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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29)화 (329/449)

제329화

문득 뻗어 나온 손이 구염락의 손을 잡았다. 장서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는 그를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의 뺨이라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제발 정신을 좀 차리란 말이야…….

그토록 거만하던 구염락이 어쩌다 이렇게 애원하는 처지가 된 걸까.

장서열이 우는 모습에 구염락은 곧장 넋이 나갔다.

“서열아, 서열아… 울지 마, 제발 울지 마…….”

하지만 구염락은 차마 그녀를 놓아 주겠다는 말만큼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가 눈물을 보인다 해도 구염락은 결코 장서열을 보낼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주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그녀를 붙잡아 둘 방법이 없었다.

구염락은 타협을 택했다. 원치 않았지만, 차라리 그 태감이 장서열 옆에 있길 바랐다.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 이미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만약 두 사람이 껴안고 있는 장면을 다시 보게 된다면 미쳐 버릴 테지만,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면 마땅히 참고 양보해야 했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눈을 뜬 그녀는 그토록 오랜 시간 자신의 곁을 지켜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붉어진 눈시울로 온통 상심한 그를 보니 알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그는 과거 자신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원망을 받아 온 사람이었다. 지금은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서열아…….”

장서열을 바라보는 구염락의 시선은 침착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를 본 장서열이 다시 눈물을 흘리며 힘없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바보.”

손을 뻗은 장서열이 구염락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순간 마음속이 환해지는 걸 느낀 그녀가 슬퍼하며 웃었다.

구염락은 마음이 벅차올랐다.

“날 용서하는 거야……? 날 용서했어……! 서열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정말 잘못했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다시는 마음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더 이상 같은 공간에 꿇어앉을 수 없던 두 명의 태의 또한 끝내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대청으로 나온 이들은 참혹한 전각을 수습하는 하인들을 보자 갑자기 너무 큰 격차에 할 말을 잃었다. 엉망진창이 된 전각이 과연 황후 때문인지, 아니면 황후 앞에서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황제가 벌인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로전은 적막했다. 청소하는 소리를 제외하면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 이어졌다.

왕 마마는 줄곧 청소를 지휘했다. 대청에는 의자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식탁에 마련된 저녁 식사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채 유일하게 새우만이 바닥에 쏟아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깨끗하게 치운 상태였다.

조금 전까지 문밖을 지키고 있던 왕 마마는 두 부부의 싸움을 거의 다 들었다. 다툼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놀랐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건 황제의 마음을 꽉 채운 황후의 존재였다.

이미 여러 차례 보고 느낀 사실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 마마는 황제가 어째서 황후에게 그토록 지극하게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리도 많은데 말이다.

물론 황후는 아름답고 단정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일국의 제왕이 이렇게까지 목을 맬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분명 사실이었다. 황제는 짧은 기간 한 국가를 완벽히 장악한 제왕답게 그의 여인을 장악할 때에도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황제의 행동이 아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왕 마마, 어찌 된 일이오?”

말끔히 치워진 대청을 보며 호 태의가 걱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는 자글자글 주름진 얼굴을 든 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전부터 알고 지낸 왕 마마를 바라보았다. 그런 호 태의를 힐끗 쳐다본 왕 마마가 발걸음을 옮겼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송 태의가 하하 웃었다. 그가 친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런, 추파를 던진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무시를 당하는군.”

호 태의는 뒷짐을 지고 선 채 마치 우스갯소리를 들은 양 행동했다.

“쓸데없는 소리.”

동시에 그들 뒤에 나타난 왕 마마가 차갑게 말했다.

“확실히 쓸데없는 소리로군요. 호 태의, 폐하께서 들어와 마마께 놓은 침을 뽑으라 하십니다.”

* * *

장서열은 구염락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은은한 촛불이 두꺼운 보랏빛 휘장을 뚫고 들어와 그녀의 얼굴 위로 희미하게 번졌다.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장서열의 속눈썹을 응시하며 구염락은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과분하다는 생각에 단 한 번도 바란 적 없던 행복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니 누구와도 나눌 필요 없어요.”

구염락은 아직도 그녀에게서 이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저와 명정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이 다 당신 같은 줄 알아요? 말로는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후원 가득 아름다운 여인들을 데리고 있는 건 당신이잖아요…….”

그 말은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았다.

“명정은 이전에 알던 사람이에요. 그때는 당신이 없었고요……. 한때 마음을 내어 준 적이 있다는 건 부인하지 않지만…….”

장서열은 구염락을 바라보며 달콤하게 웃었다.

“당신은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당신이 있는데, 내가 어찌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겠어요.”

구염락의 가슴에 기댄 장서열은 진지한 얼굴로 힘차게 뛰는 그의 심장박동을 듣고 있었다.

“구염락, 당신의 입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듣고 싶지 않아요.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 뜻을 굽히지도 말아요. 당신은 대주국의 제왕이자 세상에서 가장 오만해야 마땅한 존재예요. 아무리 나라고 해도, 당신을 이렇게 자책하게 만들 자격이 없어요.”

구염락은 반박하고 싶었다. 그런 구염락을 보며 장서열이 힘없이 웃었다.

“내 말 들어요. 당신이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겨야만 나 또한 당신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요. 명정의 일은 내가 잘못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니, 날 믿어 줘요…….”

구염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서열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가슴에 기댔다. 그의 손에서 죽과 음식을 조금 받아먹은 그녀는 졸음이 몰려오자 곧장 잠이 들었다.

구염락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여전히 품에 장서열을 안은 채 그는 그녀가 했던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었다. 드디어 가슴에 밝은 빛이 비치는 듯했다.

‘서열이는 나를 사랑해.’

이 말보다 그를 더 안심시키는 말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자책에 휩싸여 있었지만 계속해 그녀를 안아 주었다. 설령 그 순간 그녀가 동요했다 한들 또 어떠한가. 그녀는 자신을 떠날 수 없었다.

이제 구염락은 스스로가 가소로웠다. 그런 쓸데없는 일로 오후를 낭비하다니.

구염락은 장서열을 조금 더 꽉 껴안았다. 가슴이 뭉클했다. 귓가에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이 떠나지 않았다.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계속해 안겨 있는 것이 불편한 듯 장서열은 신음 소리와 함께 몸을 돌려 구염락의 품에서 빠져나와 안쪽으로 굴러갔다.

구염락이 다가가 다시 장서열을 안으려 할 때였다. 밖에서 침대 휘장을 세 번 잡아당긴 소리자가 작은 목소리로 고했다.

“폐하, 조로전 앞에 몇몇 후궁들이 꿇어앉아 폐하께 간청드릴 말이 있다 하옵니다.”

말을 마친 소리자는 혹시라도 잠든 황후마마를 깨울까 염려되어 바로 입을 닫았다.

구염락의 안색이 일시에 나빠졌다. 장서열에게 뻗으려던 손을 거둔 그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구염락이 몸을 일으켰다. 다급히 다가온 소리자가 주인을 위해 옷을 갈아 입혀 준 뒤 신발을 집어 들었다.

잠시 후, 어두운 밤을 뚫고 구염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늘어선 궁등이 조로전 바깥을 밝게 비췄다. 일순간 땅 위에 엎드린 여인들이 각양각색의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줄곧 자리를 지키고 있던 왕 마마는 황제가 도착하자 의흔을 남겨둔 채 괜한 의심을 사지 않도록 자리를 떠났다.

“폐하, 신첩들을 위해 공명정대한 판단을 내려 주시길 간청드리옵니다. 설령 신첩이 잘못한 일이 있다 해도, 오늘처럼 황후마마께서 마음대로 처분을 내리신다면…….”

여인은 고상한 손길로 손수건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붉어진 눈시울보다 더욱 붉은 안색이었다.

조로전 대문 위에 걸려던 등롱이 구름과 비룡이 그려진 금포를 밝게 비춰 주었다. 수려하면서도 훤칠한 자태가 백옥 대문 아래 서 있었다. 위엄 넘치는 황제의 기개 그 자체였다.

말을 마친 여인의 시선이 슬그머니 위를 향했다. 그녀는 물결이 넘실대는 듯한 눈으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여인의 마음은 순식간에 함락되어 버렸다.

“폐하, 어질고 지혜로우신 황후마마의 뜻을 신첩들은 감히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허나 오늘 마마께서… 마마께서 서 귀인을…….”

여인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폐하, 폐하께서 신첩과 서 귀인을 위하여 부디 영명한 판단을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유는 알고 죽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 않사옵니까. 서 귀인처럼 영문도 모른 채로 죽을 위기에 처할 수는 없습니다.”

동시에 신분에 걸맞은 옷차림을 한 여덟 명의 여인이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여인들은 슬피 울며 정중히 청했다.

“폐하, 부디 폐하께서 신첩들을 위하여 영명한 판단을 내려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구염락은 단정히 꿇어앉은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냉담한 시선이 슬픔에 젖은 얼굴들을 훑고 지나갔다.

문득 장서열이 후궁들에 대해 내뱉은 말이 떠올랐다. 과연 여인들은 열여섯 정도의 꽃 같은 나이에 수려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회임 육 개월 차에 접어든 장서열과 대비되는 모습이라 확실히 눈에 거슬렸다.

구염락이 냉소를 지으며 옷소매를 떨쳐냈다.

“여봐라! 이 계집이 오밤중에 짐을 괴롭히며 허튼소리를 지껄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황후를 비방하고 있다. 당장 끌어내 목을 쳐라!”

그를 지키고 서 있던 어림군御林軍(황제의 근위군)이 즉시 명을 받았다.

“예, 폐하!”

무릎을 꿇고 있던 여인들의 눈이 일시에 휘둥그레졌다. 순간 우는 것조차 잊어버린 여인들이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그녀들의 눈은 온통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건장한 사내들이 어깨를 붙잡고 끌어 내려 하자 그 즉시 단정한 모습을 지운 여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놔라! 놓으란 말이다! 폐하, 신첩은 양 지부知府(부지사)의 여식입니다! 신첩은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대관절 신첩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죽이라 명하시옵니까! 폐하! 폐하는 일국의 군주이십니다! 신첩을 이리 대하실 수는 없습니다! 신첩은 따를 수 없습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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