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3화
“어진 어머니에게는 실패한 아들이 많은 법이지. 그래, 둘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해. 짐은 바빠서 오늘 점심은 함께하지 못 해.”
“누가 같이 먹는다고 했나요?”
장서열이 구염락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고개를 돌린 구염락이 한 걸음 성큼 다가와 장서열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잠시 고개를 이리저리 뒤척이던 그는 여운이 남은 듯 아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구염락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달랬다. 이제 두 달만 더 참으면 돼. 두 달 뒤에는 반드시 그녀가 자신에게 애원하게 만들 것이다.
“황아를 누르고 있잖아요!”
마침내 숨을 쉴 수 있게 된 장서열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고통스러워 하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눈을 깜빡이며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면서도 결코 아버지의 앞에서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순간 장서열이 구염락에게 버럭 화를 냈다.
“뭐하는 거예요! 아이가 안 보여요?”
그러나 불리한 상황에 처한 구염락은 이미 입구로 달아나 있었다.
“짐은 일이 바빠서 이만. 배웅은 사양할게.”
장서열은 벌써 저만치 달아난 구염락을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착하지… 황아, 울지 말거라. 어마마마가 잘못 했단다.”
* * *
침대 위에 엎드린 주방비는 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다니! 내가 그리 못생겼단 말이야? 너무 괘씸해… 괘씸하다고!’
화가 난 주방비는 고운 주먹으로 몸 아래 깔린 비단 이불을 내리치며, 억울하다는 듯 끊임없이 울었다.
* * *
기요처에 돌아온 구염락은 호국에 대처하기 위해 불러들인 마지막 문신들을 내보낸 뒤, 의자에 기대어 태연한 얼굴로 진 공공의 보고를 들었다.
“폐하, 노비는 소명자를 추천하옵니다. 그는 젊지만 진중한 성격이라 신형사의 부총관을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이옵니다. 또한 일처리에 신중하여 아랫사람들이 모두 존경할 만큼 줄곧 평판이 좋았으므로 노비는 이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없다 사료되옵니다.”
구염락은 엄지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본래 하인들의 인사에 크게 관심이 없던 그였으나, 낯설지 않은 이름을 들으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불쾌한 감정이 올라왔다.
물론 먼저 타협하겠다고 다짐했던 건 그였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 그건 장서열을 잡기 위한 궁여지책일 뿐이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믿고 대답했다고 해도, 구염락에게는 절대 명정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무참하게 괴롭힐 방법이 있었다.
구염락은 자신이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눔과 관용이라는 훌륭한 성품은 어릴 때부터 갖춘 적이 없었고, 지금도 배울 생각이 없었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썹이 흔들렸다. 언뜻 보면 알 수 없으나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짐의 기억에 그는 태자를 돌보던 자인데, 어째서 신형사로 옮긴다는 것이지?”
진 공공은 깜짝 놀랐다. 황제가 명정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그가 즉시 감격한 듯 입을 열었다.
“폐하, 소명자는 얼마 전 몸이 좋지 않아 조로전을 나왔습니다. 다행히 태자 전하께서 바뀐 노비를 마음에 들어 하신 덕분에 건강을 회복한 후에도 다시 바꾸지 아니하였습니다.”
진 공공은 조심스럽지만 정확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크게 보호하지 않는 척 자연스레 명정에게 길을 마련해 주었다.
구염락은 흥미로웠다. 대체 명정이 얼마나 특출난 인재이기에 선황제를 옆에서 모시던 진 공공까지 이렇듯 극찬을 한단 말인가. 일개 태감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진 공공의 모습은 흡사 친아들이라도 추천하듯 정성이 대단했다.
만지작거리던 반지에서 손을 뗀 구염락이 말했다.
“신형사의 부총관은 결코 경솔하게 결정할 수 없는 자리다. 게다가 나이가 너무 어려 능히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수 있으니, 한번 만나보는 게 좋겠군. 짐이 직접 판단하겠다.”
진 공공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예, 폐하. 노비가 곧장 불러오겠습니다.”
황제를 알현하는 건 명정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였다. 황제의 눈에 드는 순간 명정의 앞날은 한없이 밝을 것이다.
비록 소리자나 혜령처럼 황제의 측근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와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것 역시 그다지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명정이 진실로 성실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진 공공은 언젠가 자신의 자리를 명정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일단 황제가 눈여겨본다면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잠시 후, 명정이 도착했다.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린 그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큰절을 올렸다.
“노비 명정, 황제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명정을 보자 구염락은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고개를 들라.”
고개를 든 명정이 황제의 책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공손한 표정과 겸손한 행동거지는 노비가 처음으로 주인을 알현할 때 보여 줘야 할 단정한 모습의 표본이었다.
명정을 주시하던 구염락의 두 눈에 돌연 의미를 알 수 없는 불꽃이 번쩍였다.
‘이 얼굴을?’
장서열은 그에게 마음을 내어 준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순간 구염락은 장서열이 이토록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사실에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자에게…….’
명정은 줄곧 책상에 새겨진 용의 수염을 주시하며 처음과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과묵하고 충직한 모습이었다.
비록 명정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으나 구염락의 입가에 새겨진 경멸은 지워지지 않았다. 구염락은 명정이 침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결코 특출난 용모는 아니었으나, 명정에게는 확실히 다른 사람과는 다른 기개가 있었다. 일개 태감으로 교만하지도, 조급하지도 않은 그는 확실히 보기 드문 사람에 속했다.
장서열과의 일만 아니었다면 명정을 발탁하는 데 이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맙게도 명정이 스스로 벼슬길을 저버린 이상 구염락은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가장 처음 일했던 곳은 어디냐?”
다시 고개를 든 명정이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예, 폐하. 노비는 이전에 어화원에 있었습니다.”
명정은 비록 황제를 똑바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아직 청년이라는 것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최고의 지위를 거머쥐었으니, 인정하기 싫어도 그가 그녀를 매료시킬 만한 사람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명정은 도박을 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아예 할 수조차 없었다. 이미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일이다. 구태여 굴욕을 자초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명정은 서로의 마음에 좋게 자리한 마지막 모습까지 없애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태자를 돌보고 싶지 않은 거라면, 어디든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되겠군.”
구염락은 어화원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명정은 잠시 깜짝 놀랐으나 곧 공손하게 받아들였다.
“노비, 폐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구염락의 시선이 명정에게 잠시 머물렀다. 그는 명정이 침착할 뿐만 아니라 눈치가 빠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러가라.”
“예.”
명정이 나오자 즉시 다가간 진 공공이 자애롭게 물었다.
“어땠는가? 폐하께서 자네를 부총관으로 임명하셨는가? 실수한 것은 없고? 혹 폐하께서 난처한 질문을 하시지는 않았나?”
고개를 든 명정은 그간 자신을 잘 보살펴 준 진 공공을 바라보며 유감스러운 결과를 전했다.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폐하께서는 제가 함부로 조로전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탐탁잖으신 듯합니다. 저는 어화원으로 다시 돌아가 꽃을 기르게 되었습니다. 의부께서 보살펴 주신 기대를 저버렸으니, 처벌하신대도 달게 받겠습니다.”
진 공공은 깜짝 놀랐지만 일단 급히 명정을 부축해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어찌 이런 일이… 폐하께서는 지난 번 자네를 태자 전하께 보내는 일도 크게 상관하지 않으셨는데 이번에는 대체 어인 일로…….”
명정 역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보다 더 실망한 의부의 표정을 보니 마음이 불편할 따름이었다. 자신이 재수가 없는 걸 누구를 탓하겠는가.
명정은 황후와 있었던 일을 황제에게 들켰다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적어도 명정의 기준에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멋대로 태자의 곁을 떠나는 바람에 황제의 눈 밖에 났다는 것뿐이었다. 만약 황제가 그와 황후 사이의 불필요한 관계를 알았다면, 지금 그는 살아 있을 수 없었다.
진 공공은 초조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다. 황제의 심중을 조금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분명 명정은 유능했고,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었다. 정말로 신형사 부총관을 감당할 만한 인재가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어화원으로 돌려보내 꽃을 심게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 공공은 황제가 화를 잘 내는 성격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명정이 말한 것처럼 그가 태자를 돌보지 않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황제의 처분일지 모른다.
진 공공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진 공공도 명정이 태자가 장성할 때까지 오랜 기간을 마냥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에 조로전을 떠난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황제의 나이가 아직 어렸으므로 운이 나쁘면 새로운 황제가 등극할 때까지 무려 오십 년이 넘는 시간을 마냥 허비할 수도 있었다. 그때가 되면 정말로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는 걸 볼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진 공공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알았다. 조로전을 떠난 명정은 줄곧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고, 계속해 하급 관리로 일을 했다.
명정은 교묘한 술수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조로전에서 나오고 싶지 않다는 뜻을 비치기도 했지만 마침 좋은 기회가 왔다고 여긴 진 공공은 명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전임轉任을 간청했다. 이런 결과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모른 채였다.
* * *
명정을 쫓아낸 구염락은 그제야 부담 없이 상소문을 읽기 시작했다. 본래 보고 싶지 않던 사람이니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좋았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이미 관련이 없어진 사람의 소식을 적극적으로 알아볼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구염락이 붓을 들었다. 막 상소문 세 장을 읽어 나가던 그는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이 마음이 초조해지는 걸 느꼈다. 가슴에 돌덩이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기분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구염락이 비아냥거리듯 웃었다. 온몸에 피가 돌도록 숨을 크게 들이마신 그가 본래 존재하지 않아야 할 우울감과 답답증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구염락은 심신이 평안해지길 기다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너털너털 웃었다. 대체 명정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싫었으면 침을 삼키는 것조차 이렇게 불편하단 말인가.
필요하다면 영원히 자신의 삶에서 쫓아내고, 완전히 사라지게 해야 했다. 구염락이 손에 든 상소문을 던졌다.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혜령을 비롯한 다른 하인들은 모두 깜짝 놀랐지만 감히 내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한쪽에 공손하게 선 채 제왕이 화를 가라앉힐 때까지 숨죽여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