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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17)화 (317/449)

제317화

장서열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아차린 구염락은 잠시 놀랐지만 곧 팽팽한 긴장의 끈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답답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자유로워졌다.

“무슨 소리야. 한낱 후궁을 두고 뭐 하러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겠어. 이 하늘색이 보기 좋군. 이 옷으로 하지.”

‘어제 시침을 들라고 부른 게 누구였더라… 일단 묻어두자. 그래야 서열이가 안심할 거야.’

장서열은 옷을 골라 주는 구염락의 시선을 감히 피하지 못했다. 무심한 얼굴에서 때로 평온한 눈빛이 출렁였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옷을 갈아 입혀 주다가도 때때로 멍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러다 결국은 귀찮아졌는지 완정에게 시중을 들라고 했다.

하지만 구염락은 곧 다시 흥미가 생긴 듯 완정의 손에서 옷을 건네받아 느릿느릿 매듭을 묶어 주며 이따금씩 마음에 드냐고 물었다.

장서열은 가늘고 긴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가슴 앞에서 느긋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복잡한 나비매듭을 묶는 구염락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고정된 시선은 진지하게 매듭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무심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속 깊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듯, 귀한 장난감이 망가질까 두려운 듯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장서열의 마음이 위축되었다. 혹시 어제 그가 일찍 돌아왔었다면…….

‘정말 돌아왔던 거야?’

순간 긴장한 장서열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무슨 얘기라도 들은 걸까? 명정을 물속에 던져서 물고기 밥으로 만들면 어쩌지? 이미 명정에게는 충분히 미안한데, 구염락이 설마…….

장서열은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우선 진정해야만 구염락에게 이치에 맞는 말을 할 수가 있었다. 만약 그가 무엇을 들었거나 직접 본 것이라면, 최대한 이성적으로 자신의 변명을 들어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장서열은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변명해야 한단 말인가.

머릿속으로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장서열은 슬프게도 자신에게 변명할 구실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이번 생은 환생한 것이라고 말해 봐야 누가 믿겠는가. 그나마 구염락이 그 즉시 명정을 죽이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장서열은 있는 힘을 다해 냉정을 유지하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구염락이 정말 명정을 의심했다면 오늘 이렇게 여기 와 있을 리 없잖아. 아니면… 아예 결판을 낼 생각인가?’

장서열은 돌연 냉정해졌다. 그녀는 이번 생에서 명정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그에게 재난을 선물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염락은 자신의 부군이었다. 구염락이 입을 열지 않는다면 그녀는 아내로서 절대로 다른 남자를 위해 그에게 사정해서는 안 된다.

‘아니면… 내가 너무 쓸데없이 생각이 많은 걸까?’

장서열이 진지한 눈으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금테가 둘려진 암갈색 평상복은 기개를 잃지 않으면서 평소보다 약간 어려 보이는 인상을 주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놀라울 정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그녀에게 옷을 갈아 입혀 주고 있었다.

장서열이 가벼운 목소리로 탐색하듯 입을 열었다.

“폐하.”

“응…….”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는 그의 목소리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는 손에 쥔 비단 끈이 점점 아름다운 나비매듭으로 변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완정이 가지고 온 각종 장식품 중 진지하게 하나를 골라 든 구염락이 매듭 한가운데 장식을 꽂아 날개를 고정시켰다. 기분 좋게 손을 뗀 그가 감상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군.”

장서열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확실히 그에게 미안한 일을 했다. 그의 기분이 상한 것도 당연했다.

구염락의 다정한 손길에 장서열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완정이 건네주는 겉옷을 받아 어깨에 걸치며 그녀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그는…….”

“아침 식사는 과일과 채소를 먹는 게 좋겠어. 어선방에서 신선한 채소를 보냈거든.”

구염락의 표정과 태도는 자연스러웠다. 이 순간만큼은 멀쩡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 그가 풀고 싶은 대로 풀도록 내버려 두자.’

도무지 그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던 장서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구염락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아무 일도 없는 듯 그녀에게 즐거운 하루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아내와 아이와 함께 걸으며 자신의 존재가 그녀를 꽉 채우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동이 부자연스럽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서열이도 불안해하고 있지 않은가. 구염락이 자조하듯 웃었다. 자신은 모든 걸 망쳐 놓고 있었다.

구염락은 스스로 자제력을 과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마터면 일을 그르칠 뻔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렇게 짧은 시간에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는 목소리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물론 구염락은 대단히 신경이 쓰였다. 신경이 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죽을 먹고 싶으면 그렇게 해. 특별히 먹고 싶은 건 없어?”

“호 태의도 채소를 많이 먹는 게 좋다고 했어요.”

장서열은 구염락의 태도를 보며 무언의 확신을 얻었다.

‘들킨 거야.’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편 구염황은 유모의 품에서 내려 달라고 계속 고집을 부렸다. 더는 안고 있을 수가 없자 유모는 마음속 두려움을 참으며 천천히 태자를 내려놓았다. 혹시라도 전하가 변덕스러운 폐하께 달려든다면 반드시 쫓아가야 했다.

유모는 순간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이렇게 일찍 내빼다니, 명정은 아주 현명했다!

장서열이 몸을 숙여 아들을 안으려 할 때였다. 순간 구염락의 차가운 눈빛이 아들을 훑고 지나갔다.

놀란 구염황은 몸을 움츠렸다. 아이는 반사적으로 작은 입을 삐죽이며 울음을 터뜨리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아버지에게서 조금도 달래 주려는 기색이 없자 아이는 감히 울음소리를 내지 못했다.

아이는 섭섭한 마음에 온화한 어머니를 쳐다보며 쭈뼛쭈뼛 아버지를 피해 손을 내밀었다. 구염황은 뒤에 선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옆에서 앙증맞게 몸을 웅크렸다.

장서열은 구염황을 보며 웃었다. 손을 내밀어 부드러운 손바닥을 잡은 그녀는 구염락을 책망하는 기색 없이 곧장 식당으로 걸어갔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위엄 있는 존재였다. 사리를 분별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장서열은 아이를 대하는 구염락의 행동에 어떠한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설령 그가 틀렸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구염황에게는 옳고 그름보다 준엄한 본보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구염락은 결코 정도를 넘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황아야, 배고프지? 오늘 우리는 특히 배부르게 먹어야 한단다. 이따가 아바마마와 함께 나가 놀려면 말이야.”

구염황은 웃지 않는 아바마마를 바라보며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착실하게 작은 머리를 끄덕였다. 나가서 논다는 말 앞에 아바마마라는 말이 붙자 이전처럼 흥분하기보다 그게 약간 어색한 듯했다.

구염락이 먼저 자리에 앉았고, 장서열이 그 옆에 자리했다. 구염황은 아바마마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가장 긴 젓가락을 집어 들고 흥미진진하게 밥 먹을 준비를 했다.

구염락은 채소와 과일이 가득 차려진 식탁을 주시하며 식기에 손을 대기 전, 무심한 듯 물었다.

“태자의 시중을 드는 태감이 보이지 않는군.”

장서열은 혜령이 바친 젓가락을 받아 두 손으로 구염락에게 건넸다. 그녀가 가벼운 일상을 얘기하듯 입을 열었다.

“어제저녁 약을 빻다가 감기에 걸렸다고 합니다. 자칫 태자에게 옮길 수 있으니 시중을 들지 말라 일렀습니다.”

구염락은 장난치려는 아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태연자약한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조금도 의심스럽지 않은 모습이었다. 만약 그 장면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다면, 그는 역으로 황후를 모해한 자들을 죽였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 쓸모가 없다면 남겨 둘 필요가 없겠군.”

장서열은 말없이 소맷자락을 걷어 올린 후 얇게 썰린 과일을 집어 들었다.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더 입을 떼지 않는 것을 보자 속으로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제 그자를 땅에 묻거나 죽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구염락은 바로 이성을 되찾았다. 장서열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면 할수록 그는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언급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박함을 느꼈다.

구염락은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반드시 기다려야 한다.

채소찜을 한 입 먹은 장서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이를 놀라게 한 것도 아닌데 무슨 큰일이라고요. 어쨌든 황아 옆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입니다. 자꾸 그리 말씀하시니 누구도 감히 태자의 시중을 들 생각을 못 하지요.”

구염락이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은 말투로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졌다. 심지어 호흡 또한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다.

구염락은 돌연 확신이 없어졌다.

그날 본 사람이 정말 서열이가 맞나? 혹 완정이 황후처럼 꾸민 것일 뿐, 진짜 서열이는 놀러 나갔던 게 아닐까?

“왜요, 입맛에 안 맞아요? 아침 일찍부터 이렇게 단 걸 먹으니 그렇죠.”

구염락은 그릇 위에 놓인 배추를 보며 여전히 그녀에게 진실을 묻고픈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두려움 없는 장서열의 눈을 마주하자 어딘가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신처럼 냉정하고 태연한 여인 앞에서 추태를 보인 기분이었다.

구염락은 스스로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굳이 이런 모습을 그녀에게 드러내야만 할까?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장서열의 생각은 단순했다. 구염락이 물어보면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꼭 진실만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지만 적어도 거짓을 꾸며낼 수는 없었다.

장서열은 어제 도가 지나친 일을 하지 않았다고 자부했다. 만약 자초지종을 듣게 된다면 그 역시 충분히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구염락은 자신의 질문을 듣게 된 장서열이 무슨 답을 할지 몰라 차마 그 말을 물어볼 수가 없었다.

구염락은 끝내 말을 삼켰다.

“당신도 많이 먹어. 어선방에서 애를 많이 썼더군. 보기에는 물처럼 맑은 탕이지만 입에 들어가면 여러 가지 맛이 느껴지는 것이 정말 놀라워.”

구염락의 말투에는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섞여 들어갔다.

비꼴 의도는 없었다. 구염락은 그저 세상사가 무상하다고 느꼈다. 그는 난공불락의 황궁이 이토록 뒤숭숭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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