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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35)화 (335/449)

제335화

고개를 든 헌원상이 위로하는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군자로서 규율을 지켜야 했기에 곧 웃음을 거뒀다.

“아버님, 저는 그들과 지내는 일 년 동안 식견을 많이 넓혔습니다. 대주국이 얼마나 넓고 물자가 풍부한지, 얼마나 많은 풍습이 있는지도 배웠습니다. 그들 모두가 좋은 스승이기에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것도 제게는 영광입니다. 학식에 귀천이 없고 배움에 출신이 없다는 건 모두 아버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

“아버님, 걱정 마십시오. 자포자기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아버님의 말씀대로 언젠가 폐하께서 저의 출신을 묻지 않으실 때, 혹시라도 제가 스스로 벼슬길을 막아 버린다면 아버님과 폐하 모두 낙심하시지 않겠습니까.”

헌원오마는 감탄 외에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이치에 밝은 아들이라니. 탓해야 하는 건 오로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첩실의 자식이라는 신분조차 주지 않은 스스로였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 헌원오마가 비로소 중요한 일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새로 태어난 공주의 이름에 ‘상’ 자를 쓰기로 결정하셨다. 혹여나 네 이름이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으니, 앞으로 네 이름에는 다른 글자를 사용하도록 하자.”

헌원오계軒轅悟啓가 된 헌원상이 깜짝 놀라 예를 갖추었다. 황후마마께서 평안히 공주를 낳으시다니, 참으로 기쁘고 축하할 일이었다.

* * *

평화로운 헌원씨 가문의 전원에 비해, 후원은 그다지 평온하지 않았다.

주소유는 무엇이든 잘했다. 그녀는 교양이 있고 사리에 밝은 데다 상스러운 구석이 없어 시어머니를 잘 섬겼다. 남편은 더욱 살뜰히 보살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남편의 후원에 있는 첩실만큼은 좋아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니 좋아하지 않는 것일 뿐, 실은 첩실을 증오하는 수준이었다.

주소유는 아내의 도리와 삼종사덕三從四德을 가장 잘 아는 여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감정까지 마음껏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만약 그녀가 매파를 통하여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혼인을 했다면 이렇게 원망스럽지 않았을지 모른다.

문제는 헌원상이 그런 남자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함께 주소유와 자란 정이 있는 데다 생활 전반에 있어 모든 일을 부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현재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헌원상은 평민이나 다름없었기에 이들 부부 사이는 퍽 가까웠다. 이런 마당에 주소유가 자신에게 잘하는 남편이 이쪽저쪽을 다 챙기는 상황을 달가워할 리 만무했다. 남편이 그리 신경 쓰지도 않는 첩실이 이렇게도 눈에 거슬릴 줄이야.

양미간 사이 꽃 장식을 붙인 주소유는 소매가 넓은 붉은색 비단 치마를 입고 머리카락을 위로 둘둘 말아 올렸다. 그녀는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겨우 문안을 온 금용을 단정한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주소유는 노 고고가 내온 차를 들고 있었다. 살짝 몸을 숙였다가 일어나 멋대로 의자에 앉아 버리는 여인의 거만한 모습을 바라보며 주소유가 경멸의 눈빛을 던졌다. 금용의 외모가 뛰어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 봐야 비천한 몸종 출신이 아닌가. 외모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부류.

주소유가 아무 생각 없이 찻잔을 드는 금용의 손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빛과 달리 적당히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가 말했다.

“금 이랑은 정말 회복력이 좋군. 이렇게 며칠 만에 금세 상처도 다 낫고 말이야. 궁녀 출신이 아니었다면 견디기 어려운 매질이었을 텐데, 황제 폐하께 발로 차이고도 여기 앉아 차를 마실 수 있다니 참으로 부럽구나.”

금용이 창백해진 손으로 찻잔을 꼭 쥐었다. 그녀가 이전과 다름없이 건방진 태도로 주소유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이 금용의 몸이 작고 여린 것을 잘 알고 계신 탓에 차마 심하게 대하지 못한 것이니, 부인께서 부러워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순간 주소유가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 꽂혀 있는 주채가 흔들거리며 주인의 흥을 돋우었다.

“참으로 우습군. 자네가 말하지 않았으면 하마터면 나도 잊을 뻔했어. 자네는 폐하께서 상공에게 보낸 사람… 아, 아니지. 정확히는 황후마마께서 상공에게 내린 것이지. 폐하였다면 아마 자네를 태감에게 보냈을 테니까. 호호…….”

정말로 그랬을 가능성을 떠올린 주소유가 마치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을 들은 것처럼 더 즐겁게 웃었다.

주소유의 웃음소리에 금용이 손에 든 찻잔을 더욱 꽉 쥐었다. 꼭 다문 입술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금용은 여전히 머리를 높이 쳐든 채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금용은 황제가 하사한 여인이었기에 주소유와 대등한 입장에 설 만한 자격이 있었다. 처음 헌원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그리도 불손한 일을 저질렀으나 헌원 노부인은 감히 금용을 죽이지 못한 채 그저 경고 정도로 처벌을 마무리했다. 노부인도 어찌하지 못하는 자신을, 하물며 보잘것없는 주씨 아가씨가 뭘 어찌하겠는가.

금용이 찻잔을 내려놓자 퍽 하며 잔이 찻상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경멸하는 어투로 말했다.

“부인께서 제법 놀라운 담력을 지니셨군요. 감히 뒤에서 폐하를 입에 올리다니요? 만약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마땅히 재산을 몰수하고 가문을 멸할 대죄입니다. 나이 어린 부인께서 법도를 무시하고 그리 기고만장하다가는 자칫 가문에 재난을 몰고올 수도 있습니다!”

주소유가 대단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더욱 비아냥거리며 웃었다.

“금 이랑,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나를 그리 과대평가해 주다니 참으로 고맙기는 하지만 ‘만약 폐하께서 아신다면’이라는 말에서 이 ‘만약’이라는 것이 자네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모르는 것 같아.

아무래도 자네는 폐하에게 쫓겨난 이유를 잊은 모양이야. 그러니 항상 제 분수를 잊어버리는 것이지. 설마 다시 폐하를 뵐 수 있다는 망상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정말 우스운 일이잖아. 아니 그런가, 금 이랑?”

말을 하는 주소유의 웃는 얼굴은 점점 더 단정하고 부드러워졌다.

“금 이랑, 화내지 말아. 자네는 황후마마께서 하사한 사람인데 혹시나 뜻밖의 변고가 생긴다면 마마께 보고를 드려야 하거든.”

주소유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호호,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네를 경멸하는 황후마마께서 자네의 변고를 아주 철저히 조사하시고 우리 가문을 책망하시겠지? 참으로 나를 두렵게 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군.”

주소유의 눈망울에 호기심 어린 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마치 존재 자체가 너무나 우습다는 듯, 끝없는 동정과 가소로움을 담아 금용을 바라보았다. 오히려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화가 난 금용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눈빛에 한이 서렸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은 그녀가 고개를 들고 주소유를 바라보았다.

“저는 명문가 출신인 부인께서 줄곧 넓은 도량을 가진 줄로 알고 있었지, 이토록 아랫사람을 품지 못하고 질투심이 많은 여인인 줄은 몰랐습니다. 상공께서 아시면 참으로 슬퍼하시겠지요?”

주소유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럼 자네가 상공께 이 사실을 고하도록 해. 과연 내 도량이 좁은 건지, 아니면 자네가 내 속마음을 꿰뚫어본 것인지 두고 보면 알겠지.”

주소유가 마치 고양이와 놀아 주듯 금용을 바라보았다. 시침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천한 시녀 주제에 감히 싸움을 걸다니!

주소유가 여유 있게 차를 마셨다.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금 이랑, 충고하는데 다시는 황후마마가 아닌 폐하께서 자네를 하사하신 거라고 말하지 마.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더군다나 얼마 전 자네는 폐하의 손에 중상을 입었잖아. 설령 뜻하지 않은 변고가 생기거나 병에 걸려 몇 년씩 자리보전을 하게 된대도 마찬가지야. 과연 폐하께서 일개 하인을 위해 당신의 태부와 신하인 헌원 상서를 괴롭힐 것 같아?”

화가 난 금용이 탁자를 내리치며 일어났다.

“주소유! 너야말로 사람을 그리 업신여기지 마! 노부인께서 아직 건재하시다는 거 몰라?”

주소유는 여전히 평온했고, 웃는 얼굴에는 전혀 동요가 없었다.

“글쎄, 노부인께서 부인이 첩실을 다스리는 일까지 관여하려 하실까? 고고, 금 이랑을 배웅하고 잘 돌봐 주거라!”

주소유는 특히나 마지막 말을 아주 크게 외쳤다. 금용의 재난이 자못 기쁘다는 의미였다.

금용은 끝까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질질 끌려가며 그녀가 우레와 같이 소리를 질렀다.

“주소유, 반드시 기다려라! 별 볼 일 없는 얼굴이라 불쌍히 여겨 봐주려 했으나 본래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두는 법이다! 후에 인정사정 봐 주지 않는다고 나를 원망하지나 말거라! 상공이 정말 네 것인 줄 아느냐? 그는 내 것이기도 하다! 너의 늙고 못난 얼굴을 좀 보거라! 내게 댈 것도 못 되는 주제에……!”

화가 난 주소유가 씩씩대며 있는 힘을 다해 의자의 팔걸이를 꽉 잡았다.

“저년의 입을 막고 내 앞에 꿇려라! 당장 꿇려!”

‘그래, 너는 얼굴이 꽤 반반하다는 거지? 그래서 나를 업신여기는 거야!’

주소유가 돌연 기이하게 웃었다.

‘위아래도 없는 것 같으니!’

그 시각, 헌원 노부인은 약을 먹은 후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자려던 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곁을 지킨 노 고고가 후원의 상황을 보고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노쇠한 헌원 노부인은 후원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가급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주소유가 금용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정실 며느리가 빠른 시일 내에 손자를 낳아 주기만을 바랄 뿐, 다른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 *

공주가 태어나고 한 달이 되는 날, 문무백관이 공주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입궁했다. 3품 이상의 부인들은 황후를 알현할 수 있었다.

장서열은 대청에 앉아 낯익은 부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비록 품계는 낮았으나 주사섬은 황후의 올케였기에 배를 내민 채로 대전에 함께 앉아 있었다.

품계가 높은 부인들은 모두들 며느리를 동석하여 나이 어린 황후마마를 뵙도록 했다.

이날, 장서열은 권서함의 부인을 처음 보았다. 올해 열다섯 살이 된 백구아는 명문가 출신임을 증명하듯 온몸으로 신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장서열이 민감한 것인지, 혹은 백구아가 황후를 처음 만난 탓인지, 백구아의 언행은 지나치게 어색했다.

백구아와 몇 마디를 주고 받은 장서열은 말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수십 번은 고민을 하듯 겨우 두 글자를 내뱉는 그녀가 애써 맞장구만 치는 느낌이 들었다.

장서열은 가끔 한담을 나눌 때 보이는 웃는 얼굴을 더 이상 지어 보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황후만 계속 이야기를 하고, 아랫사람이 ‘음’ 혹은 ‘아’를 내뱉는 경우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장서열 역시 누군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네는 걸 좋아했다. 그러면 관심이 있든 없든 음, 혹은 아, 단 두 마디만 해 주면 되기 때문이다.

백구아가 다른 이들과 친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을 보자, 장서열은 어쩐지 혼자 고군분투한 듯한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일단 그녀는 자신이 백구아를 불편하게 했거나, 혹은 황후가 너무 조심스러운 탓에 백구아가 부담을 느낀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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