물었다.

    “짐에게 말해 봐, 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러는 건지. 이런 그대가 대관절 무슨 연유로 서열이를 향한 짐의 사랑을 깔보는 거지? 설마 아직도 승산이 있는 싸움이라 여기는 건가? 하하! 참으로 우습군. 그대는 정말로 사람들이 식후에 떠드는 화젯거리 외에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서풍엽은 장서열을 쉽게 보내줄 수 없었다.

    물론 권서함이 장서열을 좋아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놀라웠다. 서풍엽은 권서함이 그 마음을 포기한 것에 내심 탄복했다.

    “폐하, 잊으신 듯하오나 소신과 권서함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의 마음은 비밀에 붙여졌으니 황후마마의 품행에 의혹을 제기할 수 없지요. 하지만 소신은 황후마마와 어렸을 적 정혼을 한 사이입니다. 그런 소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게 대체 무슨 잘못이란 말입니까!”

    서풍엽은 끝까지 버텼다. 구염락이 뭐라고 하든 끝까지 버티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주제에, 심지어 말 한 마디로 자신을 억지로 혼인시키려 하고 있었다.

    ‘웃기지 마! 무슨 자격으로!’

    구염락은 여전히 평온하게 서풍엽을 일깨워 주었다.

    “짐은 군주고, 그대는 일개 신하일 뿐이다. 짐과 맞서는 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에 불과해.”

    손에 든 관패를 만지작거리며 서풍엽이 경멸하듯 웃었다.

    “그렇다면 폐하의 바위가 얼마나 강한지, 그리하여 소신이 타협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두고 보도록 하지요.”

    “서풍엽!”

    “폐하! 사람들을 너무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폐하만 아니었다면 저와 서열이가 오늘 같은 상황에 처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불효자라는 낙인 역시 거절하겠습니다. 불효를 논하자면, 폐하께서 소신보다 나은 점이 무엇입니까? 폐하의 친모께서는 지금까지도 외지에서 정처 없이 유랑하고 계십니다. 그런 폐하께서 어떻게 효도를 입에 올리십니까?

    폐하께서 빼앗는 게 쉬웠을 만도 하지요. 소신이 이렇게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서열이가 폐하와 혼인한 것은 사실이고, 소신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내내 자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기어코 소신에게 권 한림의 일을 언급하시는군요.

    그동안 소신이 꾹 참고 지낸 세월은 보이지 않으십니까? 마지막 남은 작은 소원 하나를 들어주시는 일입니다! 이러니 소신이 어찌 달가울 수 있겠습니까!”

    말을 마친 서풍엽은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께 감히 청합니다. 함께 한 여인을 사랑했던 지난 세월을 봐서라도 소신의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소신,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평온한 일생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서풍엽을 바라보는 구염락의 마음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일개 신하가 자신의 앞길을 막은 채, 영원히 움직이지 않으려 하다니!

    구염락의 기분이 유쾌하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이 바위는 그가 움직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마치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견디기 어려운 감정이 몰아쳤다.

    “폐하! 부디 소신의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서풍엽이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어린 시절 소신이 폐하와 어울렸던 시간을 생각해서라도… 폐하…….”

    순간 구염락의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 과거의 기억 하나하나가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년 시절, 서풍엽은 줄곧 의기양양했고 품위가 있었다. 과거 서풍엽과 장서열은 정이 깊었기에 서로의 곁에 있었다.

    오늘날의 서풍엽은 다소 내성적이면서 너그러웠다. 비록 업무나 사람을 처리하는 데 있어 약간은 조심성이 없고 제멋대로인 모습이 있기는 했으나, 오히려 그로 인해 연경에서 호평을 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아무리 여러 차례 황제의 혼처를 거절했다 하더라도 서풍엽은 그 됨됨이 덕분에 여전히 여러 관원들에게 탐나는 사윗감이었다.

    그런 서풍엽에게 장서열을 잃은 건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이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서풍엽은 그 시간들에 묶여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나마 유일했던 만남도 이미 반년 전의 일이었다. 그 만남에서도 서풍엽은 선을 넘지 않았고, 장서열은 한눈을 팔지 않았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구염락이 이를 악물고 분노를 삼켰다.

    “물러가라. 짐은 언젠가 그대가 혼인한다는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길 바란다.”

    서풍엽은 마침내 한숨을 내쉬었다.

    “소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황제의 앞에 서기 전까지 서풍엽은 감히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어느 날, 쥐죽은 듯이 살고 있던 백국의 황실에서 그를 찾아와 과거에 황제와 나눈 비밀을 전해 주었을 때, 서풍엽은 모든 이들을 원망했다. 모든 것이 잘 짜인 판이었고, 판 위에 놓인 말은 그와 장서열이었다.

    하지만 과거의 사랑에 대하여 두 사람은 어떠한 유감도 없었다. 서열이에게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니, 그녀를 위해 자신만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고 서풍엽은 생각했다.

    언젠가 황제가 그녀를 홀대하는 날이 왔을 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떠올리며 그녀가 마음속 분노를 달랠 수 있다면, 그리하여 황제가 더욱 주의하고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다른 것은… 마음이 넓지 않은 탓에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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