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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36)화 (336/449)
  • 제336화

    더 이상 무리하지 않기로 한 장서열이 섭궁개의 며느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 역시 감히 많은 말을 하지 못한 채 큰 눈을 반짝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멈추곤 했다. 이는 혹시라도 그릇된 말을 할까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던 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마는 아이와 같았기에 장서열은 계속해 그녀를 격려해 주었다. 섭궁개의 며느리를 붙잡고 잠시 이야기를 나눈 장서열은 권 소부인에게 준 것과 마찬가지로 상을 내렸다.

    정서열은 새로운 세대의 세도가들과 얼굴을 익혔다. 공주가 잠에서 깨어나자 형식적으로 안고 나와 사람들에게 보여 준 장서열이 바로 아이를 안고 다시 들어갔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공주를 칭찬했다. 귀족들은 그렇게 평온하고 순조롭게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부인들이 물러간 후에야 비로소 장서열은 피곤함을 느꼈다. 세수도 하고 배도 채우고 싶었지만 먼저 조금이나마 쉬고 싶었다. 휴식을 취하기 전, 장서열은 습관처럼 병풍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떨어져 있는 딸아이를 보러 갔다.

    구염상은 유달리 순했다. 칭얼대기를 좋아하는 오라버니와 달리 상아는 먹고 마시는 것 외에는 좀처럼 울지 않았다. 아이는 대부분 자고 있었으나 가끔 깨어났을 때조차 순했다. 몽롱한 봉안鳳眼(봉황의 눈같이 가늘고 길며 눈초리가 위로 째지고 붉은 기운이 있는 눈)을 깜빡이는 모습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생후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얼굴은 제법 포동포동했다. 작은 손과 발은 빠른 속도로 오라버니를 앞지르며 통통하고 평안한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쯤 되자 장서열은 상아가 너무 뚱뚱한 건 아닌지 계속해 걱정해야 했다. 심지어 소아에 능한 호 태의조차 최근에는 공주의 체중에 대하여 약간의 조언을 해 주기도 했다.

    호 태의가 말한 완곡한 제안을 떠올린 장서열이 다시금 포동포동한 딸을 바라보았다. 코를 짓누른 뺨은 꼭 작은 돼지 같았다.

    장서열이 딸의 작은 이마를 콕콕 눌렀다. 손바닥 반만 한 얼굴이 낑낑대며 자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아야, 내일부터 조금만 먹자꾸나. 안 그러면 이 어마마마가 너를 안아줄 수가 없단다.”

    당부를 마친 장서열은 이윽고 몸을 돌리고 돌아가 쉬었다.

    * * *

    땅거미가 내린 후에도 전전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하례賀禮는 저녁까지 시끌벅적해야만 비로소 크게 축하했다 말할 수 있었다. 공주를 위해 마련한 연회가 끝날 때쯤 밤은 이미 깊어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구염락은 과음한 것이 분명했다. 흔들거리며 조로전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기둥에 부딪친 구염락을 보며 주위 사람들이 혼비백산했다. 사람들의 걱정 속에서 그가 잠시 정신을 차렸다.

    “황…후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낀 구염락은 가까운 의자를 잡고 앉아 조용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무의식 중에 통제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렸을 때에는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마에 통증을 느끼며 지금은 움직이지 않는 편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소리자는 주인이 침착하게 이마를 받친 채 최대한 위엄을 발산하는 모습을 보았다.

    ‘다행이군, 다행이야.’

    소리자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는 황제가 움직이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폐하께 드릴 수건을 가지고 올 테니, 그동안 혜령 자네가 폐하를 살펴드리게.”

    이어 완정이 예를 갖추어 말했다.

    “폐하, 황후마마께서는 부인들을 맞이한 뒤 기력을 소진한 탓에 일찍 침소에 드셨습니다.”

    잠시 기다리던 완정은 황제가 오래도록 별다른 지시를 하지 않자 혜령을 한 번 쳐다본 뒤, 황제에게 올릴 차를 따르러 갔다.

    구염락은 약간의 두통을 느꼈다. 눈을 감은 그는 이마를 받친 채 지금 느껴지는 이 불편한 느낌이 해소되기를 기다렸다. 그는 손에 쥐여진 차가운 수건을 얼굴에 덮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염락은 오늘 특히 기뻤다. 그는 이제 아들과 딸이 있는 사람이었다. 바라던 모든 것을 얻은 기쁨에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신하들이 권하는 술을 연거푸 더 마셨다.

    향기로운 차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구염락은 이마를 받친 그 모습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인들 역시 감히 주인을 방해하지 못했다.

    소리자를 바라본 완정이 손짓을 했다. 황후를 깨워 황제를 부축해 들어가라고 해야 할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소리자가 황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황후마마 역시 하루 종일 피곤했을 터였다. 괜히 깨웠다가 후에 황후를 귀찮게 했다고 황제에게 질책을 당하느니 차라리 지금 황제가 밤새 여기 앉아있는 편이 더 나았다.

    이미 한 차례 주인에게 벌을 받은 전력이 있는 소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황후의 측근 시녀인 완정이 황후를 중시 여기는 건 두말 할 나위가 없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씩 조용해지는 대전 너머 나뭇가지 끝으로 달빛이 걸렸다. 오늘밤 당직이 아니었던 혜령은 일을 끝마칠 시간이 다가오자 초조함을 느꼈다. 얼른 물러가서 쉬어야 내일도 폐하를 모실 수 있는 기운을 보충할 것이 아닌가.

    밤은 점점 더 깊어 갔다. 소리자와 조로전의 하인들은 공손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창밖에는 바람이, 향로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퍼지고 있었으나 조로전 안은 아무 소리도 없이 마냥 고요했다.

    심신을 안정시켜 주는 따뜻한 향기가 흘러들었다. 의자에 앉은 구염락은 나른하게 잠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몽롱한 의식 가운데 누군가 조로전의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금황색 용포를 입은, 강인하지만 매정해 보이는 얼굴. 온몸으로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 그의 뒤에는 시중을 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걸음걸음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멸시를 표하며, 그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구염락의 미간이 약간 일그러졌다. 구염락은 명백히 그를 싫어하고 있었다.

    “또 너인가?”

    자못 짜증나는 말투였다. 구염락은 이 남자가 싫었다. 심지어 그가 바로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나이 많은 ‘그’도 깜짝 놀랐다. 조금 전 폐후의 죽음을 접한 ‘그’는 심지어 폐후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그녀에 대한 인상이 흐릿했다.

    그저 잠시라도 조용히 있고 싶었다. 하지만 확실히 자신 같지 않은, 심지어 곤드레만드레 취한 젊은 자신을 보니 반감이 들었다. 평생 후회 없이, 반평생을 전쟁터에 나가 용맹하게 싸워 온 자신이 인기척도 없는 이 깊은 밤에 인사불성으로 취하여 의자에 틀어박혀 있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이 자다가 죽을지언정 이렇게 제멋대로 술에 취한 모습은 꿈에서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나마 의자에 앉아 자는 바람에 체통을 완전히 깎아 먹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한편, 술에 취한 청년 구염락은 나이 많은 구염락이 마치 뱀처럼 징그러운 물건을 보듯 계속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

    어린 구염락일지언정 어찌 성정이 호락호락하겠는가. 제왕으로서의 위엄은 젊은 구염락 역시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속에서 경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한 냉정하고 거만한 눈빛은 동정해 주는 것조차 아까울 지경이었다. 구염락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딸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되는 기쁜 날이라 몇 잔 더 마셨지. 그러는 당신은 이 야심한 시각에 어찌 혼자 있는 것이지? 설마 너무 많은 악행을 저지른 탓에 독수공방하게 된 건가?”

    나이 든 구염락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조금 전 얼핏 보인 젊은이의 건방진 모습에 약간의 만족을 느꼈다.

    “군식구가 늘어 맛도 없는 술이나 몇 잔 대접한 것뿐인데 뭐가 그리 기쁘다고 이렇게까지 과음을 했는지 궁금하군.”

    구염락은 감히 딸의 만월연滿月宴을 무시하는 저 냉혹한 얼굴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술맛도 몰라 그런지 당신은 좀처럼 인간미가 없어. 누군가 취한 것까지도 거슬려 어쩔 줄을 모르다니 참으로 슬픈 일이야.”

    구염락은 나이 든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에 원래 있어야 할 비조백봉도(새와 하얀 봉황아 날아다니는 그림)가 아닌, 맹호하산도(호랑이가 산을 내려오는 그림)가 걸려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앞에 놓여 있어야 할 연탑 역시 용안龍案으로 바뀌어 있었다.

    구염락이 힘껏 이마를 문질렀다. 아직 술이 덜 깬 모양이었다.

    “그대처럼 한심한 모습을 보일 바에야 인간미 따위는 없는 것이 낫다.”

    그 말을 들은 구염락의 입꼬리가 경멸하듯 올라갔다.

    “그럼 그리 외롭게 살다 죽으면 되겠군.”

    나이 든 구염락이 젊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독설을 퍼붓는 순간만큼은 영락없는 구염락 자신이었다. 젊은 구염락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부심이 컸고, 또한 스스로를 굳게 믿었다.

    나무문이 열렸다. 양쪽 귀밑머리가 하얗게 센 소리자가 공손한 태도로 걸어 들어왔다. 곁에 있는 젊은 구염락은 보지 못한 듯,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냉궁에서 폐후 장 씨의 장례를 어찌 치러야 할지 여쭙고 있습니다.”

    담담한 말투로 답하는 구염락에게서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개 폐서인의 일까지 짐에게 물어보는 것이냐?”

    소리자는 그저 형식적인 절차를 밟으러 왔을 뿐, 이미 황제의 심드렁한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감히 입을 열 생각조차 없이 소리자가 공손하게 물러갔다. 아래쪽에 앉은 젊은 황제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였다.

    나이 든 구염락은 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한가하게 감정놀음에 빠져 있는, 어리고 역겨운 자신이 나타났을 리 없었다.

    한편, 구염락은 ‘폐후 장 씨’라는 말에 즉시 몸이 굳었다.

    “지금 누구를 말하는 것이지? 누가 폐후라고?”

    그에게 황후라고는 오직 장서열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폐위라니? 지금 당장 죽여도 속이 시원찮을 이 빌어먹을 작자가 대체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나이 든 구염락은 어린 자신보다도 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상대 역시 자신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한참을 곰곰이 생각한 그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짐도 가물가물해. 여아가 죽었을 때 기쁘다며 화려한 옷을 차려입었던 여인이지.”

    그는 있는 그대로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그에게 장서열은 성가시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권여아? 그 계집이 죽은 게 뭐가 어때서! 그게 서열이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폐후라니……. 폐후라니!

    장서열 말고는 아무도 자신의 여인일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이 든 그는 서열이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한 듯했다. 구염락은 당장이라도 그를 시궁창에 처넣어 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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