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6화
구염락이 서둘러 잘못을 인정했다.
“다른 뜻은 없었어. 조정에서 수녀 선발을 논의하기에 그대로 내버려 둔 것뿐이야.”
구염락이 숨이 차서 씩씩대는 장서열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후궁들 중에 너를 즐겁게 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 누군가 네 옆에서 기분전환을 시켜 준다면 좋을 테니까.”
순간 왕 마마는 손에 든 쟁반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도록 얼른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음식을 차리던 하인들은 왕 마마의 말을 듣기도 전부터 이미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서열은 가증스러운 구염락을 찔러 죽이고픈 충동까지 들었다. 천연덕스러운 얼굴은 얼간이가 따로 없었다.
“기분전환? 지금 이게 기분전환입니까? 후궁들이 매일 하릴없이 내 아이의 아버지 침대에 기어오를 궁리나 하고, 시시때때로 본처를 욕하도록 말이지요? 그럼 본궁 역시 폐하께 그런 남동생들을 몇 명 만들어 드리지요. 폐하께서 심심할 때 기분전환을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던 왕 마마가 차리던 음식을 내버려 둔 채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그간 수많은 주인을 모셔왔으나 감히 황제에게 이런 폭언을 퍼붓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구염락은 분노한 나머지 온몸의 털이 다 쭈뼛쭈뼛 서는 걸 느꼈다.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대여섯 명의 소름 끼치는 사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불안감에 마음이 술렁였다.
“그만해! 장서열, 네가 싫으면 다 내쫓으면 돼.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다니! 연경 바닥에 있는 것들 전부 거세시켜 버릴 거야!”
장서열은 구염락 때문에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대체 이야기의 핵심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제 와서 당신이 쫓아내라고 하면 다 쫓아낼 수 있는 거예요? 대체 후궁들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설마 당신의 말 한 마디로 후궁들의 일생이 결정되어도 상관없다 여기는 건 아니겠지요?”
구염락이 재빨리 받아쳤다.
“아니라는 거야?”
“당연히 아니지요! 다들 집에서 애지중지 키운 딸입니다. 이렇게 못살게 굴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고요! 폐하, 그러고도 정말 마음이 편하십니까?”
구염락은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들을 하찮게 여기는 게 뭐가 대수냐는 눈빛이었다.
구염락의 화를 돋운 건 장서열이 뱉은 ‘남동생’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그 말만 하지 않았으면 됐다.
구염락이 무서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누구지?”
상대하기 싫은 듯 입을 다문 장서열을 보며 구염락이 스스로 답했다.
“나는 이 나라의 황제야. 그 여인들의 미래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천신만고 끝에 황제가 되었는데, 여인 몇쯤 못살게 구는 게 뭐가 대수지? 그럼 무슨 재미로 황제를 하라는 거야?”
“재미없으면 내려오시지요.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오르면 됩니다!”
농교가 쾅 소리를 내며 빠르게 문을 닫았다. 지금은 아가씨가 차를 마실 때가 아니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죽을 지경인데 이 마당에 뭘 마시겠는가.
구염락은 배 속의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흥분한 아내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아니. 나는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해. 어느 날 네가 도망이라도 치면 이 자리에 있어야만 편히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순간 장서열의 마음이 떨렸다. 그녀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희망을 버리고, 한평생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남자가 지금 그렇게 꿈에 그리던 달콤한 말을 하고 있다. 충성스럽고 지조 있게, 자신에게 돌진한다.
하지만 장서열의 마음은 여전히 따뜻해지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못 박힌 가슴을 안은 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을 나를 사랑하지 않아…….’
장서열은 무의식중에 언제나 이렇게 생각해 왔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거야……. 오직 당신만 생각하며 원망도, 후회도 하지 않는 사람을…….
그의 사랑이 정말 나였을까? 꼭 ‘장서열’이어야 했을까?
아마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한발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 자리는 금용의 것이었다. 물론 신분의 제약으로 인해 많은 것을 해 줄 수는 없었겠지만, 금용이야말로 어렸을 때부터 한마음으로 구염락의 곁을 지키며, 그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함께 동고동락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장서열은 처음 금용을 만났던 날 그녀의 눈 속에서 본 그 순수하고 강렬한 관심과 아쉬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당시 구염락을 향한 금용의 눈빛에 남녀 간의 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이는 시간이 지나 욕망으로 발전하기에 충분했다. 곁에서 구염락이 사라지자 금용이 그런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했다는 것이 이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장서열은 자신이 그저 금용의 미래에 펼쳐진 드넓은 하늘을 빼앗았다고 생각했다. 구염락이 전생에서 후회 없이 바쳤던 진심과 정성을 가로챘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금용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구염락을 위해 헌신했다. 따지고 보면 자신보다 더욱 고상하면서도 구염락이 충분히 돌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행동이었다.
뒤에 나타난 권여아 역시 구염락에게 그리 얌전한 척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어쩌면 권여아도 처음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후 권여아는 구염락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를 태자로 올리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장서열은 그녀들의 성공적인 경험을 종합했을 뿐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뒤에서 상황을 조종하며 구염락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모든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단번에 그의 마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거기에 과연 자신의 감정이 들어 있었을까. 장서열은 아무것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전부 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서열은 미래를 아는 것이 자신의 무기라는 걸 부인하지 않았다. 그녀는 염치없이 한발 앞선 움직임으로 원하던 사랑을 얻고, 다른 사람의 진심을 누렸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된 마음과 바꾼 자리였다.
오늘날 그녀는 빼앗은 사랑과 그 속에 담긴 모든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구염락은 부드럽고도 세심한 모습으로 과거 그녀가 행한 노력에 보답해 주고 있었다.
장서열은 감동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과거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남자를 위해 다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사랑을 믿지 않는 것뿐이다.
만약 권여아가 다섯 살 때 구염락의 인생에 개입했다면? 자신보다 앞서 다른 아가씨가 그와 먼저 만났다면? 같은 시기 주소유가 초혜전에서 공부를 했다면?
그랬다면 자신은 여전히 길가의 잡초였을 것이다. 만약 운 좋게 입궁했다 하더라도 그녀는 구염락이 멋대로 냉궁에 가두고 마음껏 짓밟을 수 있는 존재였으리라.
마치 지금 후궁에 있는 여인들처럼.
지난 생이라면 마땅한 결과였다. 그녀는 나쁜 짓을 많이 했으니 적어도 뿌린 대로 거둔 거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후궁들은?
심지어 지금 구염락의 후궁들은 실수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들이 걷게 될 미래는 개개인이 훌륭한지 부족한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오직 구염락의 말 한 마디에 결정될 것이다. 구염락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여인의 생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장서열은 슬픔을 느꼈다. 자신도 분명 그중 하나였다. 지금은 구염락 앞에 부인으로 선 채 서로의 생명을 나눠 가진 아이를 배 속에 품고 모든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지만, 그게 오히려 그녀를 더 불안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장서열은 조금 전 구염락의 말에 감동하여 마음이 따스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죽다 살아나 자기 자신조차 잃어버리고, 심지어 소녀처럼 어리석은 마음을 품었던 그때와 같을 수는 없었다.
“제가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어요? 정말 억지를 쓰는군요!”
장서열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말도 없이 서 귀인을 처리한 데서 온 분노는 어느덧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약간 누그러졌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구염락은 지금 한 여인의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을 누렸을 것이다. 또한 부드럽고 세심한 황제의 사랑에 그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품에 안겼을 터였다.
구염락은 우선 장서열을 품 안에 끌어안은 채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몸을 감싸주었다. 분노로 인해 태아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그가 말로 잘 타일렀다.
“진정해. 별 뜻 없이 그냥 해 본 말일 뿐이야. 자, 다른 사람의 일에는 신경 쓰지 말자. 아직 식사를 하지 못했으니 얼른 가자. 내가 시중을 들어 줄게. 짐의 둘째 황자가 굶어선 안 되잖아.”
구염락의 힘에 저항할 수 없었던 장서열은 그에게 이끌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식탁으로 갔다. 그러나 구염락이 한 말을 곱씹던 그녀는 다시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대체 뭐가 저와 관계가 없는 일이죠? 나는 후궁들의 수장이에요! 앞으로 저를 건너뛰고 후궁을 건드리는 일은 하지 마세요!”
순간 구염락이 손을 풀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장서열을 보며 그는 애써 무시하고 있던 한 글자를 떠올렸다.
착한 성품은 이미 다 소진되어 버렸다. 몸에 밴 제왕의 기개가 구염락의 온몸을 뒤덮었다. 맹렬한 눈빛이 쏟아졌다.
“그러고 보니 서瑞? 참으로 낯익은 글자로군. 황후마마께서 이렇게 짐에게 맞서는 이유가 설마 이 성씨 때문은 아니겠지?”
장서열 역시 더욱 분노에 휩싸였다.
‘그놈의 서풍엽, 서풍엽! 그를 만나지 않은 게 벌써 몇 년째인데!’
하루 종일 물고 늘어지는 서풍엽의 이름에 장서열도 진저리가 났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내내 구염락이 주는 압박을 참고 있던 장서열이 눈을 돌연 부릅떴다. 그를 노려보는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십니까? 본궁이 억지로 서 귀인을 폐하께 밀어 넣었습니까? 하루 종일 사람을 괴롭힌 것으로 모자라세요? 제가 몰랐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줄곧 당신을 참아 주고 있었던 것뿐, 당신이 옳다고 생각해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닙니다!
구염락! 당신도 이제 어리지 않습니다. 기분이 나쁘면 본궁에게 이야기를 하세요. 괜히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말고요! 저를 폐하여 폐후廢后로 내치고 싶은 거라면 그냥 말씀을 하시지요. 괜한 생트집을 잡지 말란 말입니다!”
순간 구염락의 온몸에서 분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폐후라는 한 마디에 가까스로 잡고 있던 이성이 무너져 버렸다. 자신이 지키기 위해 노력해 온 관계가 그녀에게는 이토록 하찮은 것이었다니.
‘폐후? 내가 못 할 줄 알아? 나 구염락을 뭘로 보고!’
구염락은 생각했다. 여태껏 우리가 쌓아온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정말로 자신에게 신경을 썼던 적이 있나? 자신의 황후는 지금 그 천한 남자의 품에 가 안길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과의 관계를 청산하려 드는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