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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12)화 (312/449)

제312화

다급해진 소아가 절박하게 말했다.

“아니지요! 그건 원래 당신 것이었습니다! 태감이 뭐가 좋습니까? 당신은 엄연한 사내이고 생각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왜 굳이 여기 남아서 인생을 낭비하려는 겁니까! 궁을 떠나는 게 뭐가 나빠서요!”

명정은 소아의 말이 마치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자신의 운명을 농락한 사람이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설명하려 든다면 누구라도 곧이곧대로 들을 리 없었다.

정말 돕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제대로 했어야 했다. 이제 와 필요 없는 것들을 내미는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가 말하는 보상이 자신에게 해 줄 수 있는 전부라면, 그는 마치 은혜를 베풀 듯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유혹을 나열할 필요가 없었다. 이대로 그냥 사라져 버린대도 상관없었다.

소아는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하겠다며 한참을 떠들어댔지만 점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명정 앞에서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한 차례 화를 낸 이후 명정은 이상하리만큼 평온해졌다. 소아가 무엇으로 유혹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마음이었다. 입을 열 때마다 소아는 오히려 신뢰를 잃고 있었다.

소아는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면서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명정은 여전히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명정의 얼굴에는 일말의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명정은… 화가 많이 난 건가?’

명정이 외면하자 소아는 우선 그의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린 후 생각이 바뀌었을 때 다시 찾아와 이야기하기로 했다.

소아가 막 떠나려고 할 때였다. 명정이 갑자기 그를 불렀다.

명정은 책망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필요 없는 것은 가지고 가라는 뜻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소아는 즉시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손가락을 꼬았다.

“그건… 못합니다…….”

작은 목소리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순간 농락당한 기분에 휩싸인 명정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아를 쳐다보았다.

‘설마!’

어처구니가 없었다. 돌이킬 수도 없는 짓을 저지르다니? 앞으로는 태감으로 사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그런 기억까지 가지고 그녀를 만나야 한다.

소아가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강인하다고 여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명정은 또 다시 이렇게 불온전한 몸뚱이로 그녀를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로 탄식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전생을 기억하는 게 뭐 그리 나쁜 일인가?’

소아는 명정의 표정에 적잖이 놀라면서도 끝내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자신은 명정에게 정상적인 남자가 되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기회까지 주었다. 거기에 전생의 기억까지 있다면 범이 날개를 단 것처럼 적은 노력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명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 와 그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만 나가십시오.”

“네.”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마친 소아가 재빨리 뛰어나갔다.

* * *

명정은 밤새 잠들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잠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른 아침부터 태자를 데리고 전원前院에서 황후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해야 했다. 명정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이 오늘따라 유난히 괴롭게 느껴졌다.

단정하게 차려 입은 어린 전하를 맡긴 유모가 명정에게 어서 떠나라고 손짓했다. 명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전하를 안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명정이 기억하는 그녀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황후도, 말 한 마디로 천금을 움직일 만큼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못된 성격에 쉽게 화를 낼 뿐만 아니라 안하무인이고 심술궂은 사람이었다. 절대 지금처럼 아름답고 눈부신 사람이 아니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명정은 고개를 숙인 채 언제나처럼 태자를 안고 전전前殿으로 갔다.

장서열의 옷차림은 수수했다. 높이 올라온 푸른 치마의 가장자리에는 꽃이 수놓아져 있을 뿐, 장식이라고는 허리에 감긴 띠가 유일했다.

살짝 올라온 배 위로 겉옷이 늘어진 모습은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높이 틀어 올린 머리 위에는 금으로 만든 봉채 하나가 꽂혀 있었는데, 봉채에 달린 꼬리가 흔들리는 모양은 유난히 반짝거렸다. 수수하면서도 단아한 옷차림이 오히려 그녀를 더욱 기품 있게 만들어 주었다.

명정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디서든 그녀의 옅은 웃음소리가 들리고, 그녀를 보지 않아도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태자를 넘겨주며 손등을 스친 그녀의 손가락은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한 명정의 마음을 일순간 혼란에 빠뜨렸다.

태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듯한 유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별다른 놀이랄 것도 없이 어린 사람은 큰 사람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큰 사람은 어린 사람이 잡지 못하게 도망칠 뿐이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명정은 빨리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그는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녀는 냉궁에서 그의 뒤를 쫓아다니던 여인도, 팔에 매달리며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자신을 의지하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이 나라의 황후였다.

명정은 갑자기 팔에 무언가가 닿는 것을 느꼈다. 옆에 있던 농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곁눈질로 앞을 보라고 눈치를 줬다.

무심코 고개를 든 명정은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눈과 마주쳤다. 새파란 호수에 일어난 거센 물결이 심장에 부딪히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명정은 재빨리 고개를 떨궜지만 마음속 파도는 어찌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물처럼 옅은 하늘빛 옷자락과 머리 위 반짝이는 봉채조차 그녀의 눈을 스친 걱정 앞에서는 빛을 잃었다.

입을 벌린 명정은 자신이 그녀의 질문을 놓치는 무례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아무런 욕심이 없는 사람도,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명정은 아무리 애를 써도 진정이 되지 않는 걸 느꼈다. 사랑했기에 그럴 수 없었다.

찰나였지만 장서열은 명정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걸 알았다. 그는 평소의 평온한 눈이 아닌, 시련 끝에 초연해진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장서열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 그를 마주쳤을 때보다 지금이 더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장서열은 구염황을 안은 채 짐짓 무심한 척 한 번 더 질문을 되풀이했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사실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어젯밤 태자가 잘 잤느냐고 물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명정은 허리를 숙이고 손을 모았다.

“예, 마마. 어젯밤 태자 전하께서는 잘 주무셨습니다.”

장서열은 숨을 고르며 평소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구염황을 안고 가까스로 연탑 위에 앉은 그녀는 온몸에 힘이 다 빠진 채, 봉황의 머리 모양으로 장식된 팔걸이에 의지하고 나서야 비로소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장서열은 명정이 달라졌다는 걸 알았다. 사람의 말투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아마 명정 스스로도 자신이 말을 하거나 일을 처리할 때 어떤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 특유의 냉랭함은 있지만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명정이 달라졌다는 걸 확신한 장서열은 숨을 곳이 없다는 위기감에 순간적으로 놀라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그를 똑바로 마주할 수 없다는 굴욕이 그녀를 아이처럼 만들었다.

아이들은 종종 모든 것을 아주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른들의 눈에는 그저 가소로울 뿐이다. 아이에게는 그저 어른들이 그 사실을 폭로하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황후가 이상하다는 걸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농교였다. 그녀는 한 걸음 다가가 태자를 안으며 걱정스레 주인을 쳐다보았다.

“마마, 또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뭐라도 좀 드시고 잠시 쉬시겠어요?”

특히나 오늘은 아침부터 주인이 어지럼증을 호소한 관계로 호 태의가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장서열은 거절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에게는 휴식이, 그것도 아주 긴 휴식이 필요했다. 명정이 왜 갑자기 변했는지 알 수 없어 그녀는 두려웠다. 갑자기 명정이 청천벽력 같은 말을 늘어놓거나 자신을 힐난할까 두려웠다.

장서열은 사냥꾼에 놀란 새처럼 위기를 느꼈다. 명정을 통해 모든 진상이 폭로될 것만 같았다. 사람들 앞에 과거가 드러나고, 자식들이 모든 후광을 잃는 건 그녀가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미래였다.

장서열은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살얼음판이 되어 버린 분위기 속에서 농교가 그녀에게 부채질을 해 주었다. 그러나 울렁거리기 시작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장서열은 오늘날 화려하고 존귀한 자신의 모습이 명정의 눈에 어릿광대처럼 보일 거라 생각했다. 그에게서 도망친 죄수가 화려한 옷을 입은 채 시치미를 떼고 있다. 주인을 물어 상처를 내고 도망친 동물이 더 믿을 만한 사람을 찾은 꼴이다. 얼마나 가소롭겠는가.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명정에게 자신은 마치 발톱을 숨긴 채 얌전한 척, 주인이 없는 척 불쌍히 여겨 달라고 애원하는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누군가가 문 앞까지 쫓아와 자신의 추악한 정체를 폭로한 후 갑자기 자취를 감춘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황후가 식은땀을 흘리자 농교가 다급히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 주었다.

“마마, 제비집 죽을 좀 드시겠습니까?”

장서열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자 농교가 그 즉시 죽을 가지러 갔다.

부채를 받아 든 완정은 계속해 주인을 위해 부채질을 함과 동시에 눈으로 다른 이상이 없는지를 살폈다.

“마마,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으십니까? 다시 호 태의를 부를까요?”

장서열은 고개를 흔들었다. 배 속 아이는 괜찮았다. 그저 자신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약간 어지러운 것뿐이었다.

“잠시 누워 있으면 괜찮아질 것이다… 태자는?”

“밖에서 명 공공에게 안겨 계십니다.”

그 시각 명정은 네모난 목탑 위에서 즐겁게 노니는 태자를 돌보고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온통 얼굴이 창백해진 그녀 생각뿐이었다.

명정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녀를 그렇게 놀라게 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만족하지 못할 게 무엇인가. 명정은 일개 태감이었다. 그녀를 한 번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 이미 생의 모든 복을 다했다. 자신은 그녀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심지어 윤회를 겪은 그녀가 지금까지 자신을 기억하는 데다 안절부절못하기까지 한다면 그에게는 여한이 없었다.

명정은 장서열을 곤란하게 할 의도는 없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토끼 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귀여워서 장난을 치고 싶긴 했지만, 어찌 그녀를 난처하게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회임을 한 상태로 만에 하나 뜻밖의 변고가 생긴다면 그녀는 노발대발하며 그에게 달려들 것이다. 날카로운 발톱을 내밀어 그를 호수에 밀어 넣고 몇 번을 익사시킨다 해도 분을 풀지 못할 터였다. 전생에서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꼭 자신을 물고 뜯고 꼬집던 그녀가 생각나자 명정의 입가에 조금씩 미소가 떠올랐다.

명정을 지켜보던 구염황이 입을 벌리고 헤실헤실 웃었다. 아이는 짧은 다리를 종종거리며 명정에게 안아 달라는 듯 하얗고 부드러운 팔을 내밀었다.

그제야 명정의 눈이 태자를 향했다. 그가 아이를 안고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자 해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놓치기 아까운 것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피차 만신창이가 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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