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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39)화 (339/449)
  • 제339화

    빈정거리는 주인을 보며 완정은 마마의 재주가 참으로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다. 황후마마가 이토록 매몰찰 수 있다는 걸 이전까지 몰랐다는 게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주방비는 깜짝 놀랐다. 평소 단정하고 온화한 황후로부터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억울한 상황을 자초한 것만 같았다.

    “신… 신첩이 잘못했사옵니다.”

    주방비가 풀썩 무릎을 꿇었다.

    “신첩이 괜히 흐느끼며 마마께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황후마마,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장서열은 매우 따분하다는 듯 다시 잔을 들며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본궁은 잘못이 없는데 누군가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주 재인, 본궁을 보러 왔으면 즐겁게 왔다 기쁘게 돌아가야지,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란이냐? 주 재인은 본궁의 기분을 해치기 위해 찾아온 것이냐, 아니면 본궁 때문에 굉장히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떠들러 온 것이냐?”

    “신첩이 감히 어찌 그럴 수 있겠사옵니까! 신첩, 절대 그럴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저 집에 계신 어머니 생각에 저도 모르게 황후마마의 앞에서 추태를 부린 것이니, 부디 가엾게 여겨 용서해 주시옵소서.”

    장서열이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 알고 보니 주 재인은 집이 그리웠던 것이로군. 허면 본궁이 도로 자네를 부모님께 내어 드리도록 폐하께 청을 드리는 것이 좋겠구나. 그렇다면 서로 그리워하며 느끼는 고통도 덜고, 모친의 걱정도 해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자네의 생각은 어떠하냐?”

    주 재인은 순간 어찌 해야 좋을지 몰라 입을 꾹 다물고 눈만 굴렸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그럼 다시 돌아올 수는 있는 거야?’

    승은을 입은 적도 없는 일개 재인이 궁을 나간다면 그 품계가 온전할 리 없지 않은가. 사라진 후궁을 다시 거들떠봐 줄 사람은 없었다.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만일 다시 환궁하지 못하게 된다면?

    ‘황후는 대체 얼마나 악독한 마음을 먹었기에 나를 집으로 내보내려는 것인가!’

    과즙을 마시던 장서열은 시시각각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얼굴을 바라보며 여전히 따분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좀 평온하게 살자.’

    장서열은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게 귀찮았다. 마치 정치적으로 치열한 싸움을 일삼는 조정 대신들처럼 굳이 자신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도 않았다. 이쯤 되자 그녀는 다른 사람보다 명석한 두뇌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주 재인, 어찌 본궁의 말에 대답이 없는 것이냐? 모친이 보고 싶지 않아진 것이냐, 아니면 본궁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냐?”

    주방비는 자신이 황후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황후는 지금 기분이 나쁜 것이다.

    주방비는 자신이 고른 시간이 문제가 되었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황후가 공주를 출산한 지 벌써 두 달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황제는 지금껏 다른 후궁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지경이라면 앞으로 궁에서 얼마나 많은 세월을 더 허비해야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주방비는 최근 황후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갖다 바치며 몇 번이나 순종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황후는 황제를 내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주방비가 살길을 모색하려 든 것도 당연했다.

    장서열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그녀는 주방비가 옆에서 자꾸만 자신을 공략하려 드는 것이 매우 성가셨다. 황제를 유혹하고 싶다면 직접 당사자를 찾아가야 했다. 어차피 그녀에게는 관여할 힘이 없었다.

    장서열은 주방비가 제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주길 바랐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주 재인이 조로전으로 돌아오는 구염락을 기다리다가 물에 빠지든, 춤을 추든, 심지어 목숨을 던진대도 전혀 상관없었다.

    누구든 황제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름 재능이 있는 축에 속했다. 종일 황후를 붙들고 애걸복걸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약 장서열이 후궁들을 한 번 살펴보라고 입을 열었다가는 미친 듯이 화를 내는 구염락을 달래야 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헌데 사람을 잘못 찾고도 뉘우쳐 마음을 고쳐먹기는커녕 이렇게 매일같이 찾아오다니. 이건 황후의 비위를 거스르기 위함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시간에 찾아오는 건, 주방비가 감히 황제와 눈을 맞출 수 있는 담력이 있는지 황후더러 감상이라도 해 달라는 뜻과 다름없었다.

    장서열이 잔을 내려놓았다. 주 재인은 정말로 다른 사람들을 모두 바보로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위해 황제를 향한 길이라도 닦아 주고, 그녀의 꿍꿍이를 못 본 척해 주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주방비의 비위를 맞춰 줘야 할 사람이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저 비아냥거리는 말 몇 마디만 던져 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장서열은 굳이 자신의 목적을 숨기지도 않는 여인의 체면을 살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주 재인, 어떻게 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면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보고, 생각이 정리가 되면 사람을 보내 본궁에게 전달하도록 하라. 본궁도 주 재인이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뵙는 문제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이만 물러가라.”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바라본 주방비는 계획대로 조금 더 머물다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을 때 자신을 업신여기며 비웃는 황후의 얼굴을 보자 놀라서 감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반드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빨리 황제를 만나야 했다. 실패하면 황후는 분명 자신을 철저하게 괴롭힐 기회를 노릴 것이다.

    주방비는 감히 더 머물지 못하고 서둘러 작별을 고했다.

    대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왕 마마는 주 재인이 끝났다는 걸 직감했다. 오늘 이후로는 언제나 손에 선물을 든 채, 사방팔방 스스로를 똑똑하다 떠벌리던 여인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황후의 수단은 과연 훌륭했다. 지금쯤 주 재인은 한시라도 바삐 황제의 얼굴을 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황제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진정으로 목숨을 구하는 길임은 모르고 있었다.

    만약 주 재인이 조로전을 나서다 어떤 식으로든 우연히 황제를 마주치게 된다면, 오히려 황제는 이 알 수 없는 여인의 속내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여인이 황후를 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아주 강력한 망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심지어 황제는 얼마 전에도 뜬금없이 조용히 살고 있는 권 비를 불러 한바탕 큰소리를 냈다. 대체 황제가 꿈이라도 꾼 것인지, 그게 무슨 꿈인지는 오직 하늘만이 알았다. 그렇게 그는 권 비를 더 깊숙이 숨게 만들었다.

    그런 황제가 미인을 보고 마음이 동할 거라 믿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황제의 곁에 있는 황후가 음흉한 속내를 가졌다고 믿는 게 더 그럴듯했다.

    * * *

    조로전을 나선 주방비는 모든 이들의 예상대로 단념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서산으로 기우는 해와 조로전 밖으로 하나둘씩 켜지는 등불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완여가 주인을 바라보았다.

    “재인마마, 저희는…….”

    주 재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 이건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우리에게 더는 희망이 없어. 이미 황후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당장 나를 벌하기 위해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그러나 황후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황제의 눈에 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주방비는 황제가 분명 자신을 소중히 여겨 주고, 더는 황후에게 현혹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결심을 굳힌 주방비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조금 전 눈물을 흘렸던 얼굴을 두드리며 그녀가 마음을 가다듬었다.

    “장명쇄를 꺼내 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주 재인이 장명쇄를 꽉 쥐는 것과 동시에 완여는 멀리서 등불을 밝힌 무리가 오는 모습을 보았다.

    “재인마마, 재인마마! 보세요. 폐하께서 오시는 게 아닐까요?”

    등불이 다가오자 주방비는 조금 전 굳게 먹은 마음과 달리 조금씩 긴장이 되는 걸 느꼈다.

    ‘정말 폐하께서 오시는 걸까?’

    장명쇄를 든 주방비는 자기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드디어 억울한 심정을 토로할 상대를 만난 것이다.

    주방비는 진심을 다해 울었다. 억울함이 가득한 얼굴에서는 조금의 거짓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런 꾸밈 없이 천진한 소녀의 눈물은 하늘에 걸린 마지막 햇빛처럼 처량했다.

    고개 숙인 주방비는 이를 악문 채 황제와 마주치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가장 먼저 그녀를 발견한 건 소리자였다. 조로전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선 주방비는 황제의 행렬을 본 후 급히 한쪽으로 물러가 바닥에 꿇어앉았다. 황제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소리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번 일 이후, 이제는 어떠한 후궁도 생각 없이 폐하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지 않을 줄 알았다.

    소리자는 감히 도박을 할 수 없었다. 최근 호국의 사절단을 만난 황제는 더욱 성격이 포악해져 사방으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감히 일 처리가 순조롭지 못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소리자는 즉시 사람을 보내 대체 얼마나 생각이 없는 후궁인지부터 먼저 알아보았다. 곧 돌아온 하인이 보고한 바에 의하면 여인은 조금 전 조로전에서 나온 후궁으로, 급히 발걸음을 돌려 황제를 피하려 했으나 미처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고 했다.

    소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이라면 다행이었다. 황후마마께서 이 시간에 내보내신 것으로 보아 그래도 사리분별은 하는 후궁인 모양이었다. 소리자는 더는 생각지 않고 행렬을 이끈 채 계속 앞으로 향했다.

    행렬이 주 재인 옆을 지나갔다. 주 재인은 빛을 등지고 있었고, 황제는 가마 위에 앉아 있었기에 일부러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길가에 누가 있는지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녀를 보지 못했다는 듯, 그는 손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귀찮게 하지 말라는 얼굴로 이들을 지나쳤다.

    댕!

    갑자기 금속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주 재인은 놀란 척 잠시 멍하니 있다가 즉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신첩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의 행차를 방해하였으니 신첩은 죽어 마땅합니다!”

    구염락이 냉혹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누군가를 불렀다.

    “소리자, 저 계집의 소원대로 해 주거라. 당장 끌고 가서 없애라!”

    소리자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특히나 요즘 황제는 마음속 분노를 꾹꾹 억누르고 있었다. 호국이 나라를 물어뜯자고 달려드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황제가 일개 비빈을 신경 쓸 리 만무했다.

    “예,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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