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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19)화 (319/449)

제319화

장서열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바닥에 내던졌다. 연약한 몸은 분노로 인해 온통 떨리고 있었다.

아내의 외침에 곧장 발을 들어 올린 구염락이 자신을 덮치려는 어깨를 발로 걷어찼다. 가지각색으로 이루어진 비단 몇 필이 퍽 소리를 내며 멀지 않은 노점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한 무더기의 분첩이 금용의 얼굴 위로 쏟아지며 볼썽사나운 광경을 자아냈다.

적잖이 놀란 구염락이 다급히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분노의 원인이 꼴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을 뒹굴자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만약 금용을 그대로 두었더라면 장서열은 절대로 가만있지 않았으리라. 빠르게 반응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된통 당할 뻔했다.

구염락은 안절부절못하며 장서열의 뒤에 서 있었다. 불현듯 황당한 패배감이 들었다. 아직 그녀와 담판을 짓지도 못했는데, 대체 이 상황이 두려울 게 무엇이란 말인가. 왜 자신이 안절부절못하는 거지?

하지만 구염락은 즉시 깨달았다. 자신이 화를 내는 건 별것 아니었다. 좀 억울하긴 할지언정 충분히 다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장서열이 화를 낸다면 그는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 될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심정을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금용이 발버둥 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서열은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는 걸 느꼈다. 금용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매몰찬 멸시가 담겨 있었다.

곁눈질로 금용을 한 번 훑어본 소리자는 즉시 평소처럼 돌아와 황제의 옆을 지켰다. 그는 감히 나서서 손을 잡아주려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다.

금용의 옆을 따르는 계집종은 어린아이였다. 소녀는 금용이 고통스러워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뒤 이랑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이랑, 이랑!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아주 대담하구나! 방금 너희가 발로 찬 사람이 누구인지 아느냐?”

어린 소녀의 누렇고 마른 얼굴은 최근 약간 살이 올라 있었다. 소녀의 눈에는 주인을 아끼는 마음과 도덕군자인 양 점잔을 떠는 무리에 대한 멸시로 가득했다.

황제의 시위대 사이에서 큰 키에 마른 그림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창백한 손을 내민 그가 호통을 치는 소녀의 긴 머리카락을 힘껏 잡아챘다. 그대로 머리카락을 뽑아버릴 듯한 기세였다.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시위는 소녀를 들어 근처에서 간식을 파는 노점을 향해 던졌다. 뜨거운 기름 솥이 엎어졌다.

비명이 들렸다. 장서열이 입을 채 열기도 전에 그자는 다시 시위대 속으로 사라졌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장서열이 멍한 눈으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그는 차분하고 느긋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는 듯, 누구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에 만족한 듯했다.

뻣뻣한 시선을 옮긴 장서열은 멀지 않은 곳에서 어린 소녀가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았다. 소녀는 황제를 모독했다. 구염락의 성격상 이 정도의 처벌은 상당히 가벼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궁이 아닌 밖이었고, 소녀는 그가 황제인 걸 알지 못했다. 고작 열몇 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소녀에게 이렇게 심하게 굴 이유가 뭐란 말인가. 거기다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장서열이 다급히 아들을 바라보았다.

구염황은 바닥에 떨어진 옥선玉扇을 바라보며 한 손으로 유모의 옷자락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줍고 싶다는 뜻이었다. 아이는 조금 전 벌어진 잔인한 광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제야 한숨을 돌린 장서열은 조금 전까지 떠들썩한 구경을 하기 위해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흩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장서열도 금용을 괴롭히려는 의도는 없었다. 단지 조금 전 금용이 손쉽게 구염락의 수하들을 뚫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화가 났던 것뿐이다. 심지어 지금은 화도 누그러졌다. 평소 그의 수하들은 아무리 낯익은 얼굴이라도 결코 황제에게 접근하도록 두고 보지 않았다.

구염락의 대응은 훌륭했고, 장서열은 그를 원망할 만한 어떠한 꼬투리도 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역시 구염락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그의 대처는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었다.

“저 아이에게 의원을 불러 주거라.”

말을 마친 장서열은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멍한 얼굴의 금용은 너무 놀라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옷을 더럽힌 분가루를 터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금용은 고통스럽게 땅을 구르는 하녀를 바라보며 조금 전 자신을 발로 차던 구염락의 모습을 떠올렸다. 온몸이 다 오싹했다.

황제는 한번 마음먹은 일에 있어 가혹할 정도로 냉정한 사람이었다. 금용은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장서열을 증오하면서도 감히 그녀를 도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간 금용은 자신이 황후를 피해 황제를 구워삶는다면 당연히 그가 자신을 받아줄 거라 믿었다.

황후가 된 장서열은 분명 어진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이미 출궁시킨 여인과 이런 사소한 일로 실랑이를 벌일 필요가 없을 것이고, 동시에 황제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린다면 금전적으로 자신을 좀 도와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주소유와 겨루기 위해서는 돈이 주는 여유가 필요했다.

몸을 움츠린 금용은 처량하게 울고 있었다. 조금 전 가차 없이 날아든 황제의 발길질과 소리자의 냉담한 눈빛은 그녀를 지옥으로 떨어뜨렸다.

‘끝났다. 다 끝났어.’

이제 금용에게 남은 건 헌원씨 가문뿐이었다.

한편 장서열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앞서 걷는 구염락은 순종적인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전 마치 그녀가 용서할 수 없는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뭔가를 캐내고 싶어 하던 표정을 지운 채였다.

하지만 장서열은 차라리 구염락이 조금 전처럼 행동하길 바랐다. 지금 드는 이 싱숭생숭한 기분을 넘기려면 그 편이 나았다. 회임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요즘 그녀는 이해심이 확실히 줄어들었고, 그런 지나친 행동들은 차마 볼 수 없었다.

십여 년 동안 마음을 수양한 덕분일까. 장서열은 자신도 모르게 좋은 사람으로 물들어 버렸다. 안팎으로 완전히 변해 버린 느낌이었다.

걷는 내내 장서열을 쳐다보던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아이와 장난을 치면서도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구염락이 앞으로 나가 장서열의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럽게 위로하듯 말했다.

“안심해. 의원을 불러 줬으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남편 말, 믿지?”

그녀는 다 좋은데 마음이 여린 게 탈이었다. 만약 그가 늙어서 아픈 척하면 그녀는 분명 마음 아파하며 죽을 때까지 그를 돌봐 줄 것이다. 그 태감이 누구인지 누가 기억이나 하겠는가.

장서열은 구염락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좀 보세요.”

엉뚱한 사람이 다치는 바람에 정작 제대로 부끄럽게 만들었어야 할 금용을 실컷 손봐 주지 못했다.

“제가 당신의 홍안지기紅顔知己(남자가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성 친구)를 괴롭힐까 걱정되어 선수를 친 것이지요? 제가 당신의 여인을 혼내지 못하게 하려고요!”

장서열은 진지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 구염락은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표정으로 곧장 해명했다.

“지금 농담하는 거야? 여인이라 할 수도 없는 일개 궁녀 출신일 뿐이야. 당신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 그 아이를 걱정하는 날은 내가 눈이 멀었단 뜻이야.”

‘일개 궁녀 출신?’

순간 장서열은 말문이 막혔다. 과거 그 ‘일개 궁녀’를 특별히 총애하여 뭐라도 되는 것처럼 떠받든 사람이 누구인가. 구염락의 몇 없는 아들 중 금용의 소생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그가 금용을 위해 무슨 짓을 불사했을지 알 수 없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서둘러 다시 말했다.

“정말 아니야.”

장서열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에는 이렇게까지 신분 고하를 따지지 않았잖아요.”

구염락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신이 내가 그들과 가깝게 지내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구염락은 확실히 이것이 옳은 행동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노비들은 최선을 다해 그에게 충성했다. 황권이란 좋은 성격이나 아랫사람들과의 즐거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장서열은 할 말이 없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한 사람의 행동이 모든 걸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든 그가 황좌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명정과 서풍엽 모두 출중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만약 명정이 황실에서 태어났다면 그 역시 근면한 제왕이 되었겠지만, 변경을 개척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지금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사내야말로 진정한 제왕이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니 길을 서두르는 게 좋겠어.”

“네. 누군가 실수로 당신과 부딪치면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구염락이 하하 웃으며 그녀의 이마를 콕 찍었다.

“무슨 엉뚱한 소리야.”

구염락이 하인에게 마차를 끌고 오라고 손짓했다.

* * *

조씨 가문은 이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편액을 바꿔 단 것을 제외하면 입구에 화초가 자랐다 정리된 흔적까지 전과 똑같았다.

그 시각, 장서전은 제일군에 있었다. 몸이 불편하여 안정을 취하던 주사섬은 황제와 황후가 왔다는 하인의 전갈에 놀라서 혼비백산할 뻔했으나, 다행히 최근 몇 년간 자주 입궁하여 황후를 만나 왔고, 황제 역시 두 번이나 만난 적이 있었기에 금세 진정되었다.

서둘러 의복을 갈아입은 그녀는 하인에게 성심껏 귀빈을 영접하라 명하고, 군영에 사람을 보내어 남편에게 귀가를 청했다. 지금 집안에는 부인과 아이들뿐이라 황제를 모실 사람이 없었다.

부인의 지시에 따라 뒤를 돌던 홍석紅石이 무엇인가 또 생각난 듯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부인, 황후마마께서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전하셨습니다. 가볍게 나들이할 겸 오신 것이기에 의장儀仗(제왕이 의식을 갖추어 외출할 때에 쓰던 깃발이나 무기 따위)도 없이 오셨다 합니다.”

어느새 말끔하게 복장을 갖춘 주사섬이 홍석에게 서둘러 움직이라고 지시했다. 상전이야 급할 게 없다 이를 수 있으나 어디 아랫사람들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야 되겠는가. 어리석기는!

주사섬이 시어머니의 정전에 도착했을 때 황후는 이제 막 회임 육 개월이 된 배를 내밀고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황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극히 오붓한 모습이었으나 주사섬은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황후를 바라보는 시어머니의 양미간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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