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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37)화 (337/449)

제337화

젊은 자신의 얼굴에서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느낀 그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그 여인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깨워 주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그 해괴한 아침을 생각하면 그는 지금도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그게 뭐가 어떻다는 거지? 그 여인은 서열이야… 서열이라고! 설마 어렸을 때부터 쌓아 온 정은 다 잊은 거야?”

대단한 우스갯소리를 들은 듯 나이 든 구염락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쌓아 온 정?

“폐후가 나에게 무슨 정이 있다는 거지? 아무래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나 보군……. 어린아이의 뺨을 두 대씩이나 갈긴 것도 정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그대에게 그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어.”

“구염락! 사람이라면 마땅히 은혜를 알아야 해!”

“은혜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게 어디서 감히!”

젊은 구염락은 자신이 어쩌다가 이런 모습으로 나이를 먹었는지 한탄스러웠다. 구염락이 천천히 감정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곁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은 소녀를 잊다니……! 그녀가 아니었다면 지금 당신이 무슨 수로 여기서 위세를 떨칠 수 있지?”

순간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나이 든 구염락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래에 앉아 있던 구염락은 갑자기 기억 속에 무엇인가 침입한 듯, 위에 앉은 이의 과거가 하나씩 머릿속에 펼쳐지는 걸 느꼈다. 분명 직접 겪은 양 생생한 기억이었으나 그곳에 고결하고 도도한 서열 누님의 존재는 없었다. 그저 수많은 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자신의 모습만이 남아 있을 뿐.

기억 속 그의 자아는 모진 핍박 속에서도 쉬지 않고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는 스스로에게 가장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뒤, 구염락은 위에 앉아있는 이를 바라보며 돌연 자신이 지닌 기억을 펼쳐 놓았다. 그는 확실히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지만 그 뒤를 이은 건 차가운 냉소였다.

“…역시 셈이 빠른 여인이군. 그리 악랄한 속내를 감춘 채 신중하고 노련하게 행동하다니.”

분노한 구염락이 순간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던 순간, 불현듯 깜짝 놀란 소리자가 즉시 황제를 부축했다.

“폐하, 폐하! 왜 그러십니까? 악몽을 꾸셨습니까? 이만 들어가서 주무시지요.”

소리자가 걱정스런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며 구염락이 주위를 둘려보았다. 거대한 비조백봉도가 내뿜는 다채로운 빛깔이 반짝거렸다. 그 앞에 놓인 연탑은 장서열이 휴식을 위해 가장 자주 찾는 곳이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구염락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술이 절반 정도 깬 듯했다.

“…물을 준비하라. 목욕을 할 것이다.”

또 생생한 꿈을 꾸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더욱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이상한 자신을 만나다니.

하지만 꿈속의 서열이는 분명 너무나 자신을 사랑했다.

구염락은 상대와 자신의 기억이 완전히 다르다는 게 이상했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아낌없이 사랑하던 장서열의 모습에 큰 기쁨을 느꼈다.

목욕을 마친 뒤 만족스럽게 침대로 걸어간 구염락이 잠들어 있는 여인을 품에 안으며 참을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나야… 자자.”

구염락은 인기척을 느낀 장서열이 다시 잠이 들도록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달래 주었다.

* * *

깊은 가을, 누렇게 변한 대지 위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은 날씨였다.

허름한 도방賭房 문 밖으로 남루한 옷차림을 한 남자가 내던져졌다.

“꺼져! 은자가 없으면 들어오지 말라고!”

남자가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큰 키에 마른 남자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굳게 닫힌 문에 삿대질을 하며 몇 마디 욕지거리를 중얼거린 그가 달갑지 않은 얼굴로 옷소매를 비비며 자리를 떠났다.

“네까짓 것들이 감히! 이 나라의 태자와 공주를 낳은 게 바로 내 딸이다! 나는 국장이자 태자의 외조부다! 이 늙은이가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 날 다들 발을 핥으며 굽신거릴 것들이! 그때도 이 몸을 탐탁잖아 하는지 어디 두고 보자!”

장신성은 계속해 중얼대며 욕설을 내뱉었다. 군데군데 천을 덧댄 옷은 추위를 피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바람이 불자 장신성은 몸을 웅크리며 걸치고 있는 얇은 옷을 꽉 여몄다.

몇 년 전, 장신성은 뇌물을 받은 죄로 관직을 잃었다. 집에서 빈둥거리는 처지가 된 그는 이제 재기하려는 야심마저 사라진 상태였다.

그 역시 다시 벼슬길에 올라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생각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재기하려는 시도가 번번이 실패하자 장신성은 의기소침해졌고, 결국 헛된 꿈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장신성은 매일 먹고 마시며 은자를 탕진했다. 그는 별 볼 일 없는 7품 관직에 안주하는 생활을 일삼았다. 하지만 이 마지막 사치조차 사라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장신성은 그제야 깨달았다. 황제는 장인의 7품 관직을 유지시켜 줄 생각도, 죽을 때까지 그럭저럭 입에 풀칠을 하게 해 줄 생각도, 그리하여 황후의 체면치레를 해 줄 생각도 전혀 없었다.

덕분에 장신성에게는 마지막 체면조차 남지 않았다. 그는 이제 빈털터리 늙은이일 뿐이었다. 매일 빚 독촉을 당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도망쳐 버린 처첩들을 거느렸던 늙은이.

심지어 장신성은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황후의 부친이라 거들먹거릴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 황실 외척 사칭죄로 감옥에 갇힌 적이 있기 때문이다.

관아에서는 끌려온 죄인에게 어떠한 것도 묻지 않고 즉시 고문을 시작했다. 같은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장신성은 두려워졌고, 결국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했다. 그 뒤로는 빌려준 은자를 받지 못해 그를 죽이려 드는 빚쟁이들을 겁주기 위하여 명문가에 시집간 딸이 있다고 큰소리를 칠 뿐이었다.

다시 한번 얇은 옷을 꽉 여민 장신성이 좁고 지저분한 길을 지나 낡은 사찰 안으로 몸을 숨겼다. 새로 들어온 거지를 멀리 쫓아 보낸 그가 입구 쪽에 자리를 잡고 잘 준비를 하던 때였다.

“비켜! 비키라고! 눈이 먼 게야? 이 형님이 지나가시는 거 안 보여?”

장신성은 발에 차여 한쪽으로 쫓겨났다. 급히 고개와 허리를 숙인 그가 큰형님이 들어가도록 몸을 더욱 움츠렸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 몸을 움츠린 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장신성은 나라를 다스릴 만한 인재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과거 장원급제를 했던 몸이기에 글씨에 일가견이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된 마당에야 더는 창피할 일도 없었다.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장신성이 이마저도 포기했다는 데 있었다. 몇 푼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해 저속한 것들이 자신의 글자를 따지듯 고르고, 결국 헐값에 사 가는 꼴을 견디느니 차라리 돈을 벌지 않는 편이 나았다. 장신성은 그저 먹고 마시며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장서양은 아버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차츰 아버지와 왕래하지 않게 되었다. 어리석은 유년 시절을 반성한 장서양은 뱃사공 일에 음식을 나르는 일까지 닥치는 대로 하며 돈을 벌었다.

현재 장서양은 보잘것없는 찻집에서 이야기꾼을 위해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쓰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매달 조금씩 여윳돈도 생길 정도가 되었다.

물론 장서양에게도 어머니와 아우를 구제할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좋지 않은 결과를 마주한 후 그는 가족이라도 서로 만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들은 장서양의 앞에서는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친 척 불쌍한 얼굴로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갔다.

장서양은 계속 이럴 바에야 차라리 가족을 안 만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쓸 돈이 없으면 나쁜 짓도 못 할 테니까.

지금 장서양은 값싼 먹물을 갈고 있었다. 쉬지 않고 글자를 쓰느라 손목이 아팠던 탓에 요즘은 먹을 가는 동작마저 불편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장서양은 멈추지 않았다. 몇 장을 더 쓰면 그만큼 몇 푼이라도 더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누이동생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던 장서양은 버는 족족 단 몇 푼이나마 누이동생에게 돈을 보내 주었다. 과거 가족들이 끝없이 욕심을 부리며 방해하는 바람에 누이동생은 끝내 남편의 총애마저 잃게 되었다. 지금은 십중팔구 자신보다 더 힘든 생활을 하고 있을 터였다.

장서양은 좋은 가문의 정실부인으로 시집갈 수 있었던 누이동생의 과거를 떠올렸다. 그런 누이동생을 기어코 첩실로 팔아 버린 건 바로 자신이었다. 당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며 누이동생을 몰아붙였던 그는 심지어 말끝마다 ‘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지금 누이동생은 중병을 앓고 있어 집 밖으로 나갈 수도, 가족들을 만날 수도 없었다. 이 사실만 생각하면 장서양은 견딜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남자에게서 얼마 안 되는 ‘영광’을 얻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아우는 여전히 기생집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토록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연경 바닥에서 한바탕 소동을 피우는 바람에 누이동생의 처지는 더욱 곤란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큰오라버니인 장서양이 무슨 면목으로 누이동생을 만나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겠는가. 가족들만 아니었다면 누이동생은 조 부인 옆에 남아 예정대로 좋은 혼처에 시집을 갔을 것이다. 지금처럼 아프고 괴로워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리라.

장서양이 다시 붓을 들었다. 천으로 덧댄 소매를 걷어 올린 그가 손목을 세우고 급히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누이동생에게 의원을 보내 줄 생각이었다.

서영이는 과로로 병이 들었다고 했다. 병세가 쉽사리 낫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역시 힘이 없는 약자들은 추악한 대저택에서 살아남기가 여긴 힘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장서영이 시집을 간 관씨 가문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관리 가문인 덕분에 없는 게 없을 정도로 풍족한 생활을 누렸으나, 정작 집안의 첩실은 과로하여 병을 얻게 만들었다. 직접 보지 않았어도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눈에 선했다.

과거 조 부인은 일개 첩실의 자식에게까지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해 주었다. 그런데도 세 남매는 나쁜 마음을 품었다. 장서양은 이런 비참한 말로를 원망할 수가 없었다. 자업자득이었다.

“캑캑! 콜록…….”

기침이 터져 나오자 장서양이 얼른 찬물을 들이켰다. 물이 목구멍을 간질이며 내려갔다. 손목이 안정되는 걸 느낀 그가 격한 감정에 북받쳐 글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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