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4화
장서열은 아주 천천히 음식을 먹었다.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던 탓에 거의 먹는다고 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장서열은 계속해 스스로를 설득했다.
‘고개 들어. 나는 항상 그랬어. 이제 와 뭘 어쩌자는 거야? 그에게 허황된 환상이라도 심어 줄 셈이야?’
장서열은 자신의 신분을 생각하며 오전 내내 품고 있던 생각을 끊어 냈다. 아이와 함께 식사를 마치는 동안 그녀는 내내 자신의 지위에 집중했다. 황후에게 다른 생각은 어울리지 않았다.
장서열은 원대한 뜻을 품고 있었다. 상처에 욕창이 생기면 가차 없이 환부를 도려내고 새살이 돋게 하는 것처럼 과감하게 명정과의 과거를 지워버리는 것. 냉담한 자신이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으리라.
저녁 무렵이 되자 장서열은 거의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할 수 있었다. 그녀는 명정을 냉담하게 대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일부러 트집을 잡는 척했다. 우호적이지 않은 말투에 무심한 태도에는 전혀 구질구질한 느낌이 없었다.
명정도 죽자고 매달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함께하지 못한다면 헤어지면 그만이다. 하물며 상대가 그녀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명정은 절대 그녀의 나쁜 성질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황후마마, 노비가 요즘 기력이 떨어진 듯합니다. 소인이 다시 진 공공 옆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명정의 말에 태자와 장난을 치던 장서열이 행동을 멈췄다. 그녀가 옆에서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는 명정을 바라보며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니 된다.”
명정은 못 들은 척 자신의 입장을 고집했다. 그가 장서열을 완전히 공기 취급하며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강경한 목소리에는 기분 나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익숙한 느낌에 장서열은 무의식적으로 입을 오므리며 원망을 내뱉을 뻔했으나 순간 그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명정은 이런 관계를 용납하지도, 그냥 견디지도 않을 거라는 뜻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장서열은 점점 이성을 회복했다. 이것이 그들에게 가장 좋은 선택임은 분명했다. 서로 원망 없이 각자의 인생에서 사라지는 것.
처음 만났을 때 명정은 이미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거의 지천명知天命(50세)이 된 나이에 함께한 그들은 별다른 감정 기복 없이 평온하게 서로를 의지하며 노년을 보냈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는다고 생각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원칙을 고수하는 명정이 어쩌면 거만해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이럴 바에는 차라리 그녀와 만나지 않는 게 낫다고, 어두운 기억을 남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온화해 보이는 명정은 사실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만의 고집스러운 원칙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무언가 가르치려고 든다면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난리를 쳐도 소용없었다.
장서열이 돌연 입을 열었다. 가라앉은 목소리에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이 며칠이지?”
명정이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중순입니다.”
장서열이 창밖의 하늘을 내다보았다. 아직 강렬한 태양이 걸려 있는 이른 시간이었다. 게다가 매달 중순은 구염락에게 바쁜 날이었다.
“다들 물러가라.”
왕 마마는 고개를 숙였다. 명정이 사직을 표하는 건 큰일이 분명했다. 모든 사람들의 목표가 다 대태감일 리는 없지 않은가.
아직 한창때인 황제에 비해 확실히 명정은 나이가 많았다. 태자가 장성하여 황권을 쥘 때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나 긴 과정이었다. 그리고 명정에게는 그렇게 긴 시간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상서방으로 돌아가 진 공공의 도움을 받는다면 장래에 태자가 장성할 때까지 편히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명정의 능력으로 보아 그는 장성한 태자가 가장 먼저 찾을 인재가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어린 군주 옆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며 아까운 재능을 묵힐 이유가 없었다.
왕 마마는 자신이 명정이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본 바로, 확실히 태자 전하를 보필하는 데에는 명정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물론 황후마마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일 테니, 왕 마마는 부디 황후께서 그를 설득할 수 있길 바랐다.
왕 마마는 앞장서서 물러갔다.
무의식적으로 명정의 뒷모습을 한 번 바라본 완정이 왕 마마의 뒤를 이어 물러갔다. 마음이 아주 편하지는 않았다.
‘그는 왜 떠나려고 하는 걸까?’
모두가 태자 전하의 앞날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려 하다니.
‘설마 나 때문에…? 내가 공연히 그를 난처하게 한 것일까…….’
한편 화 마마는 명정이 은혜를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하께서 특별히 아껴 주시니 교만해진 게 틀림없었다.
‘감히 태자 전하가 자기 곁을 떠날 리 없다고 허세를 부리는 것이로군!’
반면 농교의 생각은 가장 단순했다. 그녀는 그저 명정이 떠나면 누가 그의 자리를 대신할 것인지를 걱정했다. 태감들이 전부 명정처럼 모든 면에서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의학부터 무예에 이르기까지, 어린 태자 전하께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명정이 떠난다면 이것이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그러니 주인께서 명 공공과 긴밀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유모는 눈치 빠르게 어린 전하를 안고 자리를 피했다. 어린 녀석은 밖에서 놀 수 있다는 사실에 즉시 두 사람을 잊어버렸다.
고요한 가운데 바람에 날린 주렴이 달랑대는 소리를 냈다. 동물 모양의 향로에서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되는 향이 타올랐다. 무지개 같은 기다란 천과 폭포처럼 늘어진 주렴은 조로전의 고상한 품격을 드러냈다.
장서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제가 뭐라 대답하길 바라십니까.”
명정이 담담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서열의 시선은 부드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융단을 향해 있었다. 아들이 그 위에서 뒹굴고 떼를 쓰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멀지 않은 곳에는 사계절이 그려진 열두 쪽짜리 병풍이 있었다. 벽처럼 우뚝 솟은 병풍은 식당과 공간을 분리시켜 주었다.
나무틀로 된 병풍의 가장자리에는 떠오르는 용과 봉이 칠기 공예로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었다. 병풍의 세 쪽씩을 장식한 사계절의 형태는 하나하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진귀했다. 본래 기요처에서 조정 대신들의 회의장을 분리하는 벽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던 병풍은 예상보다 예쁘게 완성되자 황제에 의해 조로전으로 옮겨졌다.
장서열은 겨울 속 병풍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는 하얀 여우를 바라보았다. 용솟음치던 감정은 조금씩 평온을 되찾으며 끝내 잔잔한 물결이 되었다.
없어선 안 될 것이란 무엇일까? 삶이란 결국 일평생의 고행이지 않은가. 세상만사 모든 일은 뜻대로 이루어질 수 없고, 모든 것을 손에 쥘 수도 없다.
장서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이 모든 부귀영화를 안겨 주면서 제멋대로 명정까지 옆에 둘 수 없었다.
한참 뒤, 고개를 떨군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구나. 내가 충동적으로…….”
누구든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두 사람 모두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고개를 든 명정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긴 머리를 틀어 올린 그녀는 매끈한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평범한 옷도 그녀가 걸치자 존귀함이 더해졌다.
젊고 생기 넘치는 오늘날의 황후는 이제껏 명정이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던 모습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이제 와 그녀가 자신을 선택한다 한들 잘 보살필 자신이 없었다.
이제 그녀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적들의 허튼수작에 넘어가 머리를 박고 피를 흘리는 것보다 백배 나았다.
‘그저…….’
명정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계속되는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 나름 그녀의 입장을 헤아려 보는 것도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
순간 고개를 든 장서열의 시선이 공교롭게도 아직 미련을 거두지 못한 명정의 눈빛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동시에 멍해졌다. 서로 시선이 뒤엉켰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한참 후, 장서열이 시선을 피했다.
“어떻게… 안 거죠?”
굳이 파고들 생각은 없었으나 당장 그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어두웠던 명정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많은 말을 할 수 없었던 명정이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당신이 떠나면 황아가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예요.”
정신을 차린 장서열이 이마를 문질렀다. 이상하게 피곤했다.
“노비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명정이 그 자리에 선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명정은 침묵을 지켰으나 그것이 긍정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견딜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명정을 대면해 버린 그녀가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누리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또 함께 이 깊은 황궁에서 전과 같은 고생을 견딜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더군다나 명정은 좋은 사람이었다. 꼭 그녀가 아니라 해도 기꺼이 그의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명정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또렷하게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네.”
갑자기 눈물이 떨어졌다. 즉시 손수건을 꺼내어 가린 장서열이 반사적으로 빠르게 말했다.
“오늘 당신을 난처하게 할 의도는 없었어요. 그저…….”
명정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아파 울고 있지만 자신에게 다가올 뜻은 없는 모습에 그는 그녀의 마음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이미 두 아이의 어미로서 감정에 동요되지 않았다.
명정은 장서열의 사과를 변명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비록 그녀 자신은 모를 수도 있으나 그녀는 기분이 나쁠 때면 무의식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에게만 화를 냈다. 그것은 결코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하면 달콤하기까지 했다.
장서열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개를 숙인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이제는 정말로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 이번 생은 인연이 아니었다.
명정이 몸을 돌렸다. 그는 그녀를 완전히 잊겠다고 맹세했다. 그녀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자신 역시 정을 끊어낼 것이다. 지나간 일은 지나가게 둘 것이다.
‘나 역시 누군가를 잃는다 해도 잘 살 수 있으리라.’
명정은 의연하게 바깥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왜 하필 나지? 이렇게 오랜 세월을 기다렸는데… 이제 내 사랑은 어디로 가는 거지?’
아무리 미련 없이 떠난다고 해도 그녀가 생명을 다해 사랑한 여인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에게 그녀는 죽을 때까지도 고집을 부리는 어린아이였다.
‘왜 모든 기억을 떠올리게 한 뒤 포기하라는 거야! 왜 결국 내가 내려놓아야 해!’
돌연 몸을 돌린 명정이 빠르게 앞으로 나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서열! 나는 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 눈을 떴는데 이런 결말이라니……. 만약에… 만약에 당신이 늙고 혹시라도 그가 또 당신을 버린다면 그때는 나를 찾아와 주겠어? 내가 당신보다 못나고 황제처럼 권세가 없다 하더라도… 그가 떠난다면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줘…….”
“…….”
“행여라도 내가 오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간다 해서 나를 버리거나 모질다고 탓하지 않길 바라……. 나는 당신이 행복한 모습은 볼 수 있지만, 다른 남자가 당신을 안는 건 볼 수가 없어. 혹시라도 내가 참지 못하고 폐하께 손을 뻗칠까 두려워……. 그러니 나는 가야만 해. 하지만 만약에 당신이 혼자가 되는 날이 온다면, 당신과 함께하게 해 주겠어?”
명정을 밀어내려 했던 손을 꼭 쥔 그녀가 결국 그를 껴안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좋아요. 정말 그런 날이 오면 뻔뻔하게 당신을 찾아 갈게요. 결국 그럴 줄 알았다고 나를 비웃는다 해도…….”
그녀의 눈시울이 흐려졌다. 하지만 어찌해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명정은 그녀를 꼭 껴안고 다시 한번 모든 사랑이 함께할 수만은 없다는 걸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