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338)화 (338/449)
  • 제338화

    길게 이어진 황궁은 담벼락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어 외부인의 시선과 정탐으로부터 보호 받았다.

    궁에서 가장 화려한 전각 안, 통통한 태자가 짧고 굵은 다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이동생의 요람 앞에 엎드린 그가 요람 안의 아기를 잡아당겼다.

    “안아 볼래, 안아 볼래……!”

    작은 요람을 밀어 주며 유모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아직 어리셔서 공주 아기씨를 안을 수가 없습니다. 더 크시거든 실컷 안아 주십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공주의 체중은 벌써부터 태자의 절반에 달했다. 훗날 태자가 안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구염황은 행동을 통해 실망스러운 마음을 표했다. 누이동생을 보며 못내 아쉽다는 듯 몸을 돌린 그는 수를 놓고 있는 모후를 찾으러 가다가 몇 걸음 못 가 다시 누이동생에게 돌아왔다. 구염황은 미련이 남은 눈길로 요람 옆에 엎드려 계속해 누이동생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작은 손을 내밀어 누이동생을 찔러 본 그가 동생의 유모에게 히히 웃어 보였다. 유모가 웃는 얼굴로 태자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벌써부터 이리 누이동생을 어여삐 여기시니, 장래에 분명 좋은 오라버니가 되실 겁니다.”

    구염황은 새로 획득한 신분에 매우 적응을 잘 마친 상태였다. 지금 그에게 자신보다 어리면서 통통하기 이를 데 없는 누이동생보다 더 재밌는 것은 없었다.

    바늘로 단추를 달고 있던 장서열이 멀지 않은 곳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애 좋은 아이들의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황아, 누이동생의 얼굴을 찌르면 안 돼. 동생이 아파할 수도 있단다.”

    구염황은 아플 수도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방법대로 누이동생에 대한 호감과 진심을 표현했다. 이를테면 찔러 보거나 쓰다듬어 주는 행동으로. 특히 누이동생의 부드러운 얼굴을 쓰다듬을 때마다 구염황은 너무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젊은 유모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태자 전하의 손을 주시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태자가 공주의 부드러운 얼굴을 힘껏 찔러 빨갛게 변하는 일이 없도록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았다. 그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던 그녀는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태자의 유모를 노려보곤 했다.

    별다른 도리가 없는 건 태자의 유모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애써 웃어 보였다. 태자가 누이동생을 좋아한다는데, 하인들 중 누가 감히 그를 막을 수 있겠는가. 하인들은 그저 지켜만 볼 뿐 절대 문제를 일으킬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비단 공주의 유모 한 사람만 곤란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속옷을 완성한 장서열이 아들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요람 앞에 엎드려 상아를 바라보는 황아의 모습에 장서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속으로 구염락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빨리 구염황을 독립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계속 이렇게 지내다 보면 태자는 여인이나 아이하고만 어울리고 싶어 하는 나쁜 버릇이 생길 것이다.

    한 걸음 다가온 왕 마마가 황후를 일으켜 세웠다. 장서열은 금테가 둘러진 옅은 보랏빛 겉옷에 여러 겹의 주름이 잡힌 보라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흡사 바다 물결이 일렁이는 듯한 자태가 드러났다.

    장서열은 일부러 엄격한 척 아들을 쳐다보았다.

    “태자, 어미가 말했지요. 그렇게 누이동생을 계속 괴롭히면 동생은 앞으로 오라버니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구염황이 우물쭈물하며 반박했다.

    “좋아해… 좋아해요…….”

    아들의 간절한 모습을 보자 장서열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일부러 아들을 놀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니? 만일 안 좋아하면요?”

    억울한 듯 작은 얼굴을 찌푸리는 아이는 너무나 불쌍해 보였다. 구염황이 입을 씰룩거렸다.

    “누이… 좋아해……!”

    그때, 주렴을 젖힌 농교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아들에게 장난을 치는 주인의 악취미까지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한 채, 그녀가 예를 갖추며 말했다.

    “황후마마, 주 재인마마가 와 있습니다.”

    장서열이 아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바깥 하늘을 한 번 바라본 그녀의 입가가 경미하게 올라갔다.

    “경솔하구나.”

    농교와 왕 마마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 모두 황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 황후를 만나러 와서 차를 홀짝이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연스레 황제를 만날 가능성이 생긴다. 요 며칠 유독 아슬아슬하던 주 재인의 행실이 결국 이렇게 터지는 모양이었다.

    “그럼 마마… 들라 해야 할까요?”

    쪼그려 앉은 장서열이 태자의 옷매무새를 만져 주며 말했다.

    “들지 못하게 할 이유도 없지. 들라 하라!”

    장서열은 주 재인을 다시 상대하기 귀찮았지만 기왕 온 거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만약 문을 나설 때까지 황제를 마주치지 못하면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다 끝내 문밖에서라도 마주칠 위인이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이런저런 구실로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테고, 더 볼 일도 없을 것이다.

    몸을 일으킨 장서열이 구염황을 향해 부드럽게 당부했다.

    “아드님, 이 어미는 요 앞에서 일을 좀 처리하고 올 테니 여기서 누이동생이랑 놀고 계세요.”

    구염황이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서열은 참지 못하고 다시 구염황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착하지. 사내대장부는 쉽게 울지 않는 법이란다. 네가 잘해 주면 누이동생이 오라버니를 좋아하지 누굴 좋아하겠니. 울어서 코가 다 빨개지다니, 이러면 누이동생이 정말 오라버니를 싫어할지도 몰라.”

    구염황은 즉시 울음을 그쳤다.

    “동생은 울지 않는 오라버니를 좋아한단다.”

    “맞습니다, 맞아요.”

    이어 농교와 왕 마마는 황후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 * *

    주방비는 있는 힘껏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은 아직 아이를 낳아 길러 보지 않아서인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듯했다.

    이러한 귀염성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주방비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에 몰두했다. 다른 이들이 그녀를 보며 수줍음이 많고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외모라고 느끼도록, 그리하여 누구든 자신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대갓집 규수라고 여기게끔 만들기 위해서였다.

    연분홍빛으로 단장한 소녀 주 재인은 옅은 보랏빛에 둘러싸인 황후가 나오는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란 눈을 애써 감추려 했다.

    주 재인은 얼른 마음을 추슬렀다. 황후가 제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어차피 황제야 질리도록 자주 본 모습이었다. 게다가 아이를 둘씩이나 낳은 여인에게 황제가 더 이상 신선함을 느낄 리 만무했다.

    주방비가 바로 예를 갖추었다.

    “신첩,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황후마마, 천세 천세 천천세.”

    “일어나라.”

    완정의 손에 든 차를 거절한 장서열이 과즙을 내오라는 손짓을 했다. 완정이 물러난 후 자리에 앉은 주방비의 첫 마디는 예상한 그대로였다.

    “마마, 공주께서는 주무시는지요? 신첩이 입궁할 때, 사가의 어머니께서 신첩을 위해 장명쇄長命鎖(어린 아이의 장수를 빌어주는 자물쇠 모양의 목걸이) 하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신첩, 공주 아기씨를 뵙고 너무 기뻤기에 마마께서 윤허만 해 주신다면 이 장명쇄를 공주께 드리고 싶습니다.”

    완여에게 앞으로 나오라 손짓한 주방비가 ‘길상여의吉祥如意(매사가 상서롭고 뜻하는 바와 같이 되다)’가 새겨진 금쇄를 꺼냈다. 순금의 가장자리에는 구름과 물결무늬가 상감되어 있었고, 꼬리 부분에는 공들여 묶은 듯한 금술이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금술은 마치 비단실처럼 정교한 세공과 금빛이 도드라졌다.

    장서열은 단번에 이것이 좋은 물건임을 알아보았다. 지난번 옥산호가 별 가치도 없어 보일 만큼 뛰어난 물건이었다. 언뜻 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장명쇄는 사용한 재료부터 기술까지 많은 공을 들여 만든 것으로 부귀한 가문에서 과연 최고로 칠 만했다.

    본래 작은 일에 사활을 걸고, 별것도 아닌 일에 이치를 담으려 드는 것이 바로 세도가의 특기가 아니던가.

    길함을 상징하는 장명쇄는 교차하는 구름과 물, 그리고 금술 아래 달린 진주와 옥을 통해 아이에게 복과 행운을 빌어 주었다. 그 속에 담긴 노고 때문에라도 아이를 가진 어미라면 모두 좋아할 만한 선물이었다.

    황후가 보내는 눈길을 눈치챈 주방비가 즉시 말을 이었다.

    “이 장명쇄는 완성된 뒤 국사의 방장方丈(주지나 고승)을 청하여 불공 의식까지 드린 물건으로, 공주께서 복과 장수를 누리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불공 의식까지 드렸다니 더 좋은 물건이겠군.’

    국사의 고승은 이미 몇 년 전 입적했으니, 이제는 같은 조건으로 만들어진 금쇄가 있다 해도 불공을 드려 줄 방장을 청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눈앞에 놓인 이 장명쇄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물건이었다.

    “그렇게 귀중한 것이라니 본궁은 받을 수가 없구나. 그냥 가지고 돌아가 감상하도록 하거라. 자네의 모친께서는 딸이 평안하고 안정적인 일생을 보내기를 기원하셨을 터, 귀한 물건을 주고받다 보면 복이 달아날 것이다.”

    장서열은 이를 고이 가지고 있다 훗날 너의 아이들에게 주라는 인사치레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아냥거리거나 나무람 없이 몇 마디 말로 주 재인의 정곡을 찔렀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주인의 모습에 왕 마마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줄곧 온화하던 황후가 공격을 가하는 모습은 놀라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통쾌했다. 감히 마마의 아이에게 손을 대려 하다니, 어찌 반감을 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방비의 안색이 즉시 어두워졌다. 특히 황후의 마지막 말에 깊은 상처를 받은 듯했다. 충격을 받은 그녀는 살짝 빨개진 눈으로 순간 고개를 떨구었다. 누가 봐도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었다.

    주방비는 정말로 억울했다. 분명 좋은 마음으로 가져온 것이다. 이 장명쇄는 어머니가 훗날 그녀의 아이들을 위해 복을 빌어준 것으로 어디서 구하기도 힘든 좋은 물건이었다.

    그런 귀중품을 기꺼이 내놓았는데, 싫으면 그만이지 황후는 대체 왜 복이 사라지네 마네 불길한 소리를 하는 걸까?

    과즙을 마시던 장서열은 아래에 앉아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주방비의 모습이 지루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걸핏하면 훌쩍거리고, 스스로를 총명하다 착각할 뿐만 아니라 억울한 건 손톱만큼도 참지 못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건 참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일부러 멍청한 척을 하는 걸까. 장서열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잔을 내려놓은 장서열이 은혜를 베푼다는 마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주 재인, 안색이 나쁘구나. 설마 장명쇄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마치 오는 길에 물건이 망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몹시도 슬퍼하는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