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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41)화 (341/449)
  • 제341화

    구염락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선 이의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장서열의 강경한 손길에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장서열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가만히 머리를 빗어 주며 그녀가 제안했다.

    “기왕 황은을 베푸는 거, 왜 하필 다른 나라의 공주입니까. 행여나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호국의 공주는 어찌하라고요. 성격에 따라서는 스스로 목을 매 자결할 수도 있는데, 그럼 서풍엽이 다시 혼인하려 하겠어요?

    만일 후사라도 본 뒤에 그런 일이 생기면 충왕부에서는 당신을 어찌 생각하고요. 기왕에 혼처를 정하시려거든 제 말대로 제대로 된 세도가를 찾아 후환이 없도록 하세요. 신하들이 모두 당신을 배신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

    “아이, 당신도 참! 일단 움직이지 말고 들어요. 제위에 오른 뒤부터 지금껏 권씨 가문에게 미움을 산 것도 모자라 이제 충왕에게까지 밉보일 생각이에요? 충왕부가 당신에게 너무 충성스러운 게 싫은 거예요, 아니면 당신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지 보려는 비뚤어진 마음인 거예요?

    신첩의 말을 들으시지요. 명문가의 뛰어난 아가씨를 찾아 줄 게 아니라면 애초에 세자의 혼사에는 끼어들지 마세요.”

    구염락은 마음속에 얹힌 답답한 돌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즉시 괜찮은 집안의 여식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짐이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 같아? 당신이 기분 나빠할까 봐 걱정했을 뿐이야.”

    장서열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폐하, 신첩의 충심을 의심하신다면 차라리 신첩에게 사약을 내리시지요.”

    구염락이 즉시 항복했다.

    “아냐, 그런 적 없어!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저… 네가 기분이 나쁠까 걱정이 되었을 뿐이야. 화내지 마. 내가 잘못했어.”

    장서열이 구염락을 노려보았다.

    ‘별소릴 다 듣겠네.’

    자신이 기분이 나쁠까 걱정이 되었다니. 설령 정말로 자신의 기분이 나빴대도 구염락이 서풍엽의 혼사를 신경 쓰지 않았을 리 없었다.

    자신을 흘겨보는 장서열의 시선에도 구염락은 그저 웃어 보였다. 정말로 서풍엽이 혼인을 하게 된다면 드디어 두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이다.

    삶은 기대하던 대로 조금씩 아름답게 변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본, 별로 두려워할 것도 없이 멍청하게 나이만 먹은 자신은 생각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장서열을 구염락이 냉궁에 가둘 리 만무했다.

    그러니 ‘그’가 죽은 듯한 얼굴을 한 채 평생을 외롭게 사는 것도 당연했다.

    구염락의 기분이 좋아지자 장서열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대체 누구를 닮았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네 사네 죽상을 하더니 지금은 즐거워하고 있질 않은가.

    “당신은 정말 달래기 쉬운 사람이에요. 호국은 당신에게 무슨 여인을 보낼 것인지 고민할 게 아니라 좋은 빗이나 하나 보내 줬어야 해요.”

    구염락이 하하 웃으며 장서열이 내민 손을 잡았다.

    “꼭 그런 건 아니지. 부인이라면 어떻게 달래 주어도 빨리 기분이 좋아지겠지만, 그게 다른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니까. 호국에서 순순히 강산을 다 내어 준다고 해도 짐에게는 그걸 살펴볼 마음이 없는걸?”

    장서열이 나무라는 표정으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됐어요. 점점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는군요. 이제 혼자 씻으시지요. 조금 전 당신 때문에 황아가 놀랐는데 당신만 신경 쓰다가 황아에게 가 보는 것도 깜박 잊었어요. 신첩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구염락이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참으로 불쌍하도다. 아들에게 부인의 환심을 빼앗기다니. 남편으로서 실패했으니 목숨이라도 바쳐야겠어.”

    장서열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만해요. 어서 씻고 나와요.”

    하찮은 일로 우는 소리를 내는 구염락을 무시한 장서열이 걸어가며 수건을 받아 손을 닦았다.

    구염황은 아버지를 매우 무서워했다. 특히 부황이 기분이 나쁠 때는 더욱 그랬다.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부황이 엄하다고 느껴질 때면 어김없이 잘못을 저지르고 혼이 났다.

    장서열은 구염황이 지닌 그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구염락을 대할 때 힘이 달릴 때가 있는데 어린아이는 오죽하겠는가. 구염락이 화를 낼 때면 구염황이 그녀의 뒤로 숨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군신들 역시 구염락의 눈에 띄지 않도록 거의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려 했다.

    내전에 들어선 장서열은 구염황이 번잡한 갈색 의복을 갖춰 입고 단정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주렴 소리가 들리는 순간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던 아이는 어머니를 보자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아이는 홀가분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어마마마.”

    장서열은 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물러가라 손짓했다. 아들의 옷이 바뀐 것을 알아챈 그녀가 부드러운 얼굴로 아들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이 어미에게 말해 줄 수 있니? 우리 황아가 왜 이리 긴장한 것인지 말이야.”

    어머니의 손을 잡은 구염황은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마마마… 아바마마께서는 저를 싫어하시는 걸까요?”

    구염황 역시 울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아버지가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서울수록 행동이 이상해졌고, 그럴 때면 아버지는 으레 더욱 화를 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버지를 마주보지 않아도 일단 함께 자리에 앉아 있으면 너무 긴장이 되었다. 그렇게 긴장에 휩싸이면 돌연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울먹이는 모습을 본다면 아버지는 또 화를 낼 게 분명했다.

    장서열은 겁 많은 아들을 바라보았다. 벌써 두 돌이 지난 아이는 곧 구염락을 따라 조로전을 떠나 조석궁과 기요처까지 드나들 예정이었으나 지금 이런 상태라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게다가 구염락은 본래 성격이 급한 데다 사내아이에 대한 기대도 큰 편이었다. 그의 높은 기대를 구염황이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면 아들은 자주 꾸중을 들을 테고, 결국 서서히 아버지를 배척하게 될 것이다. 이건 분명 좋지 않았다.

    장서열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들의 손을 풀어 주었다. 갈아입고 나온 아들의 옷깃을 매만져 주던 그녀가 장하다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어느 유모가 황아에게 옷을 갈아 입혀 주었니?”

    구염황이 촉촉한 눈을 깜빡였다.

    “대마마요.”

    “정말 예쁘구나. 대마마가 제법 안목이 높은 모양이다. 황아가 가장 신경 쓰는 아바마마를 뵙는다고 일부러 예쁘고 활기차 보이는 옷으로 갈아입혀 준 게로구나.”

    어머니의 말에 구염황이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쑥스러운 듯했다.

    “실은 제… 제가… 갈아입혀 달라고…….”

    대답을 들은 장서열이 짐짓 놀라는 척했다.

    “그래? 허면 황아 네가 대마마에게 이 옷으로 갈아입혀 달라고 한 것이냐?”

    구염황이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장서열은 용기를 북돋우며 아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째서 이 옷을 골랐니?”

    구염황아 즉시 대답했다.

    “아바마마가… 좋아서…….”

    장서열은 구염황이 전하고자 하는 뜻이 ‘아바마마가 저를 좋아하게 하려고’라는 걸 알았다.

    “그래. 이건 우리 황아가 아바마마를 아주 좋아한다는 걸 말해 주는 것이란다. 아바마마를 뵙기 위해 가장 예쁘고 단정한 옷을 입어서 아바마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칭찬을 받고 싶은 게지. 그럼 우리 황아의 기분이 좋아질 테고. 그렇지?”

    구염황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줄곧 자신을 무뚝뚝하게 대하는 아버지에게서 칭찬을 듣는다면 분명 아주 기분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 옆에만 붙어 있는다는 이유로 그를 꾸짖었다.

    장서열이 아들의 눈을 바라보았다.

    “황아, 그런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심이라는 거란다. 우리 황아의 마음속에 선망이 생기고 있는 것이지. 분명하게 우열을 가릴 수 있게 된 순간부터 너는 아바마마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대단하다는 걸 깨닫게 된 거야. 경외심을 느끼는 사람에게 항상 잘 보이고 싶은 건 당연하단다. 선망은 곧 관심의 표현이고.”

    “하지만…….”

    “우리 황아가 자연스레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되어 아바마마를 위해 가장 좋은 옷을 입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아바마마 역시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태자에게 누구나 우러러보는 아버지로 남기를 바라고 계시지.

    아바마마는 태자에게 원대한 목표가 생기길 바라기에 더 강해지려 하고, 또 네게 더 엄격한 요구를 하시는 거란다. 그래야만 아바마마께서 가지고 있는 지식을 기대해 마지않는 아들에게 가장 빠르게 물려줄 수 있고, 더불어 만천하에 아들을 자랑할 수 있잖니.

    그래서 아바마마는 황아를 더욱 엄격히 대하고, 세상의 이치를 알려 주시는 거란다. 하지만 황아가 이렇게 여인들과 오래도록 함께 지낸다면 군주의 기품을 배우기가 어렵겠지. 자, 어마마마를 보거라. 이 어미가 그리 좋으냐?”

    구염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믿음을 줄 뿐만 아니라 경외심을 알게 되었다고 칭찬해 주니 기분이 좋았다. 그는 언젠가 아버지가 군자에게는 믿음이, 성인에게는 경외심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래야 지나침 없이 올바른 사람이 되고, 그것이 바로 대장군의 기개라 했다.

    오늘로써 구염황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겁쟁이가 아닌, 아직 나이가 어릴 뿐인 대장부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거나 아버지를 보고 숨을 필요가 없었다.

    구염황이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어마마마, 좋아요. 좋아요…….”

    구염황이 기뻐하자 장서열은 경직되었던 마음이 어느 정도 풀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 어미가 우리 황아와 상아에게만 집을 만들어 줄 수 있는 반면에 아바마마는 매일 수많은 정무를 처리하며 수백만 명에게 집을 만들어 줄 수 있단다. 아바마마가 엄한 것은 매일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줘야 해서 그런 것이란다. 그래야만 천하의 백성들이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입고, 또 커다란 집에서 가족들과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지.

    또한 억울한 일을 당한 친구는 어머니에게 안겨 울고, 배고픈 친구는 굶지 않고, 이 어미가 이렇게 매일 예쁜 옷을 입고 우리 황아와 상아를 사랑해 줄 수 있는 것 역시 다 아바마마의 노력 덕분이란다. 황아는 이런 아바마마가 좋으냐, 싫으냐?”

    구염황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구염황은 그제야 아버지가 그토록 위대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바마마는 더 많은 사람을 마음으로 다스리기 위해 항상 화를 내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아바마마가 왠지 불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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