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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20)화 (320/449)

제320화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마마, 천세 천세 천천세.”

장서열은 주사섬을 좋아했다. 그녀가 다급히 농교에게 올케를 부축해 일으키라 명했다.

“그렇게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됩니다. 만난 지도 오래됐고, 요즘 좀 갑갑하더군요. 언니가 저를 보러 궁에 오질 않으니 저라도 언니를 만나러 출궁을 해야지요.”

주사섬은 시누이의 말에 급히 사죄했다.

“송구하옵니다, 황후마마.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마마께 마땅히 가지고 갈 선물이 없어 차마 뵐 면목이 없기에 찾아뵙지 못하였습니다.”

장서열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언니가 언제든 오라버니에게 아이를 낳아 준다면 그것이 본궁에게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주사섬의 얼굴이 바로 붉어졌다. 사실 그녀는 요 며칠 몸이 좋지 않아 외출을 하지 못했다. 주사섬은 기대를 가지고 의원을 불렀으나, 의원은 아직 너무 일러 확신할 수 없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장서열은 붉어진 주사섬의 얼굴에 즉시 놀란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조옥언의 생각은 완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조금 전 폐하께서 서풍엽과 함께 나가시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딸은 전혀 초조한 기색이 없다니!

황제는 아내의 과거 정혼자가 장모인 자신을 찾아와 약을 사다 주고 후원까지 와서 문안하는 모습을 보았다. 헌데 딸은 어찌 이렇게도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조옥언의 머릿속은 온통 딸이 어머니를 부르며 반갑게 달려왔을 때, 서풍엽이 문을 열어 주던 해괴한 장면으로 가득했다. 뒤에 서 있던 황제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것을 보자 그간 제왕의 얼굴을 볼 만큼 본 그녀조차 겁이 나서 가슴이 떨렸다.

하지만 딸의 시선에 조옥언은 다급히 마음을 정리하고 며느리를 쳐다보았다. 며느리 앞에서 체면을 깎을 수는 없었다.

조옥언은 며느리가 마음에 들었다. 사실 막 시집을 왔을 때는 썩 성에 차지 않았다. 외모부터 탐탁잖았던 며느리는 무슨 일이든 감당하지 못하고 줏대 없이 종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가문의 안주인이라 할 만한 면이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해 동안 조옥언은 주 씨의 성장을 보았다. 입궁이 잦아지며 지존을 마주하는 일에도 익숙해진 덕분인지 그간 주 씨의 기개는 점점 성장하여 지금은 황후와 대화를 나눌 때에도 지나치게 아첨하는 기색 없이 기품을 잃지 않았다. 보고 있자면 제법 흐뭇했다.

조옥언은 의원의 말을 딸에게 전해 주었다. 가문에 아이가 한 명 더 태어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조옥언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의원이 더 기다려 보자고 말하긴 했으나, 내 보기에는 거의 틀림없다. 이 년 가까이 소원했는데 드디어 조씨 가문에 또 아이가 생기겠구나.”

조옥언은 말을 하며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조금 전 놀랐던 마음이 가라앉은 듯 안색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사람이 늙으면 쓸모없어진다고 했던가. 이런 적이 없었으나 조옥언은 이상하게도 요 며칠 기침이 멈추질 않아 수고스럽지만 서풍엽에게 직접 약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었다.

장서열은 어머니와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서풍엽을 마주쳤을 때 약간 놀라기는 했으나 그건 놀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이 넘은 나이에도 서풍엽은 여전히 온화했다. 그의 눈 속에 스친 놀라움과 반가움이 감동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일들을 겪은 장서열은 그저 무덤덤했다. 그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고 해도 이미 오래 전에 잊은 감정이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함부로 상대방에게 희망을 주거나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그건 낭만이 아니라 무책임한 것이니까.

한편, 두 모녀의 이야기를 듣는 주사섬은 몹시 부끄러웠다. 다홍색의 삼품 고명誥命(봉호를 받은 부녀) 복식이 그녀의 수줍은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정갈하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장서열은 주사섬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올케의 모습은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과거 주사섬은 조씨 가문의 은인이었다. 흔히 한 집안에 시집을 온 여인은 설령 남편이 별 볼 일이 없는 작자라도 시어머니와 남편을 정성껏 모셔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장서열의 생각은 달랐다. 주사섬처럼 시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모시고, 몰락한 남편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전생에서 주사섬은 추우나 더우나 성심성의껏 가문을 돌봤다. 장서열은 언젠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늙어 버린 올케의 모습이 부끄러운 나머지 화를 냈던 기억이 있었다. 한 번도 어머니에게 효도한 적이 없는 자신을 대신해 마지막까지 곁에서 효도를 다한 사람 역시 올케였다.

오늘날 올케가 잘 지내는 모습은 장서열을 기쁘게 했다. 올케에게는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장서열은 올케가 언제나 오라버니의 마음을 사로잡길 바라는 마음에 특별한 일이 없을 때면 자주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녀가 보다 대범해지고 견문을 넓혀서 사람들을 대할 때 자신감을 갖길 바랐기 때문이다.

“경사가 생겨서 기분이 좋을 텐데, 이럴 때 언니에게 폐를 끼쳤으니 본궁의 잘못이 큽니다. 본궁이 사과를 해야겠군요.”

장서열은 계속해 미소 지었다.

“빨리 부인을 자리에 모시지 않고 뭣들 하느냐. 혹여나 복중 태아를 소홀히 대한다면 본궁이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시누이가 놀리자 주사섬은 짐짓 반발하는 표정으로 시누이를 쳐다보았지만 속으로는 기쁨과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이번만큼은 복중 태아가 아들이길 바랐다. 분명 남편 또한 기뻐할 것이다.

주사섬의 꿈은 소박했다. 그녀는 그저 남편을 받들고 자식을 잘 키우길 바랐다. 혼인하여 남편이 그렇게나 자신을 아껴 줄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딸을 낳은 후, 주사섬은 더 이상 서 이랑에게 탕약을 주지 않았다. 아들을 낳지 못하게 하는 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 장서전은 남몰래 다시 서 이랑에게 약을 주었다. 이 또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주사섬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기대한 것은 참깨 한 알이었으나, 놀랍게도 과실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나무를 발견했다. 보잘것없는 그녀에게는 너무도 과분한 사랑이었다.

* * *

한편 두 남자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도, 서로의 거만함을 과시하는 상황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매우 이성적이었다. 까마득히 높은 제왕인 구염락은 지금 신하와 시국을 논하고 있었다. 그는 시의적절하지 않은 사람이 시의적절하지 않은 장소에 나타난 것에 대해 일말의 내색도 하지 않았다.

서풍엽 역시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환한 용모로 그 특유의 강단을 보여 주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조씨 가문을 드나들고 있다는 과시, 혹은 조옥언이 여전히 자신을 사위처럼 대접하고 있다는 득의양양함 같은 건 내보이지 않았다.

성숙한 두 남자는 마음속 감정과 원망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상대에게 오히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구염락은 온몸으로 천하를 품은 기개를 드러냈다. 박학다식한 면모와 패기 넘치는 언행은 높은 자리에 앉아 있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한 수 부족하긴 했으나 서풍엽 역시 신하로서 나라를 위하여 온 힘을 다했고, 이어지는 황제의 질문에도 결코 주눅들지 않았다. 그는 가진 것은 없어도 신하로서의 기백만큼은 올곧은 자였다.

두 사람은 바깥 대청에서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의 주제는 곧 개최될 문회와 백국의 최근 동향 등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호국의 방문 의도는 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구염락은 제일대국으로 정평이 난 호국에 대하여 제왕으로서 마땅히 보여야 할 무심함을 보여주었다. 아울러 그 제일대국이 백국을 위해 사정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위축된 조정 대신을 위로하기도 했다.

겉으로는 사정이었으나, 실상은 백국 침략을 포기하라고 주국을 위협하는 행위였다. 만약 주국이 선을 넘는다면 제일대국은 제 나름의 정의를 펼치려 할 것이다.

서풍엽은 국가 대사를 거침없이 언급했다. 특히 화친을 얘기할 때에는 눈이 반짝거렸고, 이번에 호국이 영덕제에게 공주를 하사한 것은 최고의 영광이라고 치켜세웠다.

구염락은 처음 맛보는 차를 음미하며 담담하게 서풍엽을 보았다. 무관심할뿐더러 일말의 동요조차 없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신하가 호국이 내려 준 ‘영광’을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조정에서 감히 엉뚱한 자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여인을 보내서 뭘 하겠다는 거지? 나를 감시라도 하겠다는 건가?’

웃기는 소리였다. 권세는 변하는 것이다. 대체 언제적 제일대국이란 말인가. 그들은 다른 나라의 후궁에 누가 들고 나는지 간섭할 수 있을 만큼 자신들의 세력을 자신하는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자들이었다.

서풍엽은 구염락의 눈을 스치는 호전적인 눈빛에 순간 호국을 향한 두려움이 절로 사라지는 걸 느꼈다.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그들에게는 전쟁에 능한 제왕이 있고, 그의 호령에 응답하는 군사들이 있었다. 최악의 경우 황제가 다시 한번 전장에 출정하여 진정으로 흉악무도한 게 무엇인지를 보여 주면 된다.

그때가 되면 누가 누구를 치게 되는 상황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서풍엽은 왠지 구염락을 좀 놀리고 싶어졌다.

구염락의 초라한 과거를 기억하기 때문일까. 서풍엽은 가끔 과감히 선을 넘었다. 하지만 그런 서풍엽조차도 조정에서 구염락이 보여 주는 활약이 마치 정해신침定海神針(손오공의 여의봉)과 같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세상은 그가 있어야만 평안한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이번 호국의 방문이 비단 경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즉시 침략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대주국 수천수만의 장수들은 반드시 돌격하여 적진을 함락시킬 것이다. 설령 지게 되더라도 황제는 분명 호국의 군사들에게 살아서는 고향 땅을 밟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리라.

구염락이 서풍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가 올해 몇 살이지?”

황제가 이렇게 빨리 화제를 전환할 거라 미처 예상치 못한 서풍엽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그가 바로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예, 폐하. 소신 올해 스물하고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로군. 언제 혼인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지. 좋다, 짐이 그대를 돌보지 않는다는 말이 들리지 않도록 호국에서 보낸 여인을 그대에게 하사하겠다.”

아쉽다는 듯 구염락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잘해 주게.”

서풍엽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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