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2화
구염락에게는 당연히 허용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 부인이 아프다면 사위인 자신이 좋은 약을 구해 주면 될 일이다. 그건 서풍엽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구염락은 돌연 조씨 가문에서 자신의 관심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풍엽이 매일같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사소한 일까지 선심을 베풀고 있으니 딸을 충왕부에 시집보내지 못한 조 부인이 안타까워한대도 할 말이 없었다.
장서열은 어린 시절 그를 유일하게 지지해 준 사람이었다. 구염락은 반드시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배워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했다.
구염락은 불현듯 아래쪽에 무릎을 꿇고 있는 손위 처남의 관직이 너무 낮다고 생각했다. 타인이 베푸는 작은 선심까지 주저하지 않고 받을 정도라니.
구염락은 다른 사람이 기회를 틈타지 못하도록 환궁하는 즉시 섭궁개와 장서전의 관직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이 정도의 대비조차 부족하다고 느낀 구염락이 다시 말했다.
“서전, 그대는 지금 가정을 꾸려 현숙한 아내와 자식을 두었지. 이제는 옆에 있는 형님도 생각해 줄 때가 된 것 같군. 짐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세자는 자네보다 한 살이 많으니 신경을 좀 써 주도록 해. 부인이 처가에서 친척들과 왕래할 때 세자와 어울리는 여인을 찾아볼 수도 있겠지.”
“소신, 삼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장서전은 왠지 분위기가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서풍엽이 콧방귀를 한 번 뀌었다. 사적인 일이라면 구염락과는 할 말이 없었다.
“굳이 장 통령께서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서풍엽의 말을 구염락이 받아쳤다.
“그럴 수야 없지. 두 사람은 형제지간이나 마찬가지니 각별히 신경을 쓰는 게 당연해. 이 정도 일도 처리하지 못한다면 필시 능력이 부족한 탓이니, 관직이 오르는 것도 기대하기 어렵겠지.”
화가 난 서풍엽은 하마터면 일어나서 구염락에게 그만 좀 할 수 없냐고 고함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여유로운 얼굴로 옅은 냉기를 발산하고 있는 구염락은 상석에 앉은 자였다.
재빨리 정신을 차린 서풍엽이 그는 황상이라고, 그 옛날 열셋째가 아니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장서전은 이럴 줄 알았으면 돌아오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두 사람은 지금 국가대사를 의논하지 않는 게 확실했다. 이건 사적인 싸움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누이동생 때문에 벌어진 암투였다.
장서전은 속으로 약간은 통쾌하기도, 우쭐하기도 했다. 누이동생은 과연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신분을 생각하면 장서전도 마냥 우쭐할 수만은 없었다. 마치 물속에 빠졌다 건져진 것처럼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라도 폐하께서 환궁한 뒤 서풍엽이 왜 조부에 있는 거냐고 서열이를 다그친다면…….’
누이동생이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말문이 막힌 동생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을 것이다.
‘화가 난 폐하가 행여나 태자 전하에게 화풀이를 한다면 어쩌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서전은 진심으로 누이동생이 걱정되었다. 서풍엽이 혼인을 하든 말든, 이로 인해 자신의 관직이 오르든 말든, 이런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신하 앞에서도 이렇게 화를 내는 황제가 환궁하여 누이동생을 어떻게 몰아붙일지 누가 알겠는가!
장서전은 앞으로 다시는 서풍엽을 집에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모두에게 좋지 않은, 이렇듯 불필요한 오해는 만들 필요가 없었다.
구염락은 위엄 있는 표정으로 아래를 훑어보았다. 화가 풀리지 않아 보이는 서풍엽과 땀범벅이 된 장서전을 보니 아주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구염락이 건드리지 못하는 건 장서열뿐, 그들을 건드리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됐다. 이제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구염락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면 우선 명정을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맺어줄 것이다. 이런 일은 아랫사람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진 공공에게 분부하면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구염락은 찻잔 속 짙푸른 액체가 조금 더 향긋해진 것을 느꼈다. 기분 좋게 장서전에게 일어나라 명한 그는 최근 연경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신하들은 흥분하며 말을 이어 갔지만, 안타깝게도 구염락에게는 조금도 흥미가 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는 아내와 아이를 기다리기 위해 억지로 귀를 기울였다.
한편, 바깥의 남자들이 서로를 불편해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여인들은 두 아이를 데리고 끝도 없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조옥언은 적당히 다른 여인들을 총애할 수 있게 황제를 독점하지 말라고 딸에게 여러 차례 당부했다. 계속 이런 상태라면 결국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아지고, 황후의 명성은 땅에 떨어질 것이다.
장서열도 어머니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녀는 굳이 변명하지 않고 진지한 태도로 황제가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좋은 아내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조옥언은 기쁘고 위안이 되는 얼굴로 딸의 손을 어루만졌다.
“우리 착한 딸, 많이 힘들었지.”
주사섬은 미소 띤 얼굴로 두 모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황제가 시누이에게 그토록 지극하니 시누이 또한 그래 주길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황제는 후궁들을 원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딱히 자화자찬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주사섬은 요즘 자신이 확실히 예전보다 똑똑해졌다고 느꼈다.
비록 감히 황제를 정면으로 마주한 적은 없지만, 주사섬은 여자의 감이 가장 정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리도 바쁘다는 황제를 매번 입궁할 때마다 마주치곤 했는데, 심지어 황제는 황후의 체면을 생각해 조금 머물다가 가기도 했다. 남자가 한 여인에게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지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시누이는 이토록 용모가 출중한 데다 성격까지 좋으니, 황제께서 마음을 쏟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남편의 말에 따르면 황제는 과거에도 시누이와 사이가 좋았다고 했다. 남편이 들려준 어린 시절 이야기에 주사섬은 까무러칠 만큼 놀랐고, 그때부터 황제의 능력을 알아본 시누이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듯 두터운 친분이 있었던 데다 황제 폐하께서 황후마마를 연모하고 있으니, 세상에 황후마마께서 걱정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아마 황후마마께서 손쓸 필요도 없이 폐하는 마마를 위해 후궁들도 깨끗이 정리해 줄 것이다.
장서열은 올케의 미소에 덩달아 웃어 보였다.
“조카가 점점 올케를 닮아가는군요. 처음에는 오라버니를 닮아서 시집을 못 가면 어쩌나 걱정했답니다.”
그 말에 주사섬이 반사적으로 남편을 감쌌다.
“아닙니다, 마마. 상공을 닮아야 예쁘지요. 소인은 정말로 저를 닮을까 걱정이랍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웃음에 주사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그녀는 두 모녀가 행여나 웃다가 숨이 넘어가지 않도록 다시는 입을 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장서열의 웃음은 기쁨과 안심을 동시에 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자신을 보러 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심약한 올케의 얼굴이 빨개지지 않도록 더는 놀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서열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가 눈을 깜빡이는 것부터 걷는 것까지, 어떤 이야기는 이미 몇 번이나 반복했던 얘기였지만 엄마의 입장에서는 매번 새로운 이야기처럼 즐거웠다.
이를 들은 조옥언 역시 장서전과 장서열 두 남매가 어린 시절 데리고 있기 어려울 정도로 유난스럽고 장난스러웠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녀는 장서전의 유년 시절을 이야기할 때 며느리가 마치 위인의 일대기를 듣듯 열심히 경청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며느리는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크지 않은 눈을 반짝이며 시어머니가 조금 더 이야기를 풀어놓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마지막은 장서전의 어린 시절을 한바탕 성토하는 자리로 변해 있었다. 유모가 태자가 졸려 한다고 알리자 장서열은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환궁하겠다고 말했다.
헤어지기 아쉬웠던 조옥언이 딸의 손을 잡고 식사라도 하고 가라고 붙잡았다. 갑자기 장서열이 어머니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세자가 아직 밖에 있을까요?”
조옥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다시 싸해졌다. 아직 구염락과 서풍엽이 전전에 함께 있다는 걸 떠올리자 더는 딸에게 남아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권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딸에게 몸조심하고, 별일이 없으면 자주 집에 놀러 오라고 당부했다. 애초에 딸을 궁으로 들여보낸 건 조옥언 자신이었다.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지금 딸은 이렇게 잘 지내고 있을 뿐더러 황제가 지켜주고 있었다. 누구도 딸을 난처하게 할 수 없었다.
장서열은 딸이 더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차마 강요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결연한 눈빛을 보았다. 장서열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는 어머니를 보니 평생 좋은 황후로 살아야겠다는 평안함과 즐거움이 마음 가득 차올랐다.
구염락이 아내를 데리러 왔다. 그는 눈물을 흘리는 처남과 그의 부인, 장모님과 작별 인사를 하며 그들이 입구에서 느릿느릿 반 시진을 더 종알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장삼을 입은 채 온몸으로 햇빛을 받고 있었다. 초가을 날씨였으나 정오의 태양은 여전히 반갑지 않았다.
안에서 장서열의 분부가 떨어지자 호화로운 마차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며 조부를 떠났다. 구염락은 앞쪽에서 말 위에 올라 있었다. 인내심 강한 구염락도 그 순간에는 혜령이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 땀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날씨는 또 왜 이 모양이람!’
늦가을처럼 서늘한 마차 안에 앉은 장서열은 그리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다. 올케와 어머니를 생각하니 또 한 번 참을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농교가 장서열을 달래 주었다. 농교는 어차피 다시 못 만나는 사이도 아니며, 마마께서 보고 싶다면 원할 때 언제든 볼 수 있으니 울 필요가 없다고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장서열 역시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울컥했다. 배가 점점 불러오고 과보호를 받고 있는 탓일까. 틈만 나면 괜한 걱정이 들었다.
“알았다.”
장서열은 별것 아닌 일로 쓸데없이 걱정하며 우는 스스로에게 웃음이 나왔다. 서둘러 눈가의 눈물 자국을 닦아낸 그녀는 얼음통 안에 놓인 과실주 한 주전자를 보자, 조금 전 떠나기 아쉬워하는 자신을 기다리느라 줄곧 햇빛 아래에 서 있던 남편이 떠올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장서열은 농교에게 구염락을 불러오라는 손짓을 했다. 동시에 그녀는 문득 구염락이 마차를 양보해 줄 때의 핑계가 떠올라 한 마디를 덧붙였다.
“폐하께 말씀드리거라. 몹시도 말이 타고 싶으신 건 알지만 뭘 좀 마신 후에 타셔도 늦지 않다고.”
농교가 재치 있게 웃으며 말했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다정하신 황후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