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2화
옥산호를 든 완정이 빠른 걸음으로 농교와 발걸음을 맞추며 말했다.
“황후마마, 조금 전 주 재인이 노비를 두 번이나 쳐다본 데다 심지어 웃기까지 했습니다.”
농교도 즉시 말을 이었다.
“노비에게도 그랬습니다. 마마, 주 재인은 분명 삿된 마음을 품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화 마마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주 재인이 여러 가지 오락거리를 가지고 입궁하여 궁에서 계속 웃고 떠든다고요.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겁니다.”
장서열이 웃었다. 그녀는 이미 주방비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전생에 자신은 지나치게 속마음을 훤히 내보였다. 지금은 돌려 말할 줄도 아는 것이 그래도 제법 철이 든 모양이었다.
“아무 짓도 할 수 없도록 잘 지켜보면 되니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 * *
한편, 주방비는 황후야말로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라 확신했다. 황후의 측근 시녀 두 명은 모두 뛰어난 미인인 데다 나이도 많지 않았다. 둘 다 승은을 입기에 충분한 아이들이니 황후가 황제의 잠자리 시중을 들도록 이들을 밀어 넣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지 않은가.
주방비는 입술을 깨물고 손수건을 꽉 쥐었다.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황후는 정말 해도 너무했다. 자신들처럼 정정당당한 명분을 지닌 후궁을 두고, 황제를 묶어 두기 위해 신분이 비천한 시녀들에게 시중을 들게 하다니. 어찌 황후로서 떳떳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주방비는 애써 눈으로는 웃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렇게 총애를 받는 걸로도 부족해 손톱만큼의 자리도 내어 주지 않는 황후라니.
어렸을 때부터 줄곧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며 자란 주방비는 궁에 들어와 황제를 한 번 만나 보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총명하다 한들 재능을 보여줄 곳이 없다면 어찌 총애를 얻을 수 있겠는가.
아이처럼 짜증스럽게 주방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자세히 보면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였지만 반짝이던 눈이 뭉그러진 모습은 매우 억울한 일을 당한 듯 보였다.
손수건을 비틀던 주방비가 애꿎은 모래를 발로 차며 처소로 되돌아가려 했을 때였다. 몸을 돌려 주인을 위로하려던 완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다. 줄곧 침착하던 완여가 순식간에 굳어진 몸으로 즉시 눈을 반짝 떴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재인마마, 재인마마! 어서 보세요. 폐하께서 오시는 것 같아요! 폐하께서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주방비가 짜증을 내던 마음을 급히 다잡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사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조금 전 황후의 행렬에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인원이었으나 왠지 모르게 엄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재인마마… 저희가 가 봐야 할까요?”
어린 시녀는 긴장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주방비 또한 어찌 긴장하지 않았겠는가. 그는 영덕제였다. 그녀의 남편이자, 부친의 3군을 성 밖으로 밀어내고 홀로 백국을 공격한 대장부. 주방비는 최근 그가 호국이 꺼낸 혼담을 거절하고, 성문을 열어 호국에서 온 사절단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누구도 감히 맞설 수 없는 기백과 배포였다. 주방비는 황제를 향한 부친과 오라비의 숭배를 여러 차례 들어온 끝에 일찍부터 알 수 없는 애틋함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궁에 들어온 지 반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가족들이 입버릇처럼 찬양하던 영웅을 만나게 되었다.
주방비는 갑자기 약간 주눅이 들고 긴장되는 걸 느꼈다.
완여가 급히 아가씨를 잡아당겼다.
“재인마마, 가실 거예요? 가실 거냐고요! 폐하께서 곧 지나가실 것 같은데, 어서 다가가서…….”
물론 완여보다 더 긴장한 건 주방비였다. 당연히 다가가고 싶었다. 심지어 이건 정성 들여 계획한 것도, 다른 꿍꿍이를 품은 만남도 아니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우연한 만남이었고, 하늘의 뜻이었다. 어떻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는가.
주방비는 어떻게든 움직이고 싶었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얼굴을 보자 부끄러움에 얼굴만 붉힐 뿐 도무지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기개 넘치는 지존의 모습은 여인의 마음을 끌기 충분했다. 이토록 수려한 남자를 두고 수줍어하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저렇게 고상하고 멋진 남자가 정말 내 남편이란 말이야?’
주방비는 조금 전 황후에게 받았던 냉대마저 깨끗이 잊을 만큼 감동을 받았다. 저런 남자라면 어떠한 여인에게도 틈을 주지 않으려는 황후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자신이 황후였더라도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어라……?”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깜짝 놀란 주방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녀는 입궁 전 한 식당에서 부인을 위해 한 상 가득 달콤한 떡을 주문했던 남자를 기억해 냈다.
순간 주방비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손수건을 꼭 쥔 그녀는 그대로 조로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당시 멀리서도 확연히 알 수 있던 그의 깊은 애정은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주방비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고작 나이 많은 여자가 자신보다 한발 앞서 황제와 알고 지냈을 뿐 아닌가. 심지어 황제에게 잘했다고는 하나 그 시절 황후는 무려 다른 남자와 정혼을 한 몸이었다.
심지어 충왕부의 세자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리고 황후는 과거 초라했던 황자가 제왕이 되자 과감하게 정혼자를 버렸다. 이렇게 권세에 따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여인이 어찌 황제와 어울리겠는가.
구염락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으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곧장 조로전을 향해 걸어갔다.
자신을 힐끗 스친 황제의 시선이 멀어지자 주방비는 달갑지 않은 기분에 가슴이 욱신거리는 걸 느꼈다.
‘나를 보지 못한 거야? 아니면 그새 얼굴을 다 까먹었나?’
주방비는 결코 자신이 황후에게 외모로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는 황제가 미색으로 여인을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한편, 완여는 초조한 마음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점점 멀어지는 황제를 바라보며 그녀가 발을 동동 굴렀다.
“재인마마, 재인마마! 폐하께서 떠나셨어요!”
주방비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나 괴로웠다. 조금 전 황제는 분명히 자신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오랜 시간 한결같이 바라 오던 남자에게 철저히 무시당했다. 이것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주방비는 울면서 뛰어갔다. 평소 고귀한 여인으로 살아 온 자부심이 그녀를 더욱 슬프게 했다.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놀란 완여가 재빨리 주인을 쫓아갔다.
“재인마마! 천천히 가세요!”
* * *
기요처에 있던 안태약安胎藥(유산 방지 약)을 친히 가져 온 구염락이 조로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에게 달라붙어 안아 달라고 보채던 구염황은 아버지가 다가오자 즉시 바른 자세로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눈치를 보는 구염황의 행동에 장서열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 한편이 부드러워지는 걸 느끼며 그녀가 손을 내밀어 아이의 귀여운 얼굴을 꼬집었다.
“탕약 하나 때문에 친히 오시다니요. 혜령에게 시키시면 될 일입니다.”
“그러면 안 되지.”
혜령이 받쳐 든 쟁반 위의 사발을 들어 올린 구염락이 탕약의 온도를 확인한 뒤 그녀의 탁자 위에 놓아 주었다.
“어서 마셔. 황아는 이제 곧 두 돌을 앞두고 있는데 어찌 당신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 거야. 앞으로는 나를 따라 전전에서 사내의 덕목을 길러야겠어. 계속 조로전에 있다가는 수를 놓겠군.”
일순간 하인들이 입을 막고 슬그머니 웃었다. 수를 놓는 태자라니, 세상에 그런 말을 하는 부황이 어디 있단 말인가.
깜짝 놀란 구염황이 눈을 크게 떴다. 좁고 긴 눈망울이 마치 살려 달라는 듯 어마마마를 향했다. 구염황은 아바마마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싫어요! 싫다고요!’
갑자기 달려들어 다리를 끌어안는 아들 때문에 장서열은 하마터면 마시던 약을 내뿜을 뻔했다. 부드러운 눈빛을 한 아기 구염락을 마주하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직 너무 어리니, 두 살이 되면 다시 얘기하기로 해요.”
구염락이 언짢은 듯 구염황을 들어 올렸다.
“이 녀석, 어머니를 괴롭히다니 간도 크구나. 어엿한 사내가 변변치 못하게 어머니에게 매달리다니, 장차 무엇이 되겠는가. 아비는 너만 했을 때 이미 홀로서는 법을 배웠다. 헌데 너는 아직 젖도 떼지 못했구나.”
구염황은 주눅이 든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작은 입을 쭉 내민 아이는 억울했지만 감히 울지 못했다.
‘나는 아바마마와 친하지 않아요! 나는 어마마마가 필요해요!’
두 부자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탕약을 다 마신 장서열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도 두 살이 될 때까지는 기다리도록 해요.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하면 앞으로 더욱 순조로울 거예요.”
“태의는 태자의 건강이 많이 회복됐다고 하더군. 그동안 좋은 약을 많이 썼잖아. 특히 최근 몇 달 사이에 살이 얼마나 올랐는지 한번 봐. 우리가 먹는 닭보다 통통한걸.”
장서열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필 비유를 해도 닭이 뭐람. 아이는 이제 겨우 살이 좀 붙었다. 그게 뭐가 어떻다는 것인가.
구염락은 진지한 눈으로 살이 좀 붙다 못해 아주 통통해진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장서열을 보며 말했다.
“태의 말이, 요만한 아이가 체중이 이 정도 나가는 건…….”
갑자기 구염락이 짓궂게 웃었다.
“…어쨌든 조금 빠지는 게 좋다고 하더군.”
“어마마마…….”
목을 붙들린 구염황이 불쌍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얼굴 가득 살려달라는 애원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이는 감히 아버지 앞에서는 크게 소리를 내지도, 징징거리지도 못했다. 작은 얼굴을 찡그린 모습은 몹시도 불쌍해 보였다.
장서열은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 아버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아이의 모습이 기쁘고 안심이 됐다.
“겨우 두 달이에요. 그 사이 살이 더 찌기야 하겠어요? 어차피 두 달 후에는 둘째를 돌봐야 하니, 그때 황아를 데리고 가세요.”
변변치 못한 아들을 내려놓은 구염락이 엄숙하게 말했다.
“싫어. 둘째는 절대 당신에게 맡기지 않을 거야. 태자야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지만, 둘째까지 당신이 맡게 된다면 또 다른 황아를 만들어 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잖아? 봐. 녀석, 곧 울 기세군.”
서둘러 아들을 품에 안은 장서열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구염락에게 훈계를 늘어놓았다.
“그렇게 계속 나무라면 당신 할아버지가 와도 울겠어요.”
구염락이 재미없다는 듯 손가락을 거둬들였다. 사실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구염황이 고통을 참는 모습을 매우 좋아했다. 토실토실한 작은 얼굴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어린 녀석은 벌써부터 인내하는 법을 알고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