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1화
평화롭고 조용한 조로전과 달리 후궁들 사이에는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다.
지난 밤, 무릎을 꿇고 황후를 고발했던 후궁들은 오늘 하나같이 문을 닫아걸고 누구도 처소에 들이지 않았다. 양 재인과 가장 가까웠던 여인이 태의를 부른 것을 제외하면 다른 여인들에게서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이쯤 되자 오히려 조급해진 건 그들과 함께 나서지 않았던 나머지 후궁들이었다. 이들은 눈물로 읍소한 후궁들을 위해 과연 황제가 방패가 되어 주기로 했는지, 과연 황후가 처벌을 받을 것인지, 그로 인해 황제가 드디어 가련하고 막막한 후궁들을 떠올리게 되었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몇 시진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나서서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황제를 실제로 보았다며 호들갑을 떠는 사람도 없었다.
재미있는 구경을 기다리던 후궁들은 초조했지만 무릎을 꿇고 나선 자매들이 처소를 굳게 닫아걸고 누구도 들이지 않는 통에 어떠한 궁금증도 해소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제 일로 충격을 받은 여인들 중 자매들의 한낱 호기심에 이용당할 바보는 없었다. 어젯밤 그녀들은 의지할 곳 없이 스스로 고군분투했다. 드디어 황제를 만날 절호의 기회가 왔으며, 어쩌면 한 번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이들은 하마터면 그대로 비명횡사할 뻔했다. 그러나 무릎을 꿇은 이들의 뒤에서 줄곧 황후가 덕이 없으며, 황제가 깜박 속고 있는 거라 험담을 해 대던 자매들은 정작 일이 벌어지자 몸을 숨긴 채 이들과 뜻을 함께 하지 않았다.
이런 교활한 자매들을 분간해 내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바보들도 얻은 것은 있었다. 비록 황제를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녀들은 분명한 답을 들었다. 앞으로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황제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을 것. 목숨을 부지할 길은 그것뿐이었다.
어젯밤 진정한 공포를 맛본 후궁들은 오직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목숨과 맞바꾼 귀한 답안을, 그저 가만히 몸을 사리고 있던 자매들에게 쉽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알고 싶다면 최소한 어제 자신들이 느낀 공포와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경험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소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침묵했다. 어떠한 말도, 움직임도 없었다. 이들은 손 하나 까딱 않고 가장 애타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이를 조급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 * *
주방비周芳菲는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원망과 분노가 어린 눈동자는 그 순간 독한 술처럼 깊었다. 그녀는 결코 분수에 맞지 않는 물품은 사용하지 않았으나 위를 향한 새끼손가락에 끼운 진귀한 호갑만큼은 가히 최고 수준으로 정교했다.
주방비의 눈은 완고하고 비열해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고요하고 잠잠하기도 했다. 물빛으로 된 긴 치마 위에 얇은 하늘색 너울을 걸친 그녀는 치렁치렁한 겉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는 연경에서 유행하는 것이 아닌 삼강三江 지역의 복식으로 수양버들 같은 정취가 있었다.
주방비가 고개를 들었다. 교만하고 방자한 얼굴이었다. 만약 장서열이 보았다면 그녀는 분명 주방비가 청산으로 외출하던 날, 식당에서 설산떡을 두고 입방아를 찧었던 그 계집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소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뾰로통했다. 그녀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부모에게 응석을 부리며 자란 탓에 언뜻 보면 천진난만해 보였다.
대청에는 그녀의 심복 외에 아무도 없었다. 주 재인의 발랄한 목소리가 대청을 울렸다. 그녀는 고고한 태도로 남을 부려먹지만 밉살스럽지는 않았다.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고?”
시녀 완여婉如가 급히 몸을 굽히며 말했다.
“예, 재인마마. 돌아온 재인들은 모두 처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노비가 다른 하인들에게도 물어 보았지만, 모두들 어젯밤 주인을 따라가지 않았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는 말뿐입니다.
노비가 감히 조로전을 얼쩡거리지는 못하였으나, 오늘 아침 음식을 가지러 가면서 일부러 조로전을 빙 돌아보았는데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
“재인마마, 정말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요? 헌데 어째서 송 재인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러 오지 않는 걸까요?”
언뜻 보면 친한 듯했으나 사실 송 재인이 터놓고 이야기를 해 줄 리 없었다. 송 재인은 야심은 있으나 미천한 가문 출신이었기에 다소 침착하지 못한 것이 흠이었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그녀는 아무런 근심 걱정도, 별다른 재주도 없는 주 재인을 썩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반대로 주 재인의 눈에는 그런 송 재인이야말로 천하에 무식한 사람이었다.
황궁에는 무지한 재인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소청청으로, 그녀는 얼핏 보면 맑은 물처럼 투명한 소녀였다.
다른 하나가 바로 주방비였다. 그녀는 언뜻 보면 어리석게 자란 부귀한 집안의 적녀처럼 보였다. 전자는 진짜 무지한 자일 수도 있으나 후자, 주방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주방비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그녀는 서 귀인의 병환부터 어젯밤 벌어진 소란까지 모든 것을 꾸몄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마지막 연결고리를 놓치고 말았다.
주 재인은 호갑을 튕기며 천천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런 상황이라면 결과는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첫 번째는 무릎을 꿇은 후궁들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들은 성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혼이 난 뒤 외출을 금지당했으리라.
두 번째는 그들이 고의로 교활한 술수를 부리고 있을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주방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어젯밤 이후로 황제는 배가 불룩한 여인이 아닌, 수많은 미인들을 알게 되었다.
이제 황제의 마음이 움직이기만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주 재인은 햇빛처럼 맑은 얼굴로 흡족하게 웃었다. 그녀는 황후가 아름답고 너그러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약간 토라지는 것 또한 남자를 사로잡는 여인의 가장 큰 무기이리라.
하지만 세상에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제아무리 아름다운 명화라도 매일 보다 질리면 더 이상 감상할 만한 가치가 사라진다.
주 재인의 입가가 거만하게 올라갔다. 이제 남은 건 새로 시침을 들게 될 두 번째 여인을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 * *
보름이 지났다. 후궁들은 어떠한 소식도 없이 조용했다. 시침을 들라는 명은커녕 황제는 온종일을 황후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심지어 황후를 위해 기요처에 따뜻한 방을 하나 비우기까지 했다. 황후의 몸이 불편할 때 하인들이 세심하게 시중을 들지 못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대체 어디가 잘못된 거지?’
주 재인은 약간 초조했다. 설마 조로전 안에 비슷한 이를 숨겨 놓고 마치 황제가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처럼 눈속임을 하는 건가?
‘안 되겠어.’
주방비는 직접 황후를 정탐하기로 했다.
그러나 시침을 들지 못한 탓에 주방비는 아직 황후를 알현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신분이었다. 머리를 굴린 그녀는 사가의 어머니가 황후마마를 잘 섬기고 공경하라는 뜻에서 선물을 보냈다는 핑계를 대기로 했다.
손에 든 옥산호를 어루만지던 주방비가 마마嬷嬷를 불러 다시 화장을 했다. 그녀는 머리에 꽂혀 있던 주채 몇 개를 빼낸 뒤 신분에 걸맞은 수수한 옷을 입었다. 정확한 시간을 계산한 그녀가 곧 하인들을 이끌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기요처에서 조로전으로 돌아오는 황후를 우연히 마주친 척 할 속셈이었다.
저 멀리 황후의 뒤에 이어진 위용 있는 행렬을 보자 주 재인은 순간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당황했으나 이내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네 명의 단출한 하인을 이끈 그녀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치맛자락이 펄럭거렸다.
“황후마마?”
주방비가 유쾌한 걸음으로 하인들을 이끌고 가까이 다가갔다. 황후를 모시는 방대한 대열에 비하면 볼품없는 규모였다.
“황후마마!”
치맛자락을 치켜든 그녀가 경쾌하게 달려갔다. 함박웃음을 지은 얼굴은 어느새 깨끗하고 밝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황후에게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선 주 재인이 다급히 몸을 굽히고 수줍게 문안을 드렸다.
“신첩, 황후마마를 알현하옵니다. 황후마마, 천세 천세 천천세.”
다가온 여인을 빠르게 살핀 농교가 주인의 옆으로 다가가 여인의 내력과 신분을 고했다. 농교가 다시 빠르게 한 걸음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장서열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퍼졌다.
“주 재인이로군. 일어나거라. 한 집안사람끼리 예의에 얽매일 필요 없다. 궁중 생활은 좀 익숙해졌느냐?”
“황후마마의 깊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신첩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수줍은 듯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답하던 주방비는 갑자기 뭔가 재밌는 일이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들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황후마마, 신첩의 어머니가 고향에서 황후마마를 위하여 옥산호를 보내 주셨사옵니다. 신첩을 보살펴 주시는 황후마마께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말을 마친 주방비가 뒤에 선 시녀에게 들고 있는 옥쟁반을 올리라고 손짓했다. 그리고는 쑥스러운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즉시 앞으로 나선 완여가 쟁반 위에 덮인 얇은 천을 걷어냈다. 새빨간 빛을 띤 정교한 산호가 작지 않은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모양은 마치 작은 인형처럼 귀여웠다.
장서열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깜짝 놀랄 만큼 마음에 쏙 든 것은 아니지만 퍽 반가운 눈치였다.
“좋은 물건이구나. 모친께서 적잖이 돈을 쓰셨겠다.”
주방비가 기쁘게 웃었다.
“황후마마께서 좋아하시니 다행입니다. 신첩은 평소 마마께서 세상의 진귀한 보물을 많이 보아 오신 탓에 신첩의 선물을 좋아하시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 아주 예쁘구나.”
장서열은 가만히 자리에 선 채 주 재인이 떠들면 부드럽게 응해 주었다. 그러나 말없이 주 재인을 보며 웃어 줄 뿐, 결코 그녀를 조로전에 들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잠시 후, 주방비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천진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렇다면 신첩,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눈으로 주방비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장서열은 이내 살짝 올렸던 입가를 내렸다. 그녀는 옥산호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