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3화
농교의 말에 햇볕을 쬐어 붉어진 구염락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서풍엽 같은 이와 나눈 무료한 대화가 조금은 의미가 있었던 듯했다.
꿋꿋하게 계속 앞으로 가던 구염락은 부인이 거듭 요청하니 어쩔 수 없다는 양, 못 이기는 척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으로 들어선 구염락은 즉시 표정을 풀고 화사한 꽃처럼 미소 지었다. 조금 전까지 어깃장을 놓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공간도 좁고 얼음도 얼마 없는데 왜 괜히 올라오라고 한 거야. 이따 당신과 아이가 더우면 어쩌려고.”
점점 밝아지는 구염락의 웃음을 보며 장서열의 마음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께서 마차에 계셔야 신첩의 마음도 편하지요. 폐하께서 안 계시면 아무리 시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장서열이 구염락에게 시원한 과일주를 따라 주었다. 구염락은 쑥스러운 듯 그녀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서풍엽을 마주치고 느낀 거북한 감정이 깨끗이 사라졌다.
구염락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장서열의 시선에 서둘러 잔에 든 과일주를 비웠다. 장서열의 말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했다. 그는 수줍어하며 서둘러 달아났다.
두 번째 잔을 따르고 있던 장서열은 미처 구염락의 옷자락을 잡기도 전에 그가 이미 사라졌음을 알았다. 텅 빈 손을 보며 장서열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실소했다. 조금 전 가족들과 헤어지며 들었던 마음속 불안감이 가라앉았다.
한편, 서풍엽은 떠나는 마차를 바라보며 시종일관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장서열을 생각했다. 황제에게 들은 말보다 그 눈빛 때문에 가슴이 시렸다.
오 년이었다. 오 년이라는 시간은 그래도 한 번이나마 그를 보고자 했던 장서열의 욕심까지 앗아 갔다.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서전은 주사섬에게 먼저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가 다가가서 서풍엽의 어깨를 툭 쳤다.
“그만 놓아 주시지요.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충분히 기다리셨습니다.”
서풍엽은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시렸다.
“놓아 주라니… 어찌 말처럼 그리 쉽겠는가…….”
서풍엽은 수도 없이 상상했다. 그때 자신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단 한 명의 적군도 남기지 않기 위해 끝까지 그들을 쫓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장서열은 예정대로 자신의 아내가 되고, 벌써 아이들도 한두 명 있을지 모른다. 그 역시 그녀와 함께 처갓댁에 찾아와 손윗처남과 함께 담소를 나누었을 것이다.
물론 장서전은 누이동생이 좋은 여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누군가 동생을 위해 절개를 지킨다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서풍엽이라면 달랐다.
장서전이 서풍엽을 설득했다.
“형님도 들으셨겠지만 폐하께서는 한번 결정한 일은 바꾸지 않는 분인 데다… 사실 저 역시 폐하의 말이 완전히 틀리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충왕비께서도 연세가 적지 않으신데, 아무 말씀 없으시다고는 해도 속으로는 누구보다 아들의 새 출발을 바라시겠지요.”
서풍엽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몸을 돌린 그는 장서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나 머릿속은 여전히 오늘 마주한 뜻밖의 만남에 머물러 있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 먼저 가 보겠네.”
장서전이 다급히 서풍엽을 붙잡았다.
“뭐가 그리 급해요. 오신 김에 점심이라도 들고 가세요.”
“아니야, 괜찮아.”
서풍엽은 머리가 복잡했기에 조용히 혼자 있고 싶었다. 오늘 장서열은 그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다. 오 년만에 만난 그녀는 이전보다 더 눈을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심상치 않은 안색에 장서전은 더는 서풍엽을 붙잡아 둘 수 없다고 느꼈다. 서풍엽과 누이동생 사이의 일은 제삼자가 판단할 여지가 없었다.
* * *
환궁한 구염락은 곧장 조로전으로 가 점심 식사를 할 생각이었으나, 먼저 장서열을 보내야 했다. 진 공공이 갑자기 섭궁개의 알현을 전해 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고 했다.
구염락은 일을 처리한 뒤 바로 돌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먼저 가서 식사를 하라고 아내에게 당부했다.
장서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기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섭궁개가 알현을 청했다면 분명 군대와 관련된 일임이 틀림없었다. 장서열은 군말 없이 물러나며 진 공공에게 상서방에 돌아가 황제에게 먹을 것을 챙겨 드리라 분부했다.
“네, 황후마마.”
진 공공은 황제와 함께 눈으로 황후를 배웅한 뒤, 즉시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호국이 일정을 변경하여 오늘 출발했다고 하옵니다. 또한 호국 공주와 왕을 호송하는 상장上將 한 명을 함께 파견했다고 합니다.”
구염락은 서두르지도, 여유를 부리지도 않으며 긴장한 진 공공을 쳐다보았다.
“그게 뭐가 어떻다는 것이냐.”
어차피 호국에서 사절을 보내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그런데 일찍 오든, 늦게 오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구염락은 다시 돌아가 장서열과 함께 식사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진 공공은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
“폐하, 그리 간단히 말씀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 호국에서 호송을 위해 상장을 파견한 것은 금기를 어긴 것입니다. 타국의 장군이 남의 영토를 밟지 않는 것은 국가 간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일개 장군이 마음대로 다른 나라에 드나들 수 있다는 건 그들의 군력이 강성하다는 걸 보여 주는 행동이었다. 타국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만으로 호국은 공격적인 전술 능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구염락의 입가가 경멸하듯 올라갔다. 그런 도발을 두려워한다는 건 역으로 무지하다는 반증이다. 실전에 능한 구염락은 특히 문신들이 전쟁에 대하여 떠드는 말들은 들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이 벌써 연경 성내에 들어왔다더냐? 아직 어디까지 호송할지도 말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벌써 우왕좌왕하면 어찌 체통이 서겠는가!”
구염락은 우선 섭궁개를 만나기로 했다. 호국에 기가 눌려 웃음거리가 될 순 없다. 특히 이런 시기에는 절대 군대의 사기가 꺾일 만한 수모를 당해서는 안 된다.
호국은 주국이 제 꾀에 스스로 넘어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호국이 바라는 대로 국가 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절을 거절한다면, 호국은 호의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주국에 군사를 일으킬 명분을 만들 것이다.
반대로 주국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호국은 보란 듯이 그들의 상장을 주국의 영토로 들여보낼 터였다. 분명 경험이 풍부할 호국의 노장은 주국에 들어와 지리를 익히리라. 가장 큰 문제는 호국이 감히 불순한 선례를 남기려 한다는 것이었다.
구염락에게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새로 서남쪽 변경의 수비를 맡은 대장군 당표唐豹를 보내 아예 백 리 밖까지 나가서 호국의 사절을 맞이할 생각이었다.
* * *
구염황은 궁에 돌아오자마자 유모의 품에서 작은 눈을 떴다. 멍한 표정으로 울음을 터뜨리려던 아이는 옆에 있는 어마마마를 본 후 작은 팔을 뻗어 안아 달라는 표시를 했다.
돌아오는 내내 마차에 앉아 있던 장서열은 그늘이 있는 시원한 길을 걸어온 덕분에 전혀 몸이 고되지 않았다. 마침 아이를 안아 주고 싶었던 그녀가 앞으로 다가가 구염황을 받으려 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왕 마마, 화 마마가 밖에서 뛰어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돌아오셨사옵니까, 마마! 큰일이 났습니다!”
아들을 달랜 장서열이 몸을 돌려 나이 든 두 마마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이냐! 한 번만 더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만든다면 반드시 곤장을 칠 것이다. 천천히 말해 보거라.”
말을 마친 장서열이 모든 사람을 둘러본 뒤 왕 마마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고하라!”
화 마마야 원체 잘 놀라는 사람이니 그렇다고 해도 왕 마마까지 덩달아 소란을 피우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왕 마마가 놀란다면 다른 하인들 역시 동요할 것이다.
그러나 왕 마마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궁에서 오십여 년을 보내는 동안 이렇게 놀라운 일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황후마마, 어서 서 귀인에게 가 보십시오. 조금 전 신형사에서 서 귀인을 끌고 갔는데, 황제 폐하를 성심껏 모시지 못한 죄 때문이라 하옵니다. 방금 소식을 들었사온데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합니다.”
청천벽력이었다. 황제를 잘 모시지 못했다는 이유로 죽을 만큼 혼을 내다니? 철저한 선발을 거쳐 후궁이 된 여인의 신분과 품성에 문제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지금 황제는 만천하에 서 귀인의 행실이 단정치 못하다고 소문을 내고 있지 않은가. 다른 후궁들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황제 앞에서 움츠러드는 겁쟁이가 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서 귀인은 충왕의 조카였으며, 꼭 충왕이라는 뒷배경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녀의 아버지부터가 2품 무장이었다. 황제는 사람을 죽이는 걸 마치 무를 써는 일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려 들다니!
왕 마마는 도저히 황제의 장단을 맞출 수가 없었다. 일이 점점 더 꼬이고 있었다. 처음 서 귀인이 불려갈 때는 그러려니 했다. 정말로 잘못을 저질러 황제의 노여움을 산 것이라면 외출 금지 정도는 달게 받아야 했다.
그런데 황실의 엄연한 비빈이 딱히 이유도 없이 신형사에 끌려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신형사는 노비나 대역죄인을 가두는 곳이었다.
왕 마마는 최대한 이해를 해 보려 했다. 일단 끌려간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신형사에서도 기껏해야 귀인을 조금 힘들게 하고 말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또 한 번 예상을 깨고 조금 전, 더 이상 서 귀인이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가 들려온 것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왕 마마도 우를 범하는 제왕의 지나친 행동에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이시지? 어떻게 얼마 전 시침까지 들게 한 2품 대원의 딸을 죽이려는 것인가!’
왕 마마는 한편으로 서 귀인은 대체 궁중 생활이 얼마나 녹록지 않았기에 이렇듯 체면도 불사한 일을 저질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후궁이 누군가와 밀회를 즐겼다는 건 내명부의 기강을 문제 삼기 딱 좋았다. 이러면 내명부를 통솔하며 줄곧 삼엄하게 후궁을 지키던 황후의 체면은 또 뭐가 되는가.
왕 마마는 황제가 어째서 여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안타까웠다. 내명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당연히 황후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권비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말이 나올 만한 상황인데 거기에 서 귀인까지 더해진다면 아무리 떳떳해지려 노력해도 사람들은 황후를 의심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