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40)화 (340/449)

제340화

순간 주 재인은 정신이 멍해졌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지? 폐하께서 무엇을 떨어뜨린 건지, 내가 누구인지 물어보시는 게 순서 아닌가?’

그렇다면 주방비는 공주에게 선물하려던 장명쇄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이 왜 이런 곳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지, 어째서 얼굴에 눈물자국을 달고 있는지,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를 낱낱이 고할 생각이었다.

장명쇄를 본 황제는 분명 자신의 진심을 깨닫고 고운 마음을 칭찬할 것이다. 다음 순서는 자연스레 두 사람이 서로를 깊이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황제가 설령 주 재인을 총애하지는 않는다 해도, 싫어하기야 하겠는가?

주방비는 먼저 황제와 친분을 쌓은 뒤 서로 천천히 사랑하게 되는 것이 더 아름답다 생각했다. 비록 황제의 두 번째 여인이 되는 것이지만, 그녀는 분명 황후보다 황제의 마음을 더욱 잘 헤아리고, 그의 환심을 살 자신이 있었다.

일은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가야 마땅했다. 그대로라면 완벽한 결말이었다. 그런데 황제는 어떻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심지어 곧장 자신을 죽이려 하는가!

주방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어렵게 오늘까지 오지 않았던가. 그녀는 아직 어렸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죽이라는 말 한마디에 죽어야 한다고?

‘안 돼, 절대 안 돼!’

주 재인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폐하! 폐하, 용서해 주십시오! 신첩은 3군 총통의 딸 주방비입니다. 신첩을 죽이실 수는 없습니다. 신첩을 죽이실 수 없어요!

폐하, 신첩은 폐하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첩은 폐하를 뵌 적이 있습니다! 신첩은 일전에 식당에서 폐하와 황후마마를 뵈었던 연분이 있습니다. 신첩은 죽을 수 없습니다, 폐하…….”

쓸데없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던 구염락은 순간 ‘3군 총통’이라는 단어에서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빌어먹을 주 씨는 감히 호국의 장점을 들먹이며 호국을 옹호하고 나선 자였다. 아무리 요직에 있다 한들 한 번 눈 밖에 난 이상 구염락이 그를 가만둘 리 만무했다.

순간적으로 황제가 발산하는 살기를 느낀 소리자는 군말 없이 아랫사람에게 어서 후궁의 입을 막고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 일사불란하게 일을 처리한 그는 서둘러 다시 걸음을 옮길 것을 명했다. 신속히 조로전으로 돌아가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황제의 화를 가라앉혀야 했다.

소리자는 최근 황제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분명 호국이 막무가내로 들이닥친 것과 관련이 있었으나, 어쩌면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와 힘겨루기를 하듯, 최근 황제는 더욱 정무에 힘을 썼다.

발버둥치는 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이윽고 여인의 모습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차마 황제에게 고하지는 못했으나 사실 소리자는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여인은 조로전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만에 하나 그녀가 황후의 비호를 받는 후궁이라면 또 다른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아직 서 귀인의 일도 채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주 재인의 일까지 터진다면 분명 조용히 넘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구염락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이 시간 조로전을 나와 자신의 눈에 띈 여인이 결코 장서열이 아끼는 사람일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하는 꼴을 보아하니 장서열이 싫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욕심이 화를 불렀다. 만약 소리를 낸 여인이 그대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면, 헛소리를 하지 않고 가만히 머리만 조아리고 있었다면, 구염락은 절대 그녀를 죽이라고 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너무 긴장한 탓에 실수로 물건을 떨어뜨린 것뿐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구염락은 가던 길을 가고, 그녀는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으면 되었을 일이었다. 원망은 쓸데없이 말이 많은 데다 죽여 달라 간청하기까지 한 스스로에게 해야 했다. 그렇게 조목조목 살려 달라고 빌 줄 아는 사람이, 물건 하나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 했다고?

구염락의 입가에 비아냥 섞인 냉소가 피어났다. 시끄러운 소리로 주의를 끌었을 때에는 마땅히 그 결과까지 감수할 각오가 되었어야 한다. 이미 후궁의 본분에 대해 충분히 깨우쳐 주었는데, 아직도 분수를 모르는 계집이 있다니.

구염락은 죽음을 자초하는 여인들의 바람을 무시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말은 단 한 마디라도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무책임한 말이 되게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염락은 소리자에게 한 마디 분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후에게는 보고할 필요 없다.”

소리자와 하인들은 즉시 그 말을 알아들었다.

“예, 폐하.”

* * *

조로전은 언제나 따스하고 화목했다. 황제가 어떤 상태이든 항상 웃으며 대할 수 있는 여인이 있는 곳. 황후의 수완이 어느 정도이든, 지금 이 순간 소리자는 감탄 외에 다른 감정은 표현 할 수 없었다. 황제의 무뚝뚝한 얼굴을 똑같이 무뚝뚝한 얼굴로 대할 수 있는 건 보통 사람은 도무지 이를 수 없는 경지였다.

장서열은 아들과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유모가 연탑 위에 올려 둔 어린 공주는 눈을 깜빡이며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웃는 얼굴은 어찌나 통통한지 목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어머니의 손에 들린 떡을 얻기 위해 계속해서 뛰던 구염황은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오는 아버지를 보자 순식간에 응석을 부리던 표정을 거두었다. 그리고 즉시 착하게 어머니의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숙인 아이는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빠르게 움직인 건 구염황뿐만이 아니었다. 미소 띤 얼굴로 태자 전하를 바라보고 있던 하인들을 비롯해 대전에 있던 모두가 즉시 웃음을 거두었다. 따뜻하고 편안했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모두들 언제 그랬냐는 듯 조심스러운 얼굴로 숨조차 크게 내쉬지 못했다.

왕 마마가 즉시 하인들을 이끌고 인사를 올렸다.

“노비,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유일하게 미소를 거두지 않은 건 황후뿐이었다. 몸을 일으킨 장서열은 안색이 좋지 않은 구염락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폐하를 뵈옵니다.”

구염락에게 다가간 장서열이 그가 걸쳤던 겉옷을 받아 병풍 위에 걸었다. 그녀는 누가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기라도 한 듯 잔뜩 화가 난 구염락을 따라 욕실로 걸어갔다.

잠시 뒤를 돌아본 장서열은 마마들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물러가라는 손짓을 한 후, 다시 몇 걸음만에 구염락을 바짝 쫓았다.

“무슨 일이에요? 왜 이렇게 진노하셨어요.”

황후가 뒤따르는 것을 본 소리자와 혜령이 비로소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드디어 벗어났다!’

심지어 혜령은 홀가분하게 말했다.

“공공, 돌아가서 좀 쉬시지요. 지금은 저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소리자도 사양하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을 보내시게.”

황제를 모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감정적인 황제의 시중을 드는 일은 사람을 극한으로 모는 극심한 감정 노동이었다.

조로전을 나선 소리자가 다시 한번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저 멀리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금용이 떠난 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부디 금용이 궁에 있을 때처럼 교만 방자하게 굴지 않기를… 올바르게만 처신한다면 남은 생은 훨씬 수월할 터였다.

* * *

한동안 기요처를 드나든 덕분에 어느 정도 정무를 익힌 장서열이 구염락을 따라 들어가며 떠보듯 물었다.

“호국의 요구가 지나칩니까?”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간 구염락은 모처럼 부드럽고 자상하게 챙겨 주는 부인의 손길을 즐기고 있었다. 구염락은 그녀가 꼭 이럴 때에만 자신을 더욱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대해 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눈을 감은 구염락은 등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과 그녀의 손바닥이 움직이는 힘을 느끼며 조금씩 분노를 가라앉혔다. 심지어 아침에 본 그자들도 너무 증오스럽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지나친 건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세요.”

구염락의 말을 믿지 않는 듯 그녀가 구염락의 등을 밀어 주었다. 구염락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사신들의 요구가 그리 지나치다고는 할 수 없지… 우리가 점령하지 못한 백국의 영토에서 군사를 철수시키고, 점령한 도시의 백성들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자는 건데……. 심지어 점령한 지역의 소득에서 일정 부분을 호국에 떼어 주고, 호국이 보낸 여인까지 후궁으로 받아들이라는 거지만… 확실히, 지나치지 않지……. 그저 그 거만한 낯짝이 꼴사나울 뿐.”

장서열은 구염락의 말투 속에 경멸과 반어가 스며들어 있다는 걸 알았다. 구염락은 상대의 ‘지나치지 않은’ 요구가 단 한 가지도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장서열은 구염락의 성격상 호국이 무슨 짓을 했어도 결과는 같았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호국이 부드럽게 나왔다면 그는 패기가 없다는 이유로 호국을 경멸했을 것이고, 더 강경하게 나왔다면 감히 자신을 업신여긴다고 분노했을 것이다. 부드럽지도, 강경하지도 않았다면 또 씹어 먹는 재미가 없었다고 여겼을 터였다.

어쨌든 구염락은 외교에 있어 누구의 말도 들을 생각이 없는 독단적인 군주였다. 그에게 호국은 무슨 짓을 하든 다 눈에 거슬렸다. 이를 아는 장서열은 일부러 무심하게, 조금도 개의치 않는 척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염락이 화를 낸다면 그녀는 마지못해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장서열이 구염락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구염락의 긴 머리카락을 풀어 준 그녀가 시녀가 들고 있던 쟁반에서 옥으로 만든 빗을 꺼내 그의 머리를 빗어 주었다.

순간 구염락의 감정이 고조됐다.

“짐이 공격한 곳은 우리 대주국의 영토야. 감히 무슨 자격으로 저들에게 조공을 바치라는 거지? 차라리 쳐들어와 빼앗아 가라지! 호국의 황제는 매번 호재가 생길 때마다 꼭 뭐라도 맡겨 놓은 양 빚쟁이처럼 구는군!”

급할 건 없었다. 구염락의 그 거칠고 급한 성격이라면 분명 무슨 일을 저질러도 저지르고야 말 것이다. 장서열은 괜히 그를 놀려 줄 기분이 나지 않았다.

“눈과 코조차도 분간이 되지 않는 호국인지 호구인지 그 공주 따위가 대체 나와 무슨 연관이 있지? 설마 짐에게 그녀의 눈과 코를 분리하는 수고까지 하라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이미 와 버렸으니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 아! 꼬집지 마. 내가 정말로 뭘 어쩌겠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

순간 분노한 제왕에서 일개 평민이 된 구염락이 꼬집혀서 빨갛게 변한 피부를 문지르며 아주 정의로운 양 입을 열었다.

“세자의 나이도 이제 적지 않으니, 계속 혼인을 하지 않는다면 충왕이야 급할 게 없어도 충왕비는 초조하겠지. 짐은 호국의 공주를 세자와 맺어 주는 게 어떨까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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