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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15)화 (315/449)

제315화

등불이 어둠을 밝혔다. 줄지어 늘어선 전각 뒤로 또 다른 전각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붉은 기와와 담장, 숨 막히는 압박까지 길게 늘어져 있는 곳. 황궁은 구염락이 어렸을 때부터 자란 곳이었다. 궁은 고통부터 황권까지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구염락은 너무나 피곤했다. 특히나 오늘은 유난히 더 그러했다.

황궁이 다시 한번 자신을 찢으려 달려들고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재빨리 피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조로전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아이의 팔뚝만 한 크기의 초는 이미 다 타 버린 뒤였고, 주위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소리자가 문을 열었다.

구염락이 걸어 들어왔다. 용이 새겨진 짙은 자색의 장포가 그를 더 냉정하게 보이게 했다. 강경한 윤곽은 평소보다 더 짙은 위엄을 드러냈다.

주인이 내뿜는 냉기에 의해 조로전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해졌다.

숙직을 서던 농교는 인기척이 들리자 황급히 정신을 차린 후 황제를 위해 목욕물을 받았다. 이 모습을 본 소리자가 슬쩍 황제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주인은 또 정신이 나간 모습이었다.

상념에 빠져 있는 황제의 시선에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농교를 붙잡은 소리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이미 목욕을 마치셨으니 가서 차를 내오거라.”

고개를 든 농교가 의아한 눈으로 소리자를 쳐다보았다.

‘폐하께서 씻으시다니… 어디서? 전전에서? 이상하다. 항상 처소에 드신 후 씻으셨는데… 물이 아직 따뜻한가?’

농교의 시선에 속이 탄 소리자가 어쨌든 빨리 가서 차를 내오라는 표정을 지었다.

농교는 감히 더 묻지 못했다. 황제가 행하는 모든 일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무언가 미심쩍었다.

농교가 떠나는 모습을 확인한 소리자는 벌벌 떨며 다시 황제에게로 가 시중을 들었다. 조금 전 농교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난감한 일이었다. 오전에 궁을 한 바퀴 돌고 들어온 폐하는 갑자기 서 귀인에게 시침을 명한 후 목욕을 했다. 분명 기쁜 일이었으나…….

조석궁에서 나온 황제를 맞이한 서 귀인은 부족함 없이 귀염성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표정을 굳히던 황제는 결국 또 이렇게 찬바람이 부는 채로 말도 하지 않고, 상소문도 보지 않았다. 심지어 술시부터 축시까지 상소문을 하나하나 모두 태우는 바람에 기요처에는 온통 불꽃이 넘실거렸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누가 알겠는가!

혜령은 다시 주인을 모시고 조석궁에 들렀다. 서 귀인은 줄곧 황제의 옆에서 세수 시중을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두 황제가 그녀의 침소에 들 거라 생각했다.

설령 황제의 병이 도져 다음 날 아침에 서 귀인이 시신으로 발견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황제의 노기를 감당한다면 어찌 되었든 그녀 또한 나라에 공덕을 쌓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황제는 단정한 모습을 유지한 채 결국에는 몸을 일으켜 다시 조로전으로 돌아왔다.

누구도 연유를 알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꼼짝 않고 서 있던 소리자는 갑자기 눈앞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다. 퍽 소리와 함께 날아간 그가 연탑 뒤 바람막이에 부딪혔다.

소리자는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에게는 정신을 잃을 권리조차 없었다. 그는 찬바람이 부는 황제의 발밑에 허겁지겁 무릎을 꿇고 다가가 서둘러 자신의 뺨을 때렸다. 적절한 소리가 중요했다. 잠을 자고 있는 황후를 깨워서도, 성의 없이 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노비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노비가 죽을죄를…….”

이를 본 조로전의 궁녀들이 시중을 들다 놀라서 무릎을 꿇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막 다시 방으로 들어오던 농교는 즉시 몸을 숙여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감히 한 발짝도 더 내디딜 수 없었다.

용서를 비는 소리자의 애원을 제외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로전은 고요했다.

농교는 오들오들 떨었다. 청석 바닥에 이마를 댄 그녀는 감히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했다. 특히나 농교는 어쩌면 조금 전 소리자와 나누었던 대화가 황제의 노여움을 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더욱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분노한 황제는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욱 무서웠다. 이마를 조아린 소리자는 인정사정없는 황제의 서슬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었다.

농교는 무릎을 꿇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만약 잘못한 게 소리자가 아니라 혜령이었다면 이미 죽어서 끌려 나갔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점은 지금 비정상적으로 화를 내는 황제가 그리 놀랍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폐하는 본래 이런 사람이어야 마땅했다. 평소 황후마마에게 부드럽게 대해 주는 것은 그저 아가씨였기에 마마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대우였다.

대전 안 하인들은 행여라도 소리자를 대신해 황제의 분풀이 대상이 될까 두려워 누구 하나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전에 없던 위기였다. 손가락 하나라도 잘못 까딱하는 날에는 당장 황제의 손에 목이 달아날 것이다.

기지를 발휘한 누군가가 갑자기 소리쳤다.

“황후마마, 기침하셨사옵니까……!”

순간 구염락의 손이 멈췄다. 뒷짐을 진 그는 장서열을 등진 채로 냉랭한 기운을 내뿜었다.

장서열이 잠에 취해 몽롱한 눈으로 주렴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요즘 쉽게 잠들었지만 또 작은 소리에 쉽게 깨기도 했다.

“일어나라.”

즉시 몸을 일으킨 농교가 얼른 달려가 주인의 시중을 들었다. 다급히 황후의 손을 부축한 그녀는 행여나 주렴이 떨어져 황후마마의 배에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했다.

“마마, 조심하십시오.”

농교를 따라 나온 장서열이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우윳빛이 도는 담황색 내의에 긴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늘어져 있었고, 졸음이 가시지 않은 몽롱한 눈에는 소녀의 천진난만함이 어려 있었다.

그녀가 졸음 섞인 부드러운 목소리로 구염락의 등 뒤에 말을 건넸다.

“이제야 일이 끝나셨어요? 식사는요? 주방에 인삼탕이 아직 따뜻할 텐데 좀 드셔 보세요. 농교…….”

막 농교에게 주방에 가 보라고 분부하려던 장서열은 수많은 하인들이 바닥에 엎드려 있자 흠칫 놀랐다.

‘이게 무슨…….’

순식간에 졸음이 달아난 장서열이 재빨리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대전 중앙에 선 구염락은 보랏빛 옷을 늘어뜨린 채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 순간 그의 눈에 서렸던 어둠이 재빨리 사라졌다.

“별일 아니야. 찻잔을 엎어서 좀 데었어.”

그녀를 등진 구염락이 의자에 앉아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러가라!”

황은에 감읍한 소리자가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 거듭 외쳤다. 주변을 둘러본 장서열은 찻잔이 없자 의아했으나 궁녀들이 치운 것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농교의 부축을 받은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구염락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습관처럼 조곤조곤 말했다.

“어디를 데셨어요? 좀 봐요. 당신도 참,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매일 이렇게 늦게까지 일을 하시니 소리자가 정신이 없을 수밖에요. 공연히… 어라?”

구염락의 손을 잡은 장서열은 여러 차례 살펴보아도 상처를 찾을 수가 없자 의아해졌다. 오히려 상처가 심한 쪽은 곁에 있는 소리자였다. 핏자국이 남은 이마와 밟히다 못해 거의 보랏빛으로 변한 손, 그리고 얼굴에는 손바닥 자국까지 붉게 새겨져 있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장서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구염락의 손을 놓지 않으며 가볍게 자신의 살결에 문질러 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일이 없지 않고서야 그가 소리자를 이 지경까지 때렸을 리 없었다.

구염락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겹쳐진 그녀의 손 위로 떨어졌다. 깨끗하고 투명한 손가락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꽉 쥔 그가 다시 빠르게 손을 빼낸 후 성난 눈으로 소리자를 노려보았다.

“썩 꺼지지 않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게야!”

“송구하옵니다, 폐하. 노비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얼굴을 치켜든 소리자는 정말로 죽음을 자초하듯 황후를 향한 시선을 방해하고 있었다. 소리자는 나는 듯이 밖으로 나갔다.

구염락을 바라본 장서열이 미간을 찌푸렸다. 매서운 눈빛에는 피로감이 서려 있었고, 팔걸이에 놓인 손바닥은 기이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는 손을 잡고 싶지만 또 선뜻 잡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온몸으로 까닭 없는 살기를 드러냈다.

이제 장서열은 졸음이 완전히 달아났다. 구염락의 손을 잡고 옆에 앉은 그녀가 관심을 쏟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음을 달래 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폐하,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예요?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에요?”

구염락의 시선은 다시 한번 겹쳐진 서로의 손 위에 머물렀다. 마치 구멍이라도 찾는 것처럼 그는 장서열의 친절한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보지 않아도 그녀가 지금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었다.

구염락은 문득 장서열이 자신에게 욕을 한 적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있었던가?

없다. 그녀는 언제나 완벽한 아내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친절하고 살뜰하게 그를 보살펴 주었고, 군주와 아버지로서의 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나쁘게 말하면, 그녀는 엄마로서 알아야 할 지식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있었다.

손에 느껴지는 온기와 달리 구염락은 우스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어째서 사내도 찾기 어려운 이 황궁에서 다른 남자를 찾은 걸까. 대체 자신이 뭐가 부족해서?

겉으로 보이는 상처만 없을 뿐, 마음을 칼에 찔린 것 같은 아픔에 구염락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손을 빼내고 그녀에게 뭐 하는 짓이냐 추궁할 힘도 없었다.

만약 자신이 그 장면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가 그대로 자신을 마귀가 숨은 듯한 이 음산한 궁 안에 버려둘까 두려웠다.

인과응보였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 그녀를 빼앗았다. 그러니 이제는 누군가 자신의 손에서 그녀를 빼앗아 가려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구염락의 눈에 돌연 시뻘건 살기가 스쳤다. 순식간에 사람을 부숴 버릴 강렬함이었다.

장서열은 잡고 있던 손을 더욱 세게 쥐며 농교에게 지시했다.

“어서 가서 손 공공에게 약을 달이라고 해라. 폐하께서 몸이 불편하시다.”

구염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짐은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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