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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21)화 (321/449)

제321화

“폐하, 소신은 혼인할 뜻이 없사옵니다.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손에 든 찻잔 틈새로 구염락이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구염락의 날카로운 눈빛에 냉기가 서려 있었다.

“혼기가 꽉 차도록 혼인을 안 하다니, 출가라도 할 셈인가? 모친께서 상심이 크시겠군.”

구염락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차를 음미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와 노는 건 퍽 재미없는 일이었다.

구염락이 어머니를 언급하자 서풍엽의 눈에 불쾌감이 더해졌다.

“폐하, 지극히 개인적인 일입니다. 현재 나라에는 분란이 없고, 황실 역시 종친이 필요하지 않으니 폐하께서 구태여 소신의 혼사를 심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짐이 원한다.”

태연한 표정과 달리, 구염락은 속으로 일찍이 서풍엽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게다가 애써 참았지만 마치 제집 드나들 듯 자신의 처갓집을 드나드는 서풍엽의 태도가 눈에 거슬리지 않을 리 없었다. 이쯤 되면 혼인을 하든지,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하든지 선택을 해야 할 게 아닌가.

구염락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장서열과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지니 자신조차도 자비롭고 너그러워진 게 분명했다.

서풍엽이 의자에 앉은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폐하. 소신은 감히 폐하와 어린 시절부터 이어 온 친분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구염락이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아니. 짐이 초혜전에 들어갔을 때 그대는 이미 출궁한 뒤였지. 기껏해야 안면을 튼 정도로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혼인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대를 눈감아 주기에는 충분치 않다.”

서풍엽은 돌연 구염락을 찢어 버리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 시절 구염락에게 예의와 규범을 가르쳐 준 사람이 누구였던가.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가 행여나 서열이의 체면을 깎을까 노심초사하여 명문가의 자식들을 소개시키고, 사람을 대면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게 대체 누구란 말인가!

‘모른다니 차라리 잘 됐군. 나를 혼인시키려고 아예 모른 척을 해?’

“폐하, 이왕 말이 나왔으니 소신도 폐하께 간청 드립니다. 부디 소신의 혼사를 결정하지 말아주십시오.”

구염락은 찻잔을 들고 있었다. 차를 음미하는 자태는 기품이 넘쳐흘렀다.

“짐이 승낙하지 않겠다면?”

서풍엽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최근 몇 년간 황제가 꺼려할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해왔다. 자신은 황제의 신하였다. 황후와는 어떠한 접촉도 하지 않았는데, 이런 자신에게 어찌 군신 관계까지 위협하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조금 전 서풍엽이 장서열과 마주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평온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의아할 만큼 담담했다. 그런데 황제는 대체 뭐가 그리 못마땅하여 기어코 자신을 혼인시키려는 것인가.

서풍엽은 화가 난 나머지 자제력을 잃기 시작했다.

“폐하, 어찌 이렇게까지 하시옵니까? 혹시 폐하께서 스스로 자신이 없으셔서 필히 소신을 혼인시키려는 것이라면 소신, 감히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흔들리고 있다 여기고 한 가닥 희망을 품어도 되겠습니까?”

구염락이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서풍엽을 훑어보았다. 서풍엽은 부당하다는 듯 그를 마주보았다.

‘이미 서열이를 보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내 혼사에까지 간섭하려 하다니! 무슨 자격으로!’

구염락이 손에 든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창백한 손가락에서는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이런 정도의 자극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고, 따라서 서풍엽의 반발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한 차례 코웃음을 친 구염락은 다시 손에 든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맹물보다 마시기 힘든 고상한 차였다.

“왜 그런 눈으로 짐을 보는 것이지? 다 그대를 위한 일이다. 혹시라도 황후가 그대의 혼사를 신경을 쓸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닐 테고… 설령 그대가 죽는다 해도 그녀는 기껏해야 잠시 놀라서 한숨을 쉴 뿐, 계속해 일상을 이어 갈 것이다.”

“…….”

“짐이 그대의 혼사를 염려하는 건 자네의 모친을 위해서야. 충왕비께서도 이제 연세가 적지 않은데, 대체 언제까지 아들이 마음을 접을까 노심초사하게 만들 셈이지? 지금 그대의 모습을 봐라.”

잠시 경멸하는 눈빛으로 서풍엽을 훑어본 구염락이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대의 서출 형제, 누이가 연이어 혼인을 했다고 들었다. 동생은 무과에 급제하여 지금은 제일군에 있지. 참으로 장래가 기대되는 젊은이야. 짐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무예에 정진하였다는 얘기에 감동을 받았고, 한번 키워볼 만한 인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이미 가정을 이루어 슬하에 이남일녀를 둔 덕분에 충왕께서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고 하던데.”

“…….”

“능력도 그대에게 못 미치고, 서출이라는 꼬리표도 영원히 바뀌지 않을 테니 관직이야 아무리 높아도 장군 정도가 다일 거야. 하지만 그대는 장래에 왕부를 이끌 충왕인데…….”

구염락의 입가에 경멸하는 미소가 점점 진해졌다.

“…매사에는 이변이 있는 법이지. 그대가 이대로 혼인도 하지 않고 자식조차 없다면, 그래도 그대가 장래의 충왕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 세자께서는 항상 충성스럽고 정을 중시하시니 그런 세속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겠지만, 그대의 어머니는?”

“…….”

“그대의 아버지는 뜻대로 되지 않는 아들을 다른 아들로 대체할 수 있다지만, 그대의 어머니는 생각이 다를 텐데? 계속 이런 식이라면 충왕비께서는 독수공방할 준비를 하다가 결국 첩실의 아들에게 왕위를 내어준 후 심신을 수양하다 세상을 떠나야겠지.”

잠시 말을 마친 구염락이 안타깝다는 듯 냉소를 지었다.

“충왕비께서는 생에 미련이 많고 승부욕이 강한 분이지. 그토록 바라는 게 분명한 여인이 결국 며느리를 가르칠 수도, 손주들과 놀아줄 수도 없는 말로를 맞이하게 되다니. 참으로 가련하고 슬프구나.”

구염락은 씁쓸함을 참으며 손에 든 차를 한입에 다 털어 넣었다. 그의 손이 느긋하게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차보다 찻잔이 몇 배는 더 보기 좋았다.

구염락을 노려보는 서풍엽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정곡을 찔린 탓이었다.

서풍엽은 세상 모든 사람의 기대를 저버릴 수 있었지만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어머니는 여전히 그를 지지해 주는 든든한 아군이었다. 그녀는 아들에게 혼인을 강요하지도, 압박을 주지도 않았다.

심지어 충왕비는 아들이 조씨 가문에 자주 드나드는 것에 대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충왕비 자신이 더 자주 조부를 찾았으며, 과거의 일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어머니이기에 서풍엽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혼인은…….

“그대는 좋은 어머니를 두었다.”

구염락은 있는 그대로를 담백하게 말해 주었다.

그때 장서전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서둘러 오느라 얼굴이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집사를 따라 빠르게 안으로 들어온 그가 다급히 예를 갖추었다.

“소신,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일어나라.”

구염락은 찻잔에 다시 차를 따랐다. 오랜 시간 마시며 습관이 되었고, 많이 마시다 보니 시사詩詞에서 묘사하는 은은한 청향을 음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차에 심취하여 식사 때마다 반드시 찾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몸을 일으킨 후 땀을 닦던 장서전은 순간 옆에 앉아 있는 서풍엽을 보고 놀란 나머지 피곤한 두 다리로 다시 한번 무릎을 꿇을 뻔했다.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서풍엽을 바라보며 장서전은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걸 느꼈다.

‘폐하께서 어찌 세자와 함께 계시는 거지? 게다가 후원에는 서열이도 있는데, 이게 무슨 난리야!’

장서전은 윗전의 마음은 역시나 추측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구염락은 장서전이 계속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좋은 마음으로 상황을 일깨워 주었다.

“경과 세자의 관계가 짐을 부럽게 하는군. 오늘 짐은 황후와 함께 처가에 방문했다 세자가 장모님을 위해 약을 갖다 드리는 모습을 보았지. 짐은 참으로 감동했어. 장모님께서는 여전히 세자를 아들처럼 대해 주시더군.”

두 다리에 완전히 힘이 풀린 장서전이 풀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 소신은…….”

구염락이 선심을 쓰듯 손을 들어 올렸다.

“일어나라. 짐은 세자도 좋은 마음으로 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저 경이 집에 없을 때 후원에는 아녀자들뿐이니, 앞으로는 경이 집안을 잘 살피는 게 좋겠어. 혹여나 좋지 않은 말이라도 돌게 되면, 나의 두 신하들이 전부 창피를 당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구염락, 이 나쁜 자식!’

서풍엽은 구염락을 한 대 치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점점 말을 함부로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 기분이 나쁘면 서열이 앞에서도 그렇게 말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 전 아내의 앞에서는 너그러운 모습으로 호형호제를 운운하며 자신을 은인이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돌아서자마자 바로 안면을 바꾸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다니!

그건 앞으로 다시는 조씨 가문에 출입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구염락은 또 한 번 이런 일이 발생하면 불필요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도 남을 만큼 시꺼먼 속내를 지닌 자였다.

한편, 장서전은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세자는 어렸을 때부터 조부를 드나들었다. 어머니께서 내버려 두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장서전 자신조차 문제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황제처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장서전은 바보가 아니었다. 황제는 세자가 조씨 가문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누이동생을 걱정하는 모습이 기분 나쁜 것이다. 그래서 적절한 명분을 찾아 이들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폐하께서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으신 게 아닌가.’

장서열은 이미 오래 전에 황제와 혼인하여 황자를 낳았고, 4품 양원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황후가 되었다. 만에 하나 감정이 없었다 해도 여태껏 충분히 감정이 무르익고도 남을 만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그리도 친분이 두터웠는데, 대체 이제 와 무슨 질투를 한단 말인가. 그것도 밑도 끝도 없이!

그러나 장서전은 생각만 할 뿐, 감히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구염락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가 누이동생에 각별하다는 건 물론 좋은 일이었다. 기껏해야 앞으로 서풍엽이 좀 억울해지겠거니 했는데, 정말 그랬다.

서풍엽은 더 이상 구염락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서열이와 특별한 사이가 아니라고 해도 과거 자신에게 베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녀의 어머니를 보러 오는 것도 안 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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