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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42)화 (342/449)
  • 제342화

    장서열은 그제야 마음을 놓은 얼굴로 아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바마마가 황아를 기요처에 데리고 가려는 건 아바마마께서 외롭기 때문에 황아와 같이 있고 싶어서란다. 어때, 아바마마와 같이 가고 싶니?”

    구염황은 약간 위축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버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돌연 굳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황제의 아들이자 장래의 군주이니, 아버지가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매사에 정진해야 했다.

    “아바마마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어찌하려고?”

    “저는… 저는 안 무서워요…….”

    장서열이 웃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라는 말에 곧 울 것 같은 표정이 된 아들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녀석, 바보 같기는. 우리 황아는 당연히 무서워할 수 있단다. 하지만 이 어미가 말했지. 그건 두려움이 아닌, 경외심이라고. 그러니 처음에 무서운 감정이 들더라도 아바마마께서 무슨 말을 하셨는지 기억하고 나중에 고치면 그만이란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들이 되는 것이지. 우리 아들, 아바마마께서 사자 같은 모습을 보이더라도 아바마마의 말을 주의해서 들을 수 있겠니?”

    그 말에 구염황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사자라는 단어가 아이를 웃게 한 것이다. 구염황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기도 하지.”

    그때, 젖은 머리를 한 채로 구염락이 걸어 들어왔다. 강렬한 존재감에 장서열의 손을 잡고 있던 어린아이가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구염황의 손을 다시 잡아 준 장서열이 격려하듯 눈을 맞춰 주었다. 그러자 긴장이 점점 풀린 구염황은 걸어 들어오는 구염락을 보고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아바마마를 뵈옵니다.”

    이를 본 구염락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지나치게 통통한 구염황의 턱이 고난도의 동작을 해내자 딸을 볼 때 느껴지던 부들부들함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사내아이가, 그것도 장차 황제가 될 저군儲君이 이런 모습으로 자라다니. 장차 혼군昏君(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이 될까 염려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둔하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누가 뿌린 씨앗인가. 구염락은 마지못해 한 마디 대꾸했다.

    “그래.”

    구염황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큰 사자가 자신에게 말을 했다. 꾸짖는 것도, 겁을 주는 것도 아닌 평범한 말을 해 주었다.

    구염황은 아버지와 드디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장서열은 고개를 저으며 구염락을 위해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장서열은 아들에게 꼭 말해 주고 싶었다.

    ‘네가 어렸을 때, 어떤 사람은 너와 놀고 싶다는 이유로 후궁을 피로 물들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단다. 지금은 체통을 중시하는 데다 네가 비뚤어질까 걱정되어 줄곧 냉소적으로 구는 것이지.’

    눈앞의 성과에만 너무 급급한 나머지, 구염락은 정작 아이가 놀라서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장서열이 구염락의 머리 위로 수건을 던졌다.

    “물기부터 닦으십시오. 젖은 채로 다니면 서북 지방에 삼 년간 가뭄이 들 것입니다.”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구염락이 수건을 안은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마저도 제대로 앉기도 전에 밀려나는 바람에 장서열이 준비한 의자에 앉아 꽤 불편하게 머리를 말려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번거로워도 구염락은 내정內庭에 태감이나 궁녀가 있는 것이 싫었다. 그에게는 이곳이 집이었다. 하인 역할은 부인과 자신만으로 충분했다. 괜히 어수선하게 사람들을 들여서 무얼 하겠는가.

    “태자는 오늘 무슨 시를 배웠는지 이 아비에게 들려줄 수 있겠느냐.”

    즉시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난 구염황이 공손하게 아버지의 앞에 섰다. 격려가 필요한 듯 어머니를 한 번 쳐다본 아이는 격려 끝에 더듬거리며 간단한 오언시五言詩를 읊었다.

    구염락은 듣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정확하지 않은 발음이 너무 우둔해 보였기에 막 꾸짖으려는 찰나, 갑자기 등 뒤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그의 등 위로 올라온 손 하나가 모질게 그의 살을 꼬집고 있었다.

    구염락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발전이 있었구나.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도록 하여라. 날이 늦었으니 이만 내려가서 쉬거라.”

    구염황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득의양양하게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칭찬의 눈빛을 받은 아이는 공손한 자세로 부모님께 예의를 갖추고 대마마를 따라 자리를 떠났다.

    사실 어린 구염황은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돌아가서 몇 번이고 다시 시를 외워 반드시 조금 전보다 더욱 유창하게 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분명 자신을 대단하다고 인정해 줄 것이다.

    구염황은 한 번도 아버지가 이렇게 좋은 사람일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역시 아바마마는 멋진 사람이었다. 조금 전 미간을 찌푸린 건 분명 아들을 중히 여긴 아버지가 돌아가서도 계속 노력하라고 격려해 준 것이 분명했다.

    대마마의 손을 잡은 구염황의 짧고 두꺼운 다리가 두어 번 높이 뛰어올랐다. 하지만 즉시 적절하지 않은 행동임을 감지한 구염황은 옷자락을 한 번 매만진 후, 대마마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태자로서 이리 희색이 만연하면 안 될 일이었다.

    구염황이 떠나자 장서열은 주렴 가까이에 있는 촛불을 껐다. 방은 조금 전처럼 밝지는 않았지만, 보랏빛 침대 휘장을 물들인 촛불이 방 안을 비추며 어슴푸레하면서도 온화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시치미를 뚝 떼고 연탑으로 올라간 구염락이 몸을 밀어 넣었다. 커다란 수건은 이미 제 기능을 잃은 채 구염락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손을 써? 자, 이제 짐에게 어떻게 보상할 건지 말해 봐.”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장서열이 구염락을 흘겨보았다.

    “본궁은 지금 폐하를 상대할 기분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께서는 대관절 두 살 때 무얼 할 줄 아셨습니까? 아들에게 그리 무리한 걸 요구하다니요. 적당히 타이를 수 있잖아요, 아들한테 화풀이 좀 안 할 수 없어요? 아이는 지금 가장 연약한 시기라고요! 만일 이렇게 지적만 당하다 풀이 죽어 어떤 일에도 앞장서 나서지 않으려고 하면, 그때는 본궁이 당신을 끝장내고 말 테니 알아서 하세요!”

    구염락은 순간 자신이 보여 준 ‘자애로운 아버지’가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어찌 아이한테 화풀이를 할 수 있겠어?”

    구염황은 무려 장서열이 낳아 준 아들이었다.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매일 부황의 위엄을 세우느라 차마 안아 주지도 못하는 아이를 보며 애써 참는 것도 힘든데, 이렇게 비난까지 당하다니!

    자애로운 아버지가 엄청난 무시를 당하고 있었다.

    “짐이 분명히 하겠는데, 난 자애로운 어머니인 당신보다도 훨씬 더 황아를 중히 여기고 있어.”

    장서열이 다시 머리카락을 빗기 시작했다.

    “그럼 본궁이 폐하께 부탁을 좀 드릴까요? 다음에 황아를 ‘중히’ 여기실 때는 좀 적당히 해 주십시오. 황아는 아직 너무 어려 당신 같은 늙은이가 괴롭히는 걸 견디지 못한답니다.”

    순간 연탑에서 나는 듯이 뛰어오른 구염락이 단숨에 장서열을 들어 침대 위로 던졌다. 그의 눈에서 숨겨지지 않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려서 안 돼? 그럼 늙은 사람을 괴롭히는 건 괜찮겠지!”

    구염락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장서열이 아무리 살살 해 달라, 천천히 해 달라 부탁하며 어르고 달래도 듣지 않았다. 본전을 찾을 때까지 집요한 기세로 파고들며 구염락은 억울한 심정을 제대로 되갚아 주었다.

    만족할 만큼 마음이 풍족해진 그가 침대 위에 누웠다. 구염락의 입가에는 바보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장서열은 구염락을 걷어차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허리가 조금 아프기는 했지만 다행히 최근 황아와 함께 밖을 거닌 시간이 많았던 덕분에 운동이 되었는지 상태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뺨이 고개를 들었다. 상대가 흘린 땀 때문에 머리카락 몇 가닥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몸을 돌려 턱을 괸 장서열이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호국의 일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에요? 출정을 나가야 한다면 미리 제게 귀띔해 주세요. 빨리 떠날 수 있도록 잘 배웅해 드릴 테니까요.”

    하하 웃은 구염락이 손을 내밀어 아름다운 아내를 품에 안았다. 온몸에서 나른하고도 평온한 기운이 풍겨져 나왔다.

    “왜, 내가 출정하는 게 싫어?”

    물론 장서열은 국사에 대해 왈가왈부할 힘이 없었다.

    “아니요. 그저 당신이 걱정될 뿐이에요.”

    마음속 걱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장서열이 손을 뻗어 구염락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호국은 백국과는 달랐다.

    전생에서 구염락은 호국을 공격하며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호국과의 전쟁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구염락이 적당한 시기라 판단했다면 그녀도 더는 어찌할 수 없었다.

    차가워진 손을 비빈 구염락이 다시 온기를 만들어 냈다.

    “사실… 짐은 호국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이런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자조하듯 웃어 보인 구염락이 약한 모습을 드러냈다.

    “짐이 호국을 업신여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맹목적으로 우쭐대는 사람은 아니야. 아무리 지금 호국이 이백 년 전만 못하다 해도, 아직 잠재력이 막강한 대국임은 분명해.

    호국을 무너뜨리려면 외부에서 손을 대는 것으로는 불가능해. 내부적으로 무너지게 해야 하지. 못해도 십 년을 바라보며 차근차근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리 짐이라고 해도 감히 호국과의 전쟁을 가볍게 말할 수 없어. 여차하면 양국 모두 피해가 막심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구염락의 말을 듣던 장서열이 갑자기 웃었다.

    “당신은 언제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것을 잊지 않는군요. 양국 모두 피해가 막심할 거라뇨, 어찌 호국이 당신을 삼킬 가능성은 얘기하지 않는 거예요?”

    구염락은 평이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다.

    “당신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짐은 사실에 입각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야. 지금 당장 짐이 호국을 삼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호국이 이 나라를 삼키는 건 더욱 불가능해. 당신의 부군은 결코 허수아비가 아니라고.”

    말을 마친 구염락이 몸을 돌려 장서열의 위로 올라갔다. 비록 한 번 더 할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그녀를 안고 조용히,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끝내 무게를 견디지 못한 장서열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무거워 죽겠어요.”

    “그럼 반대로 하면 되지.”

    다시 몸을 돌린 구염락이 장서열을 자신의 위로 올렸다. 품에 안긴 장서열의 등이 순간적으로 경직됐으나 구염락은 괜찮다는 듯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

    “짐은 당신의 부군이야. 두려워하지 마… 괜찮아.”

    순간 장서열의 마음이 요동쳤다. 편안히 구염락의 어깨에 기댄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구염락은 나의 부군이니, 좀 누르더라도 괜찮아.’

    과거에 이 순간을 위해 어떠한 대가를 치렀던가.

    한편, 왕 마마는 식탁에 차려진 저녁 식사를 보았으나 감히 황제 내외를 방해하지 못하고 농교와 하인들에게 식사를 치우라고 명했다. 그녀는 소화가 잘 되는 음식으로 밤참을 바꾸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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