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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13)화 (313/449)
  • 제313화

    아들의 웃음소리에 침대에 누워 있던 장서열은 긴장했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맑은 물에 더위가 사라지듯 초조함이 누그러졌다.

    장서열은 조용히 침대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금빛 휘장 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용과 봉황이 날고 있었다. 그녀는 남몰래 스스로를 비웃었다.

    ‘명정이 날 어찌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 더 화가 나는 거겠지.’

    명정이 천성적으로 못된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고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서열은 명정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소박하게 분수를 지키는 그를 마음껏 이용하고 있었다.

    장서열은 자신이 여전히 예전처럼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명정은 자신에게 너그러움과 긍정적인 면모를 가르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장서열은 명정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던 그녀는 그가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안 뒤로는 마구잡이로 그의 것을 빼앗고, 함부로 손찌검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명정은 그녀가 조금이라도 언짢아하는 기색을 내비치면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지금처럼 차분한 명정의 눈빛이 자신을 불안에 떨게 만든다 해도 장서열은 알고 있었다. 오늘날 명정이 아무리 대담한 성격을 지녔다 해도 감히 자신에게 왜 함께 하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냐고 비난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그러니 그가 전생의 일을 두고 자신을 협박할 일은 더더욱 없었다.

    명정에게 남아 있는 전생의 기억들은 자신의 기억보다 더욱 존중받고, 소중히 여길 만한 가치가 있었다.

    사랑스럽게 웃어 주던 그의 미소. 자신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아프지 않다고 말해 주던 위로. 명정은 분명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그녀에게만큼은 아주 좋은 사람처럼 모든 것을 포용해 주었다.

    떠오르는 기억에 장서열은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녀가 명정에게 잘해 주든 아니든 그는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아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한 여자로서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사랑을 받았다. 원망도 후회도 없는 사랑이었다.

    그것으로 행복은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악연뿐이었다.

    장서열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맹렬한 기운은 사라졌으나 아직 가시지 않은 심장 박동이 여전히 그녀를 두렵게 했다.

    어쩌면 두려움이 아니라 안심한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 그의 무조건적인 포용 덕분에 그녀는 아무런 압박 없이 마음대로 큰소리치고 그의 것을 빼앗을 수 있었다. 만약 그가 감히 다른 궁녀와 연분을 맺었다면 두 사람 모두를 목 졸라 죽였을지도 모른다.

    장서열은 명정을 만나기 전까지 사람이 이렇게나 이기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슬프게도, 과거에 그녀는 명정에게 버려진 후에야 비로소 그가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엄습하는 두려움에 그녀는 하마터면 구차한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낼 뻔했다.

    장서열은 줄곧 명정이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는 만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음대로 주무르다 보기 싫으면 던지고, 두 발로 밟고, 그러다 또 다시 주무를 수 있는 사람. 그는 진흙탕에서 쩔쩔매면서도 그녀가 기억해 주길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었다.

    장서열은 거만했다. 그녀는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여겼다. 아름다운 그녀는 고분고분해졌을 뿐만 아니라 철도 들었다. 헌데 그가 어찌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득의양양해진 장서열이 그렇게 명정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그녀는 병에 걸렸고, 놀랍게도 명정은 갑자기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장서열은 놀라서 정신이 다 멍해질 정도였다. 갑자기 꼭꼭 숨겨 두었던 곡식들이 날개가 생겨 날아간 것만 같았다.

    그제야 그녀는 명정이 단순한 하인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가 고달픈 삶에 휩쓸려 자포자기할 때 주운 장난감이 아닌,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농사를 가르쳐 수확한 것을 먹을 수 있게 해 준, 그녀가 유일하게 손에 쥐고 있고 싶은 씨앗이었다.

    장서열은 스스로 추악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하게도 자신의 거만한 마음을 일개 냉궁 태감에게 의탁했다. 세상에 어느 황후가 스스로를 단속하지 못하고 이런 일을 벌이겠는가. 자신은 스스로를 모욕한 것일까, 아니면 구염락을 모욕한 것일까. 구염락이 자신의 눈을 멀게 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 장서열의 눈가에서 씁쓸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내세가 있다면 함께 하자는 말을 했다. 그때는 그저 단순하게 그와 함께이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로 내세가 펼쳐졌다. 하지만 장서열은 그때 그 말을 까마득히 잊었다. 당시 그 마음이 얼마나 굳건했든, 얼마나 진심이었든 지금 이 순간 그녀가 황후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장서열이 안절부절못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마음이 너무나 찔렸다.

    그러나 장서열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불편한 내색을 했을 때 명정의 말로가 어떠할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구염락의 특기는 명백한 증거 앞에 죄를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근거가 없어도 즉각 참수형을 집행하는 것이었다.

    장서열은 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너무 제멋대로 산 탓에 결국 죗값을 치르는 걸까? 이렇게 난감한 상황에서 그를 마주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자신이 구제불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다니.

    침대 위에서 휴식을 취하며 장서열은 점점 안색을 회복했다. 뺨에는 홍조가 돌았고 호흡도 안정되었다.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자 피로가 몰려왔다. 그녀는 잠깐 사이 잠이 들었다.

    조로전은 아주 고요했다. 평안해진 어린 태자는 명정과 함께 연탑 위에 앉아 네모난 조각을 쌓으며 놀았다. 아이는 가끔 명정이 부주의한 틈을 타 재빨리 조각 하나를 입 안에 넣고는 우물거렸다. 명정은 당황했지만 끝내 이를 막지는 못했다.

    명정은 이따금씩 내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주렴이 벌어진 틈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좀 나아졌을까?’

    생각해 보면 그녀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분명 뛰어난 것도 아니면서 기어코 자기 말만 옳다고 우기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어떻게 자신을 괴롭힐지 모른다. 스스로에게 작은 빛 하나 남기지 않았던 그때처럼.

    명정이 손에 든 조각을 높이 던져 올렸다가 받자 구염황은 즉시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명정이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구염황은 계속 웃었다. 둥글둥글한 작은 얼굴에서 부드러운 어머니가 사라지고, 아버지의 얼굴이 드러났다.

    장서열은 정오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앞쪽에 앉아 흰죽을 먹었다.

    명정은 낮잠을 자고 일어난 태자 전하를 위해 바닥에 엎드려 말을 태워 주고 있었다.

    유모는 한쪽에서 태자를 부축했다. 주위를 둘러싼 서너 명의 궁녀가 명정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 있었다. 세 통의 얼음물이 놓인 대청 안은 아주 시원했다.

    잠에서 깬 황후가 나오자 하인들은 모두 공손하게 예를 갖추었다. 다들 어색하게 각자의 위치로 물러가며 시끌벅적하던 분위기는 금세 엄숙해졌다. 신이 난 구염황은 명정에게서 벗어나 빠른 속도로 어마마마를 향해 달려갔다.

    구염황이 가까이 다가오자 장서열은 아들의 작은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아이가 자신의 다리 위에 마음껏 달라붙도록 내버려두었다. 작은 입으로 옹알대는 분명하지 않은 말들 중 드문드문 들려오는 몇몇 글자들이 그녀의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화 마마는 벌써부터 어마마마라는 복잡한 존칭을 사용하는 태자라면 장래에 분명 세상을 압도하는 제왕이 될 거라고 연신 칭찬을 해 댔다.

    장서열은 온 힘을 다해 구염황을 칭찬하는 화 마마가 재미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매번 낯간지러운 칭찬을 생각해 낼 수 있는지 정말 신기했다. 다행히도 구염락은 호시탐탐 황좌를 노리는 어린 녀석을 기꺼이 용인해 주었다.

    한쪽에 선 명정은 고개를 숙인 채 황후와 태자의 단란한 한때에 개입하지 않았다. 장서열 역시 이전처럼 눈치 없이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두 모자는 서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신나게 놀았다. 마냥 즐거워할 뿐, 두 사람이 소통하는 기쁨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전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점심 식사는 아주 풍성했다. 어선방에서는 주인이 음식을 전부 남기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요구한 대로 음식을 만들어 차려 놓았다. 이들은 주인이 많이 먹으면 상을 받고, 적게 먹으면 벌을 받았다.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수차례 생명의 위협을 받은 끝에 어선방의 요리 솜씨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최근에는 장서열도 살이 찔 정도였다.

    농교는 황후의 식사 시중을, 명정은 태자의 시중을 들었다.

    태자는 모든 식기에 호기심을 가질 나이였다. 고집스럽게 젓가락을 쥔 아이는 찌를 수 있는 모든 음식들을 죄다 건드리려 했다. 색과 향, 맛까지 삼박자가 완벽하게 갖춰진 음식들은 결국에는 태자의 젓가락질로 인해 완전히 다른 음식으로 변해 버렸다. 어선방에서는 태자가 찌르기 좋도록 일부러 어린아이의 흥미를 끄는 모양으로 음식을 만들어 주곤 했다.

    어른들의 눈에는 별일이 아닌 것도 구염황에게는 아주 수고롭고 진지한 일이었다. 특히 어머니가 자신을 보고 웃어 주지 않으면 음식을 찌르는 건 아이에게 그저 고된 배움의 과정일 뿐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명정처럼 쉽게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을 수 없자 마음이 급해진 구염황은 땀범벅이 된 얼굴로 계속해 고군분투했다.

    장서열은 명정을 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명정이 태자를 돌보는 모습까지 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본체만체하는 건 누구도 기분이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장서열의 마음 역시 편치 않았다. 구염황은 심심할 때면 명정에게 심술을 부렸다. 화가 난 그는 무의식적으로 명정을 때리려고 했다. 숟가락을 쥔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서열은 음식을 삼킬 수가 없었다.

    구염황은 이 나라의 태자였다. 그가 무슨 짓을 해도 명정은 맞대응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자의 어머니는?

    그녀는 명정이 이런 대우를 견디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명정, 태자를 유모에게 맡기고 가서 쉬거라.”

    명정은 순순히 명을 따랐다. 마찬가지로 그녀와 한 공간에서 식사하고 싶지 않았던 그가 공손히 몸을 숙였다. 두 사람은 마치 처음부터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유쾌하지 않은 오전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밖으로 나온 명정은 작열하는 태양을 잠시 응시한 뒤 재빨리 조로전을 떠났다. 식사를 마친 그는 잠시 후 전하께서 칭얼거리며 자신을 찾지 않도록 주변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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