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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16)화 (316/449)

제316화

즉시 살기를 거둔 구염락이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가 걱정이 담긴 두 눈을 쳐다보았다.

장서열은 한 손으로 배를 보호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꽉 쥔 그의 주먹을 잡고 있었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구염락을 바라보던 그녀는 그가 고개를 들자 무거운 짐을 벗은 듯 웃어 보였다.

“괜찮으면 됐어요. 괜찮으면…….”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던 구염락은 문득 그녀의 여린 피부가 파랗게 변한 것을 발견했다. 불쾌한 듯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보던 그가 갑자기 융단의 한 귀퉁이를 주시하며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어젯밤 서 귀인을 불러 시침을 들라 했어.”

순간 멍해졌던 장서열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 두어 번 움직이던 입가는 끝내 다시 열리지 않았다.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구염락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복수했다는 쾌감이 올라왔다. 하지만 채 누릴 새도 없이 사라져 버린 쾌감을 뒤로 하고 곧 짙은 상실감이 따라왔다.

구염락은 감히 고개를 들어 장서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러다 그녀의 눈 속에 있던 마지막 온정마저 사라지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품으로 그녀가 달려가 버릴까 두려웠다.

구염락이 절박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저 앉아만 있느라 뭐가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 바보같이!”

구염락이 옆에 있던 찻상을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하지만 속으로는 못난 스스로에게 욕지거리가 나왔다.

장서열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마음이 아팠다. 오랜 시간 총애를 오래 받다 보면 어떤 일들은 그렇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데도…….

장서열이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누군가 시침을 드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신첩이 화를 참지 못하고 행여나 폐하를 걷어찰까 걱정이 되어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지 못하시겠다면, 적어도 제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기다려 주세요. 제가 충분히 시간을 두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제 생각에는… 그렇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

속으로 자책하던 구염락이 갑자기 발길질을 멈췄다. 장서열의 눈빛에는 약간의 노기가 어려 있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무표정한 눈빛으로 그를 한 번 훑어본 뒤, 옅은 냉기를 머금고 다시 내실로 걸어 들어갔다.

구염락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서열이가 신경을 쓰고 있어. 결코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야!’

장서열의 마음에 어찌 자신이 없겠는가. 그녀가 태감에게 한 마지막 말은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장서열은 떠나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물론 전제는 그가 계속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녀는 떠나지 않는다…….

그녀가 명정에게 한 말은 그저 공수표일 뿐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저 언제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는 악연으로 인해 안 좋은 결말을 보게 되었을 뿐.

구염락은 마음을 넓게 먹으려 했지만 속으로는 갑갑해 죽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상대가 일개 태감이라니!

자신이 태감보다 못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는 시간이 나는 족족 그녀와 함께했고, 무엇이든 그녀의 의견을 따랐다. 그런데 그녀는 일개 태감과 얼토당토않는 일을 벌였다.

‘대체 내가 얼마나 무능하면 이런 황당무계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구염락은 그대로 용의龍椅에 머리를 박고 죽고픈 심정이었다. 장서열은 지금 그를 모욕하는 걸까, 아니면 스스로를 모욕하는 걸까. 차라리 서풍엽이었다면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 일개 태감 따위가!

심지어 장서열은 그 태감을 안고 울었다. 언제부터 그런 부적절한 짓을 벌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대체 왜!’

새로 내온 찻잔이 날아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깨졌다. 장서열이 사라지자 더 이상 억누를 길이 없어진 분노가 계속해 불쑥불쑥 치솟았다.

너무 가당치 않은 얘기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젠장 맞을 태감이라니!

분노가 솟구친 나머지 구염락은 모든 태감들을 싸그리 찢어발기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머릿속으로 두 가지 감정이 빠르게 충돌했다.

한쪽에서는 그에게 이성을 되찾으라 경고했다. 장서열과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그러면 끝장이라고. 그가 모든 사실을 터뜨리는 순간 장서열은 난처할 것이고, 그는 역으로 면목이 없어질 것이다.

‘만일… 만일 서열이가 나를 버리고 그 망할 태감을 택한다면…….’

참아야 한다. 그에게는 득보다 실이 많은 일이었다. 반드시 참아야 한다!

어쨌든 그 역시 그녀를 놀라게 한 건 사실이지 않은가. 비긴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잊어야 했다. 더는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다른 한쪽에서는 사내도 아닌 그 죽어 마땅한 자에게 망신을 줘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과연 이 화를 삼킬 수 있을까? 그녀가 서풍엽도 아닌, 일개 태감과 도망친다는 건 더더욱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구염락은 줄곧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마치 마지막 관문을 남긴 용암이 덮쳐오듯 그야말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장서열의 목을 비틀며 왜 나를 버리려 하냐고,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인 거냐고 묻고픈 충동을 억눌렀다.

그는 장서열이 무슨 말을 하든 일단 변명을 시도하기만 한다면 다 믿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만에 하나… 변명하지 않는다면?’

구염락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녀와 얼굴을 붉히며 다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구염락이 뒤에 놓인 의자를 걷어찼다. 그는 숨을 쉬려 노력하면서 큰 걸음으로 장서열이 향한 내실로 들어갔다.

겉옷을 벗고 그녀의 곁에 누운 구염락이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했어. 당신을 화나게 하면 안 되는 건데… 아이는 괜찮아?”

“괜찮습니다.”

안쪽에 누워 있던 장서열이 빠르게 대답했다.

구염락은 흐릿한 천장을 주시했다. 묵직한 보석들이 달린 침대 휘장이 바깥의 흐릿한 등불을 가려 주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입 맞춰 줘.”

깊은 입맞춤은 필요 없었다. 가볍게, 어디든 괜찮았다.

그에게 필요한 건 단지 위로였다.

돌아누운 장서열이 반듯이 누워 있는 구염락의 얼굴을 마주했다. 감았다 떠진 그의 눈에는 의아한 침묵이 숨어 있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킨 장서열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의 입꼬리에 입을 맞춘 후, 그를 툭툭 두드려 주며 말했다.

“자요.”

구염락이 입술을 어루만졌다. 마음 한 귀퉁이의 주름이 펴지는 듯했다. 하지만…….

‘…서열이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그러나 구염락은 생각을 정리한 후 차분히 얘기할 수 있을 때 다시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먼 훗날 손자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 삼아 오늘 일을 들려줄 때에는 반드시 그 망할 태감을 비웃어 주리라. 절대로 좋은 말을 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 분노는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그 분수도 모르는 태감에게 쏟아 내야 마땅했다.

‘자리를 옮겨 달라고 했겠다?’

구염락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무엇을 원하든 그는 절대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돌아누운 구염락이 긴 팔을 뻗어 아내와 배 속의 아이를 품속에 끌어안았다.

“자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장서열은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더워…….”

지금은 삼복더위였다. 방 안 가득한 얼음도 회임을 한 그녀를 온전히 시원하게 해 주지 못했다. 게다가 구염락은 열이 많은 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안고 싶었던 구염락은 뻔뻔스럽게도 터무니없는 말을 했다.

“괜찮아. 조금 있으면 시원해질 거야.”

물론 그럴 리 없었고, 장서열은 점점 더 더위를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회임한 몸으로 더위를 견디는 건 잠깐 참는다고 넘어갈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폐하, 두 사람이 한 몸을 쓰고 있어요… 안 더울 리가요.”

“나는 지금 세 사람이지만 괜찮아.”

그 말에 장서열은 결국 참기로 했다. 잠이 들면 정말로 덥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장서열은 결국 두 번이나 잠에서 깨야 했다. 세 번째로 깨어나 옆자리를 더듬었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창밖에서 햇빛이 들어왔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으나 바깥은 이미 환했다.

장서열이 꽉 닫힌 침대의 휘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완정, 폐하께서는 언제 떠나신 것이냐?”

예상과 달리 밖에서 낭랑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이야. 중순이지만 이틀 정도 휴가를 보낼까 해. 일어났군.”

침대 휘장을 걷은 구염락이 높이 배가 불러 있는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발밑에는 엎드린 아들이 그의 신발을 물어뜯고 있었다.

구염락은 가족들을 보자 마음이 반짝반짝 빛나는 걸 느꼈다. 감히 이들을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려 하는 자는 누구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장서열을 부축하기 위해 구염락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장서열의 시선은 융단에 엎드린 채 아버지의 신발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구염황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가 화를 내며 아들을 번쩍 들어 올렸다.

“태자, 무얼 하느냐. 신발을 먹다니! 어서 일어나거라.”

구염락이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한발 앞서 장서열을 부축해 주었다.

“어차피 못 깨물어.”

다행이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자신을 보았고, 또한 가장 먼저 아들을 걱정했다. 그자가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는 그녀가 가장 궁금해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구염락이 황아를 들어 옆에 있는 유모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장서열의 환복을 도우려 손을 뻗었다.

“오늘은 쉬기로 했어. 함께 조부에 가 볼까?”

완정이 준비해 둔 옷을 하나씩 펼쳐 놓은 구염락은 너무 수수하다는 이유로 좀 더 선명한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완정은 감히 거스를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곧장 황명에 따랐다. 그녀는 특히나 어제부터 폐하께서 소름 끼치도록 무섭다는 말을 전해 들은 상태였다. 최대한 노여움을 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장서열이 의아한 얼굴로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쉬는 날이라니. 평소에 그는 매달 세 차례 휴식을 가졌고 한 번 쉴 때마다 이틀씩, 총 6일을 쉬었다. 평소 그리도 바쁘던 사람이 오늘은 어찌 이리 한가한 걸까.

게다가 눈을 뜨자마자 구염락이 보인 건 거의 처음이었다. 장서열은 매우 어색했다.

“오늘은 안 바쁘신가 봅니다.”

“응.”

장서열은 옷을 골라 주는 구염락의 정성 속에서 어딘지 모르게 그가 절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득문득 느껴지는 사나운 기운은 충분히 그녀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폐하, 어젯밤에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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