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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30)화 (330/449)

제330화

구염락이 손을 흔들자 어림군이 잠시 동작을 멈췄다. 그가 비아냥거리는 눈빛을 보내며 냉랭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따를 수 없다……? 짐은 황후를 위해 너희를 불러들였다. 황후가 너희들을 살려 준다면 사는 것이고, 죽이고 싶다면 죽는 것이다. 헌데 감히 원한을 품고 사람들을 꼬여내 황후를 비방해? 이게 죽을죄가 아니면 무엇이지?

서 귀인이 신형사에 끌려간 건 황후와 무관한 짐의 뜻이다. 심지어 황후는 그 사실을 알자마자 죽음의 문턱에서 그녀를 구해 냈다. 그런데 황후는 지금 잠이 들어 있으니, 오늘 짐이 너를 치워 버린다 해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겠지. 걱정 마라. 단칼에 베어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고통에 괴로워할 틈도 없게 해 주마. 여봐라! 끌고 가서 당장 베어 버려라!”

냉소를 지은 구염락이 미련 없이 손을 흔들었다.

양 재인은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신수가 훤하던 청년은 순식간에 악귀가 되어 그녀를 지옥에 밀어 넣고 있었다.

양 재인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며 큰 소리로 외쳤다.

“폐하! 살려 주십시오! 신첩의 잘못이 아닙니다. 신첩이 이들을 이끌고 온 것이 아닙니다! 폐하, 살려 주십시오!”

구염락은 아예 무시했다. 그의 시선은 벌벌 떨며 최대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여인들에게 향해 있었다. 입가에 비꼬는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조금 전 짐이 한 말을 다들 들었겠지.”

흐리멍덩한 눈을 하던 일곱 명의 여인들이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두려움에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인 그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들었습니다. 들었습니다…….”

구염락은 더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는 듯, 마치 조금 전 참수당한 여인이 아예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

“소리자. 조금 전 죽은 계집을 다른 하인으로 대체하라. 만약 황후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구염락이 입가를 치켜올렸다. 몹시도 사악하고 오만한 얼굴이었다.

“…다른 꽃들까지 전부 꺾어버릴 수밖에.”

아래쪽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여인들이 즉시 머리를 땅에 조아렸다.

“폐하의 분부를 받들어 절대 황후마마께서 모르시도록 하겠습니다! 노비들, 반드시 본분을 지키며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구염락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뒷짐을 지고 선 그는 기울어진 달빛을 바라보며 그런대로 기분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좋다. 처음 저지른 잘못인 데다 아직 나이가 어려 사리 분별을 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여 처벌은 각각 곤장 이십 대로 그치도록 하겠다. 앞으로 각자의 처소에서 치료에 힘쓰고, 황후가 출산하기 전까지 반드시 유용하고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 황후를 기쁘게 해라.

만약 누군가 황후를 즐겁게 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들리면 밥을 축낼 필요 없이 차라리 일찍 죽어 환생하는 편이 낫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재주껏 능력을 갈고닦아 황후를 보필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말을 마친 구염락은 사악한 표정으로 여인들의 얼굴을 힐끗 둘러본 뒤 뒷짐을 지고 걸음을 옮겼다.

조로전 밖이 돌연 고요해졌다. 때마침 불어온 밤바람에 여인들의 마음 또한 서늘해졌다. 가까스로 버티며 진정하려던 마음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소녀들은 조금 전 겪은 날벼락으로 인해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그저 한마디를 청했을 뿐이다. 눈에 보이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황제가 내린 명령이었다니!

심지어 황제는 이번 일로 양 재인을 참수하라 명했다. 그는 어떠한 변명도 용납하지 않은 채 손쉽게 그녀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한 여인의 일생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들은 황제가 죽이라면 죽는 것이었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라 하면 대체되는 목숨이었다.

여인들은 돌연 주변이 너무 춥다고 생각했다. 순진하게 기대를 품었던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여인들은 내심 참수형에 처해진 게 자신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두 가지 모순된 마음이 한데 얽히자 여인들은 순간적으로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 * *

사계절 내내 쾌적한 침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면서도 화려한 호사를 선물했다. 침대 위 여인은 옆으로 누운 채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검붉은 침구 위로 짙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늘어졌다. 강렬한 빛 속에서 피어난 눈처럼 새하얀 여인의 얼굴은 복숭아처럼 희고 부드러워 보는 이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냉담한 모습을 걷어 버린 구염락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침대 위의 여인을 주시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이 맴돌고 있었다. 이는 줄곧 초조했던 그의 마음을 깨끗하게 정리해 주었다.

구염락이 양팔을 벌리자 소리자가 그의 몸에 걸쳐진 용포를 벗겨 주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구염락은 여전히 장서열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만약 여러 가지 감정 중 하나가 사랑이라고 한다면,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은 편안함이었다. 이 편안함이야말로 바로 그가 바라는 사랑이었다.

일찍이 자신이 이러한 감정을 잘 몰랐을 때에도 그는 장서열의 곁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림만 그린다 해도 그저 편안하고 즐거웠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오늘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구염락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꼈다. 조금은 흥분이 되기도, 또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으나 가장 큰 건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구염락은 부드러웠던 장서열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침대 위에 눕자 소리자는 그의 신발을 벗기고 무거운 보라색 휘장을 내려놓았다.

구염락의 손이 얼음장 같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친 그가 깊이 잠든 여인을 응시했다. 다른 한 손으로 여인의 배를 어루만지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동시에 마치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는 듯 장서열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이를 본 구염락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웃었다. 부드러운 마음 한구석에 열매가 맺힌 기분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그것만으로 그녀에게 파묻히기 충분했다.

* * *

칠흑 같은 새벽, 훈련을 마친 구염락은 목욕을 마친 후 창가에 서서 글자를 쓰고 있었다. 검은 대나무가 그려진 흰색 장포 덕분인지 그는 명문가에서 대대손손 심혈을 기울여 길러낸 유학자처럼 보였다. 청년의 얼굴은 초조한 기색 없이 밝았다.

탁자 위에 놓인 자첩字帖(글자첩)은 비록 낡았지만 보존이 잘 되었다는 걸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마주한 구염락의 붓놀림은 날카롭다 못해 자첩에 쓰인 매끄러운 글자들보다 더욱 예리했다.

구염락은 이토록 명필인 장서열이 어째서 책을 베껴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지 의아했다. 심지어 집에서 온 편지조차 궁녀를 시켜 옮겨 쓰게 했기에 그녀가 직접 붓을 들고 글자를 쓰는 일은 드물었다. 그녀는 좀처럼 뛰어난 능력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장서열의 차분한 모습을 떠올린 구염락의 입가에 또 어김없이 미소가 떠올랐다. 새로 종이 한 장을 펼쳐 놓은 그가 오래된 자첩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문득 붓을 돌릴 때 보여 주던 그녀의 화려한 기교가 그리워졌다.

구염락의 손에서 글자들은 종종 지나치게 예리해졌기 때문에 장서열의 필체가 지닌 차분한 느낌이 사라지곤 했다. 따라서 수많은 문인과 나이 많은 학사들이 아무리 칭찬을 늘어놓아도 구염락은 항상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무심하면서도 여유로운 그녀의 태도를 따라가지 못 하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장서열을 떠올린 구염락이 자기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순식간에 부드러워진 제왕의 기개는 청량하고 소탈한 청년의 느낌을 주었다.

하품을 하며 나오던 장서열은 채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패기 넘치는 청년의 자태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만한 눈빛을 숨긴 채 생기발랄한 얼굴을 한 그는 젊은 나이에도 당당히 천하를 손에 넣은 남자였다.

품격 있는 그를 보며 장서열은 문득 내의 차림으로 전혀 갖춰 입지 않은 자신이 그의 옆에 서기가 다소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옅은 미소를 지은 장서열이 몸을 돌렸을 때였다.

몹시도 그리워하던 모습을 발견한 구염락이 재빨리 붓을 내려놓았다. 그는 이제 막 잠에서 깬 기색이 역력한 장서열을 감싸 안고 붓과 먹 앞으로 데리고 왔다.

순식간에 장서열은 산뜻한 박하향에 둘러싸였다. 그가 주는 무해한 분위기와는 또 다른 강렬한 사내의 향이 흘러들었다. 그 속에 봉인된 폭발력이 장서열의 마음을 뜨겁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애교 섞인 여인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폐하, 아직 세수도 하지 않았습니다…….”

구염락의 마음에도 서서히 불길이 타올랐다. 하지만 장서열의 몸을 고려한 그가 애써 음란한 생각을 억눌렀다.

“급할 게 뭐가 있어. 남편의 글자를 감상한 후 생각해도 늦지 않아. 자, 부인. 그럼 평가를 해 주시지요.”

장서열의 시선이 놀라운 듯 탁자 위에 놓인 오래된 자첩으로 향했다. 그녀는 왠지 민망함을 느꼈다.

“글자는 사람의 마음을 닮는다더니, 폐하의 글자 역시 점점 더 훌륭해지는군요.”

장서열의 시선은 여전히 과거에 자신이 쓴 미숙한 글씨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가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방한 글씨였던 탓에 확실히 구염락 특유의 당당함과 대범함이 부족했다.

등 뒤에 선 구염락이 장서열을 부드럽게 안았다. 어깨 위에 그의 턱이 걸쳐지는 것과 동시에 귓가에 부드러운 숨결이 떨어졌다. 꽃향기가 물씬 풍기는 봄날처럼, 아내를 품에 안은 그가 부드러움을 만끽했다.

“그래도 짐은 네 실력만 못한 것 같아… 아니면, 네가 내 손을 잡고 써보는 건 어때.”

구염락이 당당하게 장서열의 손을 잡았다. 마음속 깊숙이 솟구치는 욕망을 눈 속에 깊이 숨긴 채였다.

수줍은 듯 미소를 지으며 장서열이 고개를 돌렸다. 붓대를 이용해 멀찍이 구염락을 떨어뜨린 그녀가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엉뚱한 생각 말아요. 본궁은 세수를 하러 갈 테니 혼자 노십시오.”

황후의 말에 한편에 서 있던 농교와 완정이 즉시 다가와 주인의 섬섬옥수를 잡았다. 무심코 고개를 든 그들은 미소 띤 황제의 눈과 마주치자 깜짝 놀라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감히 다시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참 뒤, 세수를 마친 황후의 머리카락을 정성껏 손질해 주며 두 사람은 그제야 황제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오늘 하얀 장포를 입으셨잖아?’

달빛 같은 장포 덕분일까. 포악한 모습을 지운 황제는 의젓한 명문 세가의 공자처럼 고상하고 쾌활하기 그지없었다.

장서열은 나른하게 목욕통에 기대어 있었다. 차분하고도 편안한 얼굴이었다. 조금 전 수줍어하던 모습을 지운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편안히 흐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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