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4화
따뜻한 그림처럼 사람들을 가장 편안하게 하는 계절이 왔다. 가을 하늘은 높고 공기는 맑았다.
가을걷이가 막 시작되던 때, 황실에는 공주가 태어났다. 모녀 모두가 평안한 출산이었다.
매일 둘째 ‘전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구염락이었지만 그는 태어난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출생 전 태아를 사내아이로 단정지어 말하는 건 그저 전통일 뿐,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 자식이기만 하면 되지.’
구염락은 즉시 산실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조금 전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한 탓에 세 차례 숨을 내뱉으며 스스로를 꾸짖은 뒤, 그 누구도 자신을 막을 수 없다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내전으로 들어갔다.
핏자국이 지워진 공기 중에는 몽롱한 계화향이 퍼져 있었다. 방 안은 이미 깨끗했고 허둥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잠을 자다 깬 듯한 주인의 주변으로 놀란 하인들만 바쁘게 움직였다.
거침없이 다가간 구염락은 뻔뻔한 얼굴로 지친 장서열의 곁에 앉았다. 따뜻한 눈빛으로 손을 내민 그가 가지런히 정리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여전히 부드러웠다.
눈을 뜬 장서열은 구염락을 보고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실의 출입을 엄금한다는 글자도 그에게는 한낱 장식품에 불과했다.
‘내일만큼은 구염락이 끝도 없는 상소문에 아예 파묻혀 버린다면 좋을 텐데……!’
과연 그러고도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러 올지는 두고 봐야할 일이었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찾아온 것이 기쁘다기보다는 오히려 막중한 부담에 짓눌렸다. 스스로도 왜 그러는지 몰랐다. 하지만 어떤 여인이든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남편이 있다면 골치가 아플 것이다.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구염락의 손을 잡은 장서열이 빙긋 웃으며 힘없이 말했다.
“대체 또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여러 차례 만류해도 듣지를 않다니.”
구염락은 당당했다.
“네가 보고 싶어서 그렇지. 둘째 때문에 짐을 잊을까 걱정도 되고.”
장서열의 미소가 절로 커졌다. 할 수 없다는 듯 두툼한 손바닥을 꼬집은 그녀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감히 제 산실에 쳐들어오는 대담한 남자를 신첩이 어찌 잊겠습니까……. 혹 기분이 상했다고 제 아이를 데려가 버리면 어쩌려고요…….”
구염락도 웃으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공주가 태어났어. 짐을 닮았으니 장차 천하일색天下一色으로 온갖 인재들의 구애를 받겠지. 그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한 여덟 명쯤 부마駙馬(왕의 사위)로 받아 줄까 해.”
구염락은 거만하면서도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장서열의 입가가 굳었다. 지금은 지나치게 막무가내라 어찌할 수 없으니 일단은 가만히 두는 게 상책이었다.
“세상에 어느 황제가 딸에게 그렇게 많은 부마를 맞아들이게 해요……. 상아裳兒의 명성이 땅에 떨어질까 걱정되지도 않으세요?”
“상아上兒?”
구염락이 두 글자를 곰곰이 생각했다.
“좋아. 짐이 곧장 ‘상上’ 자를 쓴 이들을 개명하도록 지시하지. 우리 공주가 제왕에 버금가는 대우를 누리도록 말이야.”
장서열의 얼굴에 순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몽롱하던 정신이 번쩍 깨어나는 것을 느낀 그녀가 급히 구염락을 일깨워 주었다.
“경거망동하지 말아요. 갓 태어난 아기에게 가장 중요한 게 복록수福祿壽(복福과 녹祿과 수명壽命을 통틀어 이르는 말)라는 거 몰라요?”
장서열은 얼굴에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구염락은 첫째 구염황에 이어 둘째의 복까지 위협하려 했다.
장서열은 이 부분만큼은 구염락과 의견을 좁힐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아이가 인내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구염락은 아이가 항상 최선을 다해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하上下를 논할 때의 ‘상上’ 자가 아니라, 예상霓裳(화려한 의상)할 때의 ‘상裳’ 자 입니다.”
딸을 언급하는 장서열의 얼굴에 절로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딸아이에게 빚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딸 상아. 생명은 참으로 신비한 것이었다. 아이는 전생과 같이 풍성한 수확의 계절에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어깨에 똑같은 붉은 반점을 가지고 나왔다.
가슴에 맺힌 마지막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장서열은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딸을 떠올린 장서열의 마음은 점점 더 따뜻하고 평온해졌다. 그녀는 상아가 전생의 나쁜 감정을 잊고 자신과 한평생을 보내기 위해 다시 태어나 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장서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구염락이 무슨 일이냐고 묻기 전에 서둘러 옷소매로 깨끗이 눈물을 닦았다. 다시금 만족스럽게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장서열의 손을 잡은 구염락이 이를 자신의 뺨 위에 문질렀다.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온기였다.
“바보. 어째서 우는 거야. 당신의 아이로 태어났다는 게 바로 상아의 복이야. 설령 운다 해도 아이가 먼저 울어야지.”
장서열이 구염락을 노려보았다.
“상아는 이미 울었잖아요! 내가 어미로서 좀 감동하게 내버려둘 수 없는 거예요?”
구염락은 이 말에는 감히 말대꾸를 하지 못했지만, 딸을 위해 이름만큼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높은 지위를 뜻하는 그 ‘상上’ 자가 아닌 게 확실해? 우리 딸이라면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상上’ 자를 쓰는 것이 마땅한데, 어찌 예상霓裳(화려한 의상)의 ‘상裳’ 자를 쓰겠어. 생각해 보니 힘이 좀 약한 것도 같고. 너무 여린 느낌이라 안 좋아.”
‘여리다고?’
장서열이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왜 웃는 거야?”
“아니에요. 당신이 상아한테 관심을 가져 주니 정말 좋네요.”
구염락은 그 말이 참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짐의 아이인데 당연하지. 아버지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누가 관심을 가지겠어. 이무튼 ‘상裳’ 자는 별로인 것 같아. 아니, 아주 안 좋아! 짐이 만자서萬字書를 찾아볼 테니 황아처럼 존귀한 글자를 쓸 수 있게 허락해 주겠어?”
장서열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공주는 지체 높은 모친에 기대어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지만 장성한 이후에는 온전히 스스로의 능력에 의지해야 했다. 과거 상아에게 무관심한 구염락을 전혀 개의치 않았던 건 당시 그녀 자신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거는 이미 지났다. 이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으니 상아에게 진 빚은 자신과 구염락이 함께 갚아 주리라.
“졸리군요. 가서 아이를 좀 보세요.”
아이를 낳자마자 구염락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장서열은 자신보다 더 불쌍한 황후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제야 장서열이 지쳤다는 것을 깨달은 구염락은 난처함에 웃을 뻔했지만 이내 다시 엄숙한 모습을 보이며 아내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 주었다.
“푹 자. 아이에게 가 볼게. 이따 다시 올게.”
* * *
연경 전체에 공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헌원씨 가문은 불안정한 모습으로 사방에서 몰아치는 공격을 견디고 있었다. 황제는 단 한마디로 헌원씨 가문의 대를 거의 끊어 놓았다.
헌원상의 존재를 부정당한 이후 헌원씨 가문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타격도 그뿐, 수십 년간 종횡무진 조정을 누빈 헌원오마는 여전히 인척 관계에 의지할 필요도,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할 필요도 없는 인물이었다.
호부戶部의 제일대상서 헌원오마는 연로한 나이에도 조정에서 이인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특히나 최근에는 황제가 그를 더욱 중히 대했기에 정치적 업적 또한 더욱 공고해지던 참이었다.
그러나 조정 중신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들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기세등등하던 헌원 상서가 아들의 일로 성총聖寵을 잃자 기회를 틈타 더욱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황제의 심복이 되고자 안간힘을 썼다.
거대한 헌원씨 가문이 벼랑 끝에 서는 모습을 지켜본 조정 중신들은 그들 가문을 공경하는 것과 동시에 이들이 무너질 날만을 기다렸다. 지금이야 어떤 모습이든, 대를 이을 힘이 없는 이상 헌원씨 가문은 더는 두려운 권력이 아니었다.
연로한 헌원오마 역시 불리한 상황을 반전시키기가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황자가 아직 어린아이인 데다 새로 태어난 공주는 더더욱 어리니, 자식들의 혼인 관계를 통하여 다시금 가문의 입지를 다지는 일도 지금으로선 불가능했다.
최대한 황제를 위해 목숨 바쳐 충성하는 것을 제외하면 지금 당장은 이 난국을 타개할 만한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헌원씨 가문의 서방은 고군분투했던 헌원오마의 어린 시절과 의기양양했던 중년, 그리고 어찌 할 도리가 없이 흘러가는 노년까지, 한평생 그가 품어 온 포부와 인품이 드러나 있었다.
운명은 얼마나 불공평한가. 하늘은 그에게만 아들을 주지 않았다. 늘그막에 간신히 하나를 얻어 한 줄기 희망을 보았는데, 잔인하게도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되다니.
헌원오마는 뒷짐을 진 채 서방 창문 앞에 서 있었다. 끊임없이 변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연로하고 지혜로운 그가 무기력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이 자리까지 오른 그에게 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님을 뵈옵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오랜 세월 쌓인 서책의 향이 풍기는 대청 가운데 올해로 열세 살이 된 헌원상이 섰다. 그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문득 정신을 차린 헌원오마가 몸을 돌려 아들을 보았다. 당당히 청석 위에 선 예의 바르고 듬직한 모습을 볼 때면 도저히 기대를 버릴 수가 없었다. 적출이 아니라는 이유 외에 대관절 자신의 아들에게 부족한 점이 무엇인가. 아들은 총명하고 참을성이 있을뿐더러 넓은 학식까지 갖춘 인재였다.
그 고리타분한 주 태부조차 특출난 인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은 아이였다. 그런데 이런 아들이 고작 ‘서자’라는 한 마디에 벼슬길 밖으로 밀려났다.
‘폐하, 그러는 폐하께서는 누구의 아들이십니까?’
헌원오마는 진정으로 이렇게 묻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래, 주 태부께서 천하를 두루 돌아보라 하셨다고?”
헌원상이 아버지를 바라보며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네, 아버님. 곧 겨울인데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으시니, 우선 곁에서 어머니를 모시다가 봄이 되면 멀리 떠나 볼 생각입니다.”
헌원오마가 하얗게 변해버린 수염을 쓸어내리며 대견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효와 의를 다 갖춘 아들을 부인이 아끼는 것도 당연했다.
“새아기와 함께 틈나는 대로 처갓댁을 자주 찾아뵙거라. 네가 떠난다면 효를 다할 수 없어 서러울 수 있으니, 있는 동안 자주 같이 찾아뵙도록 하거라.”
“아버님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공손한 아들의 모습에 안타까워 한숨을 쉰 헌원오마가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거라. 괜히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가난한 서생들과 함께 어울릴 필요도 없다. 폐하께서 생각을 바꾸시면 금방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