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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28)화 (328/449)
  • 제328화

    장서열을 배를 쓰다듬으며 복잡한 눈빛으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일순간 그의 다리가 휘청였다. 그녀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해 주고 싶어졌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 때문에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구염락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지는 것과 동시에 칼로 깎아낸 듯한 외모가 더욱 메마르고 냉담해졌다. 걸음을 진정시킨 그가 꿋꿋한 자세로 대청 중앙에 섰다. 그는 침착하고 거만한 눈빛으로 소나무처럼 꼿꼿이 몸을 곧추세우고 있었다. 마치 인간을 무시하던 천신이 속세로 떨어진 후에도 여전히 존엄을 지키려는 것처럼.

    구염락이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그녀를 원망하냐 묻는다면…….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서열 누님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모든 사랑을 바친 서열 누님이었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은 뒤, 자신을 위해 아이를 낳아 키우게 만든 여인이었다.

    입궁한 그날부터 지금껏 가냘픈 모습으로 한 번도 반항을 한 적이 없었기에 잊고 있었을 뿐, 장서열은 과거 거침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던 여인이었다. 구염락은 그녀가 궁에 들어오면 영원히 미소를 지은 채 더는 반항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구염락은 궁지에 몰려 용기를 내는 장서열을 보았다. 부드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원래부터 무정하고 냉담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그녀는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구염락은 오랜 세월 줄곧 장서열을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영원히 장악할 수 없던 햇살. 유년 시절 내내 우러러보던 여인이 정말 그가 보고 싶어 하던 그 여인이었을까.

    자신이 부축해 주는 것을 탐탁잖아 하는 구염락의 모습에 장서열은 더 이상 그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 자신의 딸을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 둔 남자에게 얼마나 대단한 감정이 있겠는가. 자신을 쉽게 냉궁에 가둘 수 있는, 자신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기뻐한 적이 없었던 남자에게 이제 와 얼마나 지극한 감정이 남아 있겠는가.

    장서열은 불쾌한 감정을 억눌렀다. 이쯤 되자 그를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마음이 빠르게 올라왔다. 유일하게 멀쩡한 의자 위에 앉은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조금씩 숨을 돌렸다. 붉은 얼굴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장서열은 피곤했다. 더 이상 그와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지.’

    그런 장서열을 보며 구염락은 마음속 괴로움이 서서히 공포로 변해 가는 걸 느꼈다. 무서웠다. 그녀를 곧 잃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이미 잃었고, 잡을 수 없는지도 모른다. 장서열은 이제껏 감춰 온 가면을 한 겹씩 벗으며 그녀가 얼마나 몰인정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몸을 돌린 구염락이 새우 한 접시를 가지고 돌아왔다.

    “…먹어. 그래야 기운을 차리지.”

    조금 전 강경했던 눈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어느새 반짝이는 눈망울이 있었다. 폭발적인 힘이 솟구치던 몸은 장서열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간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기탱천한 모습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채였다.

    마치 시든 이파리처럼 구염락은 장서열의 발밑에 앉아 초조한 얼굴로 조금 전 벌인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사죄했다. 부끄러움을 잘 타는 사람인 양 그는 감히 그녀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먹어 둬.”

    구염락을 바라보던 장서열의 눈이 다시금 흐려졌다. 구염락이 들고 있던 쟁반을 집어 던진 장서열이 자리에서 일어나 흐느끼며 큰소리로 질책했다.

    “일어나요! 당신은 구염락이지 명정이 아니잖아요! 당신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한테 빌어요! 당신은 일국의 군주예요! 천하의 제왕이라고요!”

    그는 과거에 그녀가 비참해지면서까지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많은 여인들이 진심으로 떠받들던 남자. 단 한 번이라도 사랑받기 위해 그녀들이 줄을 섰던 사내. 수많은 문인과 무인들이 충성을 맹세했던 군주.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장서열은 언제나 높은 자리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는 구염락을 보고 싶었다. 이렇게 잘못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비굴하게 굽실대는 구염락이 아닌, 드높은 존엄을 세우고, 다른 어떤 것보다도 체면을 중시 여기며, 단 한 차례의 분노만으로 셀 수 없는 시체들을 땅에 쓰러뜨리는 제왕인 구염락을.

    순간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장서열이 슬피 울었다. 그녀는 배를 만지며 큰소리로 흐느꼈다. 무언가가 가슴을 찌른 것처럼 슬프기 그지없었다. 장서열은 차라리 이대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황한 구염락이 다급히 장서열을 껴안고 태의를 불렀다.

    “서열아! 서열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묻지 말았어야 했어. 너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마음 졸이지 마. 울면 안 돼. 배가 아픈 거야? 서열아…….”

    울면 울수록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도 모자라 배를 감싸고 있는 손을 덜덜 떨고 있자 구염락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구염락은 애가 탄 나머지 차라리 장서열의 앞에서 자신이 죽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구염락은 장서열을 품에 안은 채 단단히 손을 잡고 급히 일으켜 세우려 했다. 품에 안긴 여인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구염락은 심장이 옥죄어 오는 걸 느꼈다. 그는 장서열을 안은 채 계속해 태의를 외치며 쉴 새 없이 그녀를 달랬다.

    “내 잘못이야! 다 내 잘못이야!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당연한 건데… 네가 궁에 들어온 것도 다 내가 막무가내로 너를 얻으려 했기 때문인데… 앞으로 다시는 너를 몰아세우지 않을게. 다시는 안 그럴게…….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지? 그를 너에게 보낼게… 제발 울지 마. 흥분하지 말고 숨을 들이마셔. 숨 쉬어… 울지 마… 내가 그와 너를 나누도록 할게. 그렇게 할게…….”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구염락은 맥이 풀린 허리를 받친 채 그녀의 몸을 껴안고 있었다. 울다 지친 그녀의 몸으로 계속해 뜨거운 기운이 전해졌다.

    갑자기 손을 내민 장서열이 구염락을 안으며 더욱 슬프게 울었다. 의식을 회복한 상태에서 마지막 말을 듣자 마음이 복잡해졌다.

    구염락… 구염락.

    너무 큰 감정의 동요를 견디지 못한 몸이 결국 혼절했다. 구염락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서둘러 달려온 태의와 궁녀들은 엉망진창이 된 대청 중간에서 서로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목격했다. 찢어질 듯한 황제의 울음소리에 농교를 포함한 하인들은 절로 눈물이 앞을 가리는 걸 느꼈다.

    ‘황후마마께서 돌아가신 거야?’

    대청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아무리 냉정한 왕 마마라 해도 황제의 고통 앞에서는 냉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호 태의였다. 눈앞의 사람들을 제치고 나선 그가 황제의 품에 안겨 있는 황후를 향해 달려갔다. 황제에게 황후를 내려놓으라 말할 틈도 없이 바로 맥을 짚은 호 태의는 잠시 후, 마침내 한숨을 돌렸다.

    다급히 식은땀을 닦은 호 태의가 주위 사람들에게 한숨 돌리라는 눈빛을 보냈다. 다른 태의들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한 그가 그제야 슬픔에 잠겨 있는 황제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폐하, 황후마마를 부축하여 내전으로 들게 하시지요. 소신이 황후마마께 침을 놓겠습니다.”

    그러나 구염락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슬프고 절망한 모습으로 혼절한 장서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점점 차가워지는 몸이 무엇인가 암시하는 것만 같아 그는 감히 그녀에게서 손을 놓지 못했다.

    몇 번을 반복해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결국 호 태의는 송 태의와 함께 몰래 황제의 등에 침을 한 대 놓았다.

    구염락이 고개를 들었다.

    놀란 호 태의와 송 태의가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호 태의가 지혜를 발휘해 조금 전 고했던 말을 재빨리 한 번 더 반복했다.

    정신을 차린 구염락의 표정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기이했다.

    “잘됐다! 참으로 다행이야…….”

    침을 놓는다는 건 곧 그녀와 아이가 괜찮다는 뜻이었다.

    ‘나 때문에 서열이가 화가 나서 죽은 줄만 알았어…….’

    장서열은 빠르게 내실로 옮겨졌다.

    구염락은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장서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순간적인 충동이 불러온 자신의 이기심을 계속해 후회했다. 모든 행동을 뉘우치는 동안 그는 조금 전 장서열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던 말도, 그 순간 어두워진 마음도 모두 잊어버렸다.

    호 태의는 이토록 희한한 제왕을 참고 있는 스스로가 대견했다. 다행히 황후를 향한 황제의 애정에 여러 해 동안 단련이 된 덕분인지 대처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끊임없이 속삭이는 황제의 참회 속에서 과감하게 황후에게 침을 놓던 그가 마지막 하나를 이마에 꽂으려는 순간이었다.

    장서열이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구염락은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만약 장서열의 몸에 꽂혀 있는 침을 건드릴까 걱정하지만 않았다면 당장 앞으로 달려가 그녀를 껴안았을 것이다.

    촛불이 방 안을 환히 밝혀 주었다. 바깥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장서열이 힘없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 속으로 긴장하며 울던 구염락의 눈이 들어왔다. 순간 무엇인가에 붙들린 듯 가슴 속으로 씁쓸한 감정이 조금씩 퍼져 나갔다. 그는… 그는…….

    구염락은 호 태의가 시선을 돌린 틈을 타 재빨리 눈가의 눈물을 닦아냈다. 구염락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정신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마. 아직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서 휴식을 취해야 해. 아이도 무사해, 걱정하지 마. 내가 잘못했어… 내가 죽일 놈이야. 지금은 나 같은 놈이랑 상종하지 말고 기운을 차리면 곤장 오십 대를 쳐. 앞으로 짐이 감히 망발을 하는지 꼭 두고 보도록 해…….”

    호 태의와 송 태의는 귀가 멀어 버릴 것만 같았다. 밖에서 그리도 냉혈한인 황제가 유독 황후의 앞에서 지극정성인 모습은 몇 년을 보아도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특히 이렇게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때면 이 남자가 정말 그들이 알고 있는 그 황제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구염락의 말에 장서열은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토록 애절한 그를 마주할 면목이 없었다.

    장서열이 듣고 있다는 걸 안 구염락이 그녀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애원했다.

    “서열아… 화내지 마. 내가…….”

    고통에 못 이겨 고개를 숙인 구염락이 마음을 굳게 먹은 듯 다시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그를 불러올게. 내가 없을 때는 그가 너를 모시면 되니까. 그럼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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