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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24)화 (324/449)

제324화

장서열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왕 마마처럼 그렇게 많은 것을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저 어젯밤 별 뜻 없이 구염락에 맞서며 했던 말이 서 귀인을 해쳤다 생각할 뿐이었다.

“어서 본궁의 의지懿旨(황후의 조령)를 전하고 서 귀인을 구하라. 당장 태의를 부르고!”

유모에게 아이를 안긴 장서열이 다급히 후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화 마마에게 물었다.

“언제 벌어진 일이냐?”

왕 마마는 벌써 사람을 구하러 가고 없었다. 화 마마가 다급히 답했다.

“마마께서 폐하와 출궁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 그리 되었사옵니다.”

내명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황후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에 정말로 그녀의 뜻이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황제가 아무리 황후를 총애한다고 해도 자리에 걸맞은 명성이 없다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황후를 생각하자 화 마마는 마음이 매우 조급해졌다.

‘황후마마께 악랄한 사람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운 꼴이 아닌가!’

화 마마는 황제가 정말로 황후를 사랑하시는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농교는 황후를 부축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편, 기요처에서는 뒷짐을 지고 선 구염락이 섭궁개와 국사를 의논하고 있었다. 엄숙한 얼굴과 침착한 표정은 울분에 가득 찬 무장에게 빠른 위안을 주었다. 구염락은 한 마디 한 마디 질서정연한 말투로 다음 일정을 지시했다. 접시에 담긴 만두와 연잎죽은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손을 댄 흔적은 없었다.

* * *

제때 나타난 왕 마마는 서 귀인을 구출한 후 그녀를 거처인 안세헌安歲軒으로 옮겼다. 태의와 시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장서열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세 명의 태의가 서 귀인을 진맥하고 있었다. 통로에 있던 궁녀와 태감은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고, 서 귀인의 측근 궁녀 넷은 울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음이 아팠지만 눈시울만 붉힐 뿐 감히 황후 앞에서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이들은 행여나 황후의 눈 밖에 나거나, 서 귀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황후의 비위를 거스를까 두려웠다.

황후의 뒤에 선 왕 마마는 초조한 시선으로 하인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마마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고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았다. 후궁들이 황후마마를 어떻게 생각할지 염려스러웠다.

물론 황후는 황제 이외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황제가 아닌 이상 황후 역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황제라면 탄핵을 당해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겠지만, 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황후는 어사御史(벼슬 이름)가 놀리는 붓밖에 달리 기댈 곳이 없었다. 잘못하면 후세에 오래도록 악명을 남기게 될 것이다.

얼른 황후에게 다가선 왕 마마가 주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마, 송구하오나 노비는 대관절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 폐하께서 국암사의 성모를 태후로 맞이하여 내명부를 주관하게 할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이번 일로 대신들이 성모를 위해 상소문을 올릴까 두렵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걷던 장서열이 순간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왕 마마를 바라보았다. 왕 마마는 담담하고 의연하게 바닥을 주시하고 있었다.

장서열은 문득 깨달았다. 왕 마마의 말은 그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황제의 약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된 이상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자신만 손해만 볼 수는 없었다.

장서열은 반드시 구염락에게 성모를 입궁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태후는 폐위되었고, 그 빈자리를 약연이 차지한다면 그녀는 분명 궁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되리라. 그렇다면 자신의 행보가 어려워질 것은 자명했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장서열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애당초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무슨 이유인지 구염락은 지금까지 생모를 궁에 들이지 않았다. 자신이 이유 없이 그에게 약조를 해 달라 조른다 해도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 될 가능성이 컸다. 섣불리 움직인다면 오히려 구염락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왕 마마 역시 성모의 존재가 껄끄러웠다. 마치 이 나라에 그토록 존귀한 여인은 없다는 듯 지난 이 년간 성모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성모가 이만큼 인내심을 보인다는 건 정말로 권세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면 필시 더 큰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왕 마마는 후자가 더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머리가 비상했기에 그토록 비천한 출신의 여인이 아들이 순조롭게 황제가 될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은 것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었던 장서열은 곧 밖으로 나왔고, 미간을 찌푸린 채 대청에서 진맥 결과를 기다렸다.

* * *

“그저 하룻밤 시침을 든 것뿐인데 금세 이 난리가 나다니! 황후마마는 정말 잔인한 분이야. 그런 분을 누가 감히 당해 내겠어?”

제운아가 혀를 내둘렀다. 누군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해바라기씨를 넣어 준다 해도 그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폐하께서 이렇게 빨리 환궁할 거라고 예상을 못 한 탓에 황후마마가 지금 사태를 수습하려고 엄청 노력 중이래.”

몽소우는 아무도 없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하인들을 모두 물린 뒤였다.

“너도 참, 내가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괜히 떠들지 말라고.”

“내가 떠든 게 아니야. 조금 전 온 궁에 두루 퍼진 소식이라고. 놀란 황후마마께서 바로 서 귀인에게 달려가 어질고 현숙한 척을 하고 계신대.”

제운아와 생각이 달랐던 몽소우가 손에 든 수틀을 내려놓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무책임한 말은 하지 마. 너도 황후마마를 뵈었잖아. 내 생각에 황후마마는 아랫사람들을 품지 못할 분이 아니셔. 이번 일에는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속사정이 있을 거야.”

제운아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삐죽거렸다. 몽소우의 말을 무시한 그녀가 주먹을 쥐고 유치한 정의를 불태웠다.

“너는 무서워서 말을 못 하는 것뿐이잖아! 궁에서 황후마마가 폐하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고작 하룻밤 시침을 들었다고 서 귀인을 죽이려 들다니, 너무나 잔인해! 됐어. 이번 일로 폐하께서도 깨달은 바가 많으시겠지. 분명 황후마마를 처벌하실 거야!”

몽소우가 서둘러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함부로 말하지 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제운아가 아주 조급히 답했다.

“생각해 봐. 어느 날 폐하께서 나에게 시침을 들라 부르시면, 그때는 나도 죽을 수 있는 거잖아! 이 일은 반드시 폐하께서 아셔야 해. 폐하께서 황후를 훈계하셔야 할 일이라고.”

* * *

한편, 오휘미는 서 귀인이 신형사에서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과 함께 황후가 지금 안세헌에서 서 귀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왠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혹시 황후가 한 일이 아니라면…….

‘황후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

순간 떠오른 다른 가능성에 오휘미는 돌연 손발이 차가워졌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황제가 시침을 든 자신의 후궁을 해할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서 귀인이 하마터면 비명횡사할 뻔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설마…….’

문득 오휘미는 저수궁을 떠날 때 저 마마가 체통을 잊으면서까지 몰래 당부했던 말이 기억났다.

흠칫 놀란 오휘미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다른 이들과 함께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황후를 고발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만약 이번 일이 정말로 황제의 뜻이었다면 화를 피하게 될 것이고, 설령 아니라고 해도 가만히 있는다면 본전은 건질 것이다. 오휘미는 불길한 예감을 무시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 * *

장서열은 안세헌 밖에 앉아 있었다. 대청 안의 궁녀와 태감들은 무릎을 꿇고 누구도 감히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한쪽에 선 화 마마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마마, 노비가 조사해 보니 며칠 전 주 재인이 모래주머니를 가져와 제기차기를 했답니다. 그것을 들고 각 궁을 돌아다니며 놀았는데,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후궁들이 내내 규칙에 얽매여 지내다가 장난감을 보자 반색을 하였고, 이후 거의 모든 궁에서 제기를 가져다가 놀았다고 합니다.”

모래시계를 바라보던 장서열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화 마마를 보았다.

“주 재인?”

“예, 마마. 재인은 3군 통독 주 대인의 여식으로 올해 열다섯입니다. 활동적인 성품으로 특히 오 귀인과 친분이 두텁다고 합니다. 재인은 딱히 잔꾀를 부리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오락에는 확실히 일가견이 있는 듯합니다.

노비가 작년부터 3군에서 황실 정원을 관리하게 된 태감에게 물어보았사온데,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3군 총독의 딸이 오락의 고수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재인이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며 오락을 즐겼다고 합니다.”

화 마마의 보고에 장서열은 품위 있는 표정으로 두 후궁을 한 차례 떠올린 뒤, 뒤에 선 왕 마마에게 물었다.

“몇 시진이냐?”

“예, 마마. 신시이옵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장서열은 약간 초조해졌다.

“이만 일어나야겠다. 안쪽 상황은?”

장서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송 태의가 다른 태의들을 이끌고 나왔다. 그는 가장 먼저 황후에게 예를 갖췄다.

“예의를 차릴 필요 없다. 서 귀인은 어떠하냐?”

“황후마마, 다행히 서 귀인은 큰 탈이 없고, 조금 놀란 듯하옵니다. 다만 여러 곳에 중상을 입고 피를 흘린 탓에 몸이 허약해져 있습니다.”

장서열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았다. 어젯밤 자신이 두 번 이상 묻지 않았다면 구염락은 어쩌면 시침을 명한 후궁을 아예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송 태의가 애써 주시게.”

아마도 송 태의는 서 귀인이 죽지만 않는다면 큰 탈이 없다고 고할 터였다. 그는 몇 마디로 대답을 일축하며 아무 일이 없는 척했으나 정말로 무탈하다면 안에서 이리 오래 머물렀을 리 없었다. 실제로 서 귀인은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예, 마마. 안심하십시오. 소신이 반드시 힘을 다하겠습니다.”

피곤한 장서열의 안색은 그리 좋지 못했다. 물론 기분도 좋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탈 없이 살던 소녀가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장서열은 무슨 짓을 해도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가 않았다.

송 태의에게 몇 마디를 분부한 장서열이 농교 일행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송 태의는 공손히 고개를 숙인 채 주인이 사라지는 모습을 배웅한 뒤에야 급히 몸을 일으켜 뒤를 향해 말했다.

“어서 가서 폐하께 아뢰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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