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7화
장서열의 한 마디에 구염락은 괴로워 미칠 지경이 되었다. 온종일 분위기를 그르치지 않기 위해 자신을 굽히고, 그녀가 하자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며 비위를 맞췄다. 그런데 평온한 결말은커녕, 돌아온 건 고작 이런 꼴이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질투를 하든 자신의 후궁에게 치욕을 주든, 심지어 제멋대로 거만하게 구는 것까지 다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쉽게 ‘폐후’를 운운하며 서로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었다.
분노한 구염락이 외쳤다.
“장서열, 끝까지 네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남을 비난하는군! 폐후? 꿈도 꾸지 마. 너는 나의 황후야! 영원히 이 궁 안에서 내 아들 딸을 낳고 키워야 하는!
내가 먼저 죽는 날, 너도 나와 함께 순장될 테니 애초에 태후 따위는 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감히 명정과 ‘먼 훗날’을 보낼 기대 따위도 하지 마! 내겐 너희가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게 만들 방법이 차고 넘치니까!”
핏발이 선 눈을 부릅뜬 구염락의 온몸은 분노로 가득했다. 난폭한 기운이 장서열을 향해 몰아닥쳤다. 한 마디 한 마디 그녀의 어두운 속마음을 책망하는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제왕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장서열은 두려웠다. 만약 구염락이 ‘명정’이라는 두 글자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겁이 난 나머지 그대로 무릎을 꿇고 부디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빌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구염락은 금기어를 입에 올렸다. 그의 입 밖으로 나온 ‘명정’이라는 두 글자는 언제나 이성적이었던 장서열을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구염락을 바라본 장서열이 비아냥거리듯 웃었다.
“역시 알고 있었군요.”
어쩐지 그는 오늘따라 버럭 화를 냈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렇게 힘을 들여 인내할 필요가 있으신지요? 폐위를 시킬 것도 없이 당장 저를 죽이시지요. 그렇다면 스스로를 모욕하면서까지 굳이 ‘먼 훗날’을 언급하실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구염락은 도도하기 짝이 없는 장서열의 얼굴을 한 대 때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여전히 당당하군! 여전히 당당해! 이런 상황에서도 짐에게 반박을 하다니, 정말이지…….”
구염락은 예상했던 변명을 듣기는커녕 ‘역시’라는 말이 나오자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시인했다. 빌어먹을, 감히 시인을 하다니!
대체 자신이 그녀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단 말인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일개 태감을 들먹이며 자신을 망신 준단 말인가.
차라리 서풍엽이나 권서함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헌데 일개 태감을 껴안은 채 진심으로 우는 자신의 여인을 봐야 한다니…….
그 모습을 본 순간 자신이 얼마나 당황했으며, 얼마나 그 사실이 원망스러웠는지 과연 그녀는 알까? 태감이라니. 고작 태감 따위에게!
분노가 지나가자 거대한 공포가 다가왔다. 너무나 공포스러웠던 나머지 구염락은 심지어 장서열과 그 태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감히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남근도 없는 남자를, 심지어 장서열이 울면서 안아 주었다.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설마 적당히 분위기를 맞춰 준 걸까? 아니면 태감이 약속한 아름다운 미래에 그녀가 감동이라도 한 걸까?
구염락은 그 일에 감히 입을 뗄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서풍엽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것뿐이었다. 그는 앞으로 장서열이 맞닥뜨릴 미래에, 적어도 서풍엽보다는 잘해 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태감 따위가 대담하게 나타나 자신의 사랑을 멸시한 것도 모자라 그가 자신의 황후를 버릴 거라 비웃었다.
사랑?
구염락은 하늘에 고함을 쳐서라도 이 구역질 나는 단어를 영원히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
“장서열. 내가 진정 스스로를 모욕한 게 맞는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나에게 먼저 모욕을 선사한 건 너야. 어제 너는 감히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어!”
“구염락!”
장서열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제발 그만 좀 해요!”
“아니! 이미 이렇게 다 말해 버린 거,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
구염락은 필사적이었다.
“이 세상에서 너를 제일 잘 아는 건 나야! 네가 울거나 슬플 때, 연정을 느낄 때, 감동했을 때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너보다 너를 더 잘 아는 건 나라고! 어젯밤 난 창문 밖에 있었어. 일찍 돌아와 너를 놀라게 해 주려다 정작 놀란 건 나였지. 짐의 황후가 내 눈앞에서 버젓이 그런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구염락의 말은 원망으로 가득했다. 살기를 품은 채 충혈된 눈이 분노로 번쩍였다.
“그런데도 짐은 우리의 정을 생각해서 묻지 않았어! 그런데 당신이 먼저 나를 질책해? 짐이 대체 뭘 잘못했지? 내가 황후를 안고 싶은 게 잘못인가?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나를 몰아붙이다니!”
격노한 구염락 앞에서 장서열은 굴욕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당장이라도 입을 벌려 외치고 싶은 말들이 이상하게 입가에만 맴돌았다. 그녀는 분노로 폭주하는 구염락을 매섭게 노려보면서도 억울함에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명정은 과거였다. 그들이 놓아버린 과거. 그녀는 잘못된 선택을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염락이 이를 가지고 트집을 잡는다면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구염락은 그런 장서열을 보며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세상에서 너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제발 좀 보라고!
하지만 장서열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자 구염락은 돌연 온몸이 굳어 버리는 걸 느꼈다. 가슴 속에 굳게 쌓아 둔 보루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 순간 구염락은 울먹이는 장서열의 눈을 감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이 새겨져 어떻게든 그녀의 노여움을 사고 싶지 않게 했던 바로 그 얼굴.
그런데 그런 그녀가 지금 자신 때문에 울먹이고 있다. 이는 구염락이 이제껏 그토록 지키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되묻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럭 겁이 난 구염락은 그 즉시 장서열의 눈빛을 피해 도망가고 싶었지만 발걸음을 떼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녀를 위로할 방법을 찾을 수 없어 애가 탔다. 또한 이대로 자신이 떠나 버리면 그녀가 정말로 울어 버릴까 두려웠다.
그리고 그건 구염락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여 준다면 어제의 일은 전부 없었던 일로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일이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장서열은 참담한 기분이었다. 애초부터 선의가 아니었기에, 훔친 물건이었기에 이런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그녀는 구염락에게 떳떳하지 못할 만큼 양심 없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전생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비록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그 콧대 높고 안하무인인 남자가 자신을 위해 정절을 지켰다. 모든 여자들이 그를 원하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그가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것이 유일하게 그녀의 예상을 빗나간 일이었다. 앞날을 알고 있으면서도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상황 앞에서 장서열은 난처했다. 한때 그녀는 구염락보다 더 열심히 발버둥 쳐 보기도 했으나 하필 상대는 구염락이었다. 그토록 무시하고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새겨져 떨쳐지지 않는 사람.
장서열은 이 난처한 상황을 원망했다. 더불어 전생에서 자신이 구염락에게 주었던, 결코 잊지 못할 치욕을 원망했다.
그녀라고 이렇듯 다시 환생하여 또다시 그와 혼인하게 될 거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토록 온전하지 않은 영혼이 난감한 상황을 겪어온 그녀의 몸에 붙어있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장서열은 자신이 다시 구염락 옆에 서서 그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정신이 또렷하다 한들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어떤 것들은 제멋대로 심어져 자연스럽게 자라 열매를 맺었다. 더 이상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건 그녀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 낸 그녀에게 어느덧 사랑은 하찮은 것이 되어버렸다. 장서열은 남은 평생을 이렇게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명정을 만난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다시 그를 마주했을 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더러운 마음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선을 넘지 않았으며,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줄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필이면 그 모습을 구염락에게 들키고야 말았다.
어쩌면 하늘의 뜻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가져서 안 되는 것들은 아무리 가지려 노력해도 헛수고니까.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건 우연히 손에 넣었다고 해도 평생을 기대할 수도, 곁에 둘 수도 없다.
장서열은 자신을 아껴 주는 사람에게 미안해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어쩌면 상대방에게 다시 한번 치명적인 고통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서열은 운명이라 여기고 단념하기로 했다. 어쨌든 이제 금용과 장신성은 자신이 권세를 잃는다고 해도 더는 얻을 것이 없었다.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장서열은 자신에게 깊이 얽혀 있는 두 생의 기억과, 본래 자신의 사랑이 아니었던 이 남자를 모두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이제는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생각할 때였다. 설령 죽는다고 해도 깨끗하게 이 덧없는 일생을 마무리할 것이다.
장서열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배를 어루만지며 결연히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어쩌면 우리는 애초에 함께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인지도 몰라요.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당신은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어요.”
장서열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했다. 정을 끊기 시작한 여인은 궁지에 몰린 짐승이 용기를 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국 완전히 이성을 잃은 구염락이 장서열을 제외한 모든 물건들을 던지고 부수기 시작했다. 그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꿋꿋하게 서 있는 장서열을 노려보았다. 조금만 건드려도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구염락은 후회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 아니었던가. 결국 그는 가장 바라지 않던 결과를 맞이했다.
욕심이었다. 오 년을 넘게 매일을 함께한 탓에 스스로를 너무 과신했다.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친 나머지 변하지 않을 감정을 추궁해 버렸다.
서열이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천성적으로 강인하고 냉정한 여인이었다. 장서열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을 줄곧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심지어 구염단신도 황후의 자리를 약속하고도 그녀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구염락 자신이 뭐라고, 어떻게 모든 것을 준다는 이유로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구염락은 장서열을 사랑했다. 심지어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사랑했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것만큼은 견딜 수 없었다.
구염락이 하늘을 보며 웃었다.
“사랑하지 않아… 하하,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 너는 원래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