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5화
조로전에서는 구염락이 아들이 걷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끔씩 다가가 아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그의 눈빛은 부드럽고 태연했다.
장서열은 몇 마디 질책하고 싶었지만 아들과 함께 있는 구염락을 바라보자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든 억지처럼 보일 듯했다.
구염락은 그녀를 위해 후궁을 벌했다. 어떻게 조금도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전생이었다면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그런 여인은 모두 죽여 마땅하다고 기쁘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장서열이 느끼는 기쁨은 아주 희미했고, 마음속 걱정까지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구염락이 지나치게 대수롭지 않게 여길까 봐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으나, 그래도 까닭 없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싶었다.
장서열이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차마 감정 섞인 말은 할 수 없었다.
“폐하…….”
구염락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옷도 아직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무슨 일 있어?”
장서열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아직 식사 전일 거라 생각한 그녀가 말을 돌렸다.
“농교, 주방에 수라를 올리라고 일러라.”
농교가 의아한 눈빛으로 황제의 발끝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몸을 다급히 일으켰다. 구염락은 옅은 미소를 띤 채 장서열을 부축해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아. 여기서 짐을 기다리라고 했는데 무슨 일로 나갔던 거야.”
먼저 말을 꺼내는 것과 묻는 말에 대답을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기에 장서열이 거리낌 없이 편히 대답했다.
“서 귀인을 보러 다녀왔습니다. 서 귀인에게 사고가 좀 있더군요.”
구염락은 장서열이 다녀올 만한 일이었다는 건 이해했으나 정작 서 귀인이 누구인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후궁의 일은 왕 마마가 있으니 당신은 건강에 힘쓰도록 해. 짐에게 어린 황자를 한 명 더 낳아 주어도 좋고.”
사실 가능하다면 더 이상 낳고 싶지 않은 게 구염락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욕망을 참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특히 비참했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면 구염락은 아이가 많은 것이 결코 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그녀에게서 나는 향기를 맡으니 마음이 산란해졌다.
갑자기 묘수가 떠오른 구염락이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달려오는 아들을 유모의 손에 넘긴 그가 손을 뻗어 구염황을 안으려고 하는 장서열의 행동을 제지했다.
“오늘 서풍엽을 만났을 때 기분이 좋지 않았어.”
구염락이 장서열을 내려다보았다. 금빛 장식이 수놓아진 짙은 자줏빛 장포가 제왕의 위엄을 드러냈다. 무심결에 하는 농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습관처럼 미간을 일그러뜨리자 은근한 압박감이 들었다.
“기분이 나빠.”
그는 위로가 필요했다. 구염락을 위로할 유일한 방법을 알고 있는 건 장서열뿐이었다.
장서열은 매일 구염락의 보양을 도왔고, 태의원과 어선방 역시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 황제의 몸보신을 도왔다.
그러나 구염락은 몇 차례 코피를 흘렸던 일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몰래 태의에게 물어보았으나, 태의는 별 문제가 없다고 했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자신을 이렇게 제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장서열이 잠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하는 김에 금용 얘기도 좀 할까요?”
구염락이 바로 말을 돌렸다.
“오늘은 날씨가 정말 좋았어.”
장서열은 자신의 허리를 부축한 구염락이 익숙한 미소를 짓고 있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구염락은 갑자기 엄숙해지는 장서열의 표정에 순간 지난 밤 그녀가 울며 진심을 드러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일순간 마음이 떨리기 시작했다. 강렬하면서도 불길한 기분이었다.
장서열은 감히 그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변화한 구염락의 안색을 살피지 못한 장서열은 왕 마마를 비롯해 주위에 있던 하인들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잠시 후, 장서열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서 귀인을 죽이려 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고함을 쳤으나 막상 구염락의 스산한 시선을 마주하자 놀란 장서열의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녀는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재빨리 다가온 구염락이 장서열을 붙잡았다. 그러나 아직 거둬들이지 못한 분노와 안도가 섞인 얼굴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황권이란 이렇듯 무시무시한 것이다. 놀란 장서열은 구염락의 품 안에 우두커니 움츠린 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구염락은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장서열 앞에서 체통을 지킨 적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고, 사실상 그녀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탓에 장서열이 미친 듯이 화를 낸다고만 생각했다.
그녀가 헤어지자고 말하거나 다른 억지를 부리지만 않는다면, 구염락은 장서열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내가 누구를 죽이려 했다는 거야? 돌아오자마자 기요처에 가 있다 조금 전에 막 돌아왔…….”
그 순간 출궁 전에 내렸던 명령을 떠올린 구염락이 태도를 바꾸며 말했다.
“어쨌든 안 죽었잖아?”
장서열은 구염락을 추궁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부인에게 질책당할 것이다.
장서열에게 추궁을 당하는 상황은 두렵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든 조금 전 상상했던 일보다는 무섭지 않았다. 지난밤 목격한 일과 관련된 일만 아니라면 다른 건 모두 사소한 일이었다.
“네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할까 봐 두려웠어.”
장서열은 조금 전 이성을 잃었던 모습을 서둘러 감췄다.
“터무니없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홑몸이 아닌 탓인지 숨이 찼다. 조금 전 구염락의 얼굴은 너무나 무서웠다. 장서열은 본능적으로 구염락을 두려워했다. 그가 지금은 아무리 순한 개처럼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보인다 해도 한 번 새겨진 공포감을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을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시간을 낭비할 가치가 없었다.
“밖에 식사가 차려져 있을 테니 우선 먹자. 어머니는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우리집 둘째 전하는 배가 고플 거야.”
장서열은 자신의 배를 보고 있는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선은 마치 칼집에 들어 있는 장검 같았다. 장서열은 입가를 실룩거리며 구염락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른 이에게 더할 나위 없이 냉정한 구염락의 모습을 볼 때마다 장서열은 까닭 없이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아이 문제가 아니라면 장서열 역시 그가 누구를 죽이려는지 일일이 관여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누군가 죽든 말든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구염락은 천성적으로 사람을 해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모든 걸 자신이 관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서 귀인은 서풍엽의 사촌누이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면 그가 폐하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마치 황후의 총애를 얻기 위해 두 남자가 질투하고, 질투해서 다툰 모양새가 되지 않겠는가.
“게다가 오늘 막 서풍엽을 마주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만에 하나 그의 사촌누이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이것이야말로 군주가 신하를 핍박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제 그 후궁이 서풍엽의 사촌누이였다고?”
자신보다 더 놀란 듯한 얼굴을 마주하며 장서열이 막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구염락은 참으로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더라니… 헌데 죽지 않았단 말이지.”
장서열이 구염락을 노려보았다. 그저 어젯밤 짜증이 났을 뿐이라는 그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순간 무엇인가 깨달은 장서열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구염락이 끼어드는 바람에 화목한 내명부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목표가 질투로 점철되어 버렸다.
바라는 것이 자꾸 언급되면 사람은 응당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게다가 구염락 같은 이가 무조건적인 애정을 쏟으며 따라 주면 더욱 그랬다.
장서열이 정색을 했다.
“지금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폐하께서 부른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 모든 잘못을 덮어씌우다니요? 먼저 불결한 생각을 했으니 후궁을 불러들였겠지요. 어젯밤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여인을 품에 안고 새신랑 노릇이라도 하려던 게 아닙니까?”
“…….”
“구염락, 본궁이 경고하건대 결코 말과 행동이 달라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럴 바에는 애초에 각 궁을 돌며 수많은 후궁들과 주무시면 될 일입니다. 본궁이 즉시 자리를 내어드리지요!
마음에도 없는 말은 적당히 하십시오. 이제 본궁이 늙었다고 눈앞에 어리고 아름다운 여인들을 늘어놓고 날 자극하려는 속셈이지요? 제가 회임한 몸으로 폐하를 모실 수 없으니 누구한테 먼저 가서 자는 게 좋을지 몰라 이리저리 재고 있는 게 아니냔 말입니다!”
장서열은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치솟는 걸 느꼈다. 부끄러워하는 소녀를 불러들인 구염락이 그녀와 지그시 눈을 맞추는 장면이 떠올랐다.
본래 화를 잘 내지 않던 장서열은 지금만큼은 화가 치밀어 올라 어쩔 줄을 몰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구염락의 코에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사내들 중에 좋은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하더니 폐하도 다를 바가 없군요! 이제 천하의 지존이 되고 나니 과거 본궁에게 했던 사탕발림은 더 이상 지킬 생각이 없는 것이겠지요! 말끝마다 나 하나면 된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헌데 지금은 후궁들만 몇 명이지요? 나를 얼마나 바보로 알았으면!”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와 상을 차리려던 왕 마마는 황후가 황제를 마치 손자처럼 꾸짖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말을 할수록 점점 울분에 찬 황후는 점점 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했다. 결국 서 귀인은 아예 지워져 버렸다.
왕 마마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요상한 분위기 속에서도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자각했다.
구염락은 감히 반항하지 못한 채 장서열이 그대로 막말을 쏟아내도록 내버려 두었다. 속으로는 슬쩍 득의양양하기도 했다.
장서열이 자신의 여인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정말로,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누리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만약 장서열이 막말을 하면서 진노하지 않았다면 구염락은 계속 듣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노에 차 씩씩대며 자신을 쫓아내기 일보 직전인 그녀를 보자 상황이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