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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11)화 (311/449)

제311화

명정의 머릿속에 전생이 한 장면 한 장면 그림처럼 펼쳐졌다. 가장 아름다운 기억은 장서열이 나타난 이후의 감정이었다.

온순해진 장서열의 모습에 명정은 마음이 아팠다. 그의 품에 움츠린 그녀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또 어느 날인가 마음에 드는 진주 비녀를 발견했을 때는 팔짝팔짝 뛰며 그에게 보여 주려 달려왔었다.

가끔 그녀는 홀로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친 표정으로 며칠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을 때면 어떠한 말도 통하지 않았다.

명정은 그렇게 그녀가 조금씩 여위어 가는 모습을, 큰 눈에서 광채가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또렷한 정신으로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눈물이 고인 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명정은 다시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마지막 기억은 지금 눈앞에 선 이 악의 없는 귀신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약속하던 장면이었다.

명정의 표정은 매우 기이했다. 맥없이 부채를 주워 든 그가 기계처럼 태자에게 부채질을 해 주었다.

소아가 얼른 그의 눈치를 살폈다.

“명정… 명정…….”

명정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른 채로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누구도 이런 일을 겪었다면 그보다 더 나은 반응을 보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일개 태감일 뿐이었다. 남근이 없는 남자. 누군가를 돌보도록 정해져 있는 하인. 그런 그가 이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남자의 여인에게 하인 이상의 역할을 해 주었다니. 누구도 침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물과 불이 섞이듯 두 가지 기억이 충돌했다. 명정은 손발이 차가워지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느꼈다.

소아는 명정의 기억들이 점차 진정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이번 생에서의 명정은 이러한 돌발 상황을 제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전생에서 희로애락을 모두 겪은 명정이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소아는 과거처럼 굳건한 정을 가진 명정이 눈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듯 곧 명정의 손에 들린 부채가 점점 안정적으로 돌아왔다. 눈 깜짝할 사이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고 돌아온 명정은 평정심을 되찾은 뒤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탄식했다.

소아는 슬며시 그에게로 한 발 다가갔다. 그가 공손하면서도 가식적이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기…억은 다 돌아오셨습니까?”

“글쎄요.”

명정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연륜이 느껴지는 느긋함과 삶에 대한 상실감이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유감스러운 듯 고개를 숙인 소아가 진솔하게 말했다.

“저희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약조한 일을 지키지 못했군요.”

침대 위, 잠들어 있는 태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명정의 표정은 평온하면서도 자상했다.

“잘하셨습니다.”

장서열, 그녀는 본래 이런 모습이어야 했다. 화를 낼 때는 목을 뻣뻣이 세우며 귀한 신분에 걸맞은 거만한 얼굴을 해야 했고, 그다지 귀엽지 않을지라도 응석받이에 제멋대로 굴어야 마땅했다.

모두 자신이 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명정은 생각보다 그리 놀랍지 않았다. 충분히 수긍이 됐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었고 심지어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렇게 빛이 나는 얼굴이 천하를 제패한 이의 옆에 있는 건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명정의 시선은 여전히 침대 위에 머물러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부풀어 오르는 작고 둥그런 배를 바라보며 그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그녀처럼 사랑스러운, 그녀의 아이였다.

소아는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잘했다고 말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미련을 떨쳐내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녀 역시 동요하고 있는 데다 그녀는… 그녀는 아직 당신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녀의 생각은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그녀를 환생시킨 게 정말로 잘한 일입니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도망가서 같이 살라는 말을, 소아는 차마 하지 못했다. 뭐라도 반응을 보이면 그녀가 받아 줄지도 모르잖아…….

소아는 더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만에 하나 구염락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면 이제는 자신조차도 이 상황을 마무리할 방법을 찾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면 명정은 어쩌란 말인가.

“정말 이렇게 운명에 굴복할 겁니까?”

명정이 돌연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나운 눈은 별처럼 깊고 한없이 냉혹했다.

“그럼 나더러 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기억이 돌아와 봐야 일개 태감일 뿐입니다. 애초에 경쟁할 기회조차 없어진 건 다 당신들이 일을 똑바로 처리하지 못한 탓 아닙니까!”

놀란 소아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무의식적인 복종과 공포로 바들바들 떨며 입을 열었다.

“저… 저희도 이번 생에 황제의 운명을 타고난 자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후에 개입하려 했을 때는 이미… 이미 운명을 바꿀 수 없었고요……. 황제의 운명과 얽힌 일은 아예 처음부터 개입하지 않으면 바… 바꿀 수가 없기에…….”

소아는 줄곧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너무 자만했다. 그들은 쉽게 잘못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사실에 너무 기쁜 나머지 다른 건 고려하지 못한 채 명정의 운명만 바꾸는 경솔한 짓을 저질렀다.

황제와의 충돌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결국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다.

명정의 표정이 점점 누그러졌다. 조금 전처럼 평온해진 그의 말투는 담담했다.

“여기까지 무얼 하러 온 겁니까?”

“저는 당… 당신에게 다른 소원이 더 있을지 알아보려고 왔습니다. 당신이 못된 황후를…….”

소아는 순간 느껴지는 명정의 시선에 즉시 말을 바꿨다.

“그녀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혼인을… 했으니 저희는 임무를 완수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부채질을 하는 명정의 손이 약간 흔들렸다. 어두운 눈빛은 망연자실한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물론 소아가 그 광경을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는 한숨을 돌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마음을 졸였다. 아무리 초연하다 해도 여전히 명정의 마음에는 장서열이 있었다.

문제는 명정이 악독한 황후를 다시 냉궁에 가두고 전생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면 그 소원은 들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인간 세상에 내려온 소아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곧이곧대로 명정에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소아는 그제야 자신이 한 짓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명정이 기억을 되찾는다면 어찌 작은 소원 한두 개로 끝낼 수 있겠는가.

‘바보 같으니라고!’

그러나 그의 자책은 갑작스러운 명정의 목소리에 의해 곧 중단됐다.

“당신들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화가 난 명정을 보자 소아는 곧장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명정은 이번 생에도 여전히 태감일 뿐만 아니라 경쟁할 자격을 잃은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소아는 그녀와 명정을 맺어줄 수 없었다.

사실 명정은 그렇게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소아가 무엇을 고민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명정의 마음속엔 그저 인생무상과 무력함뿐이었다. 삶은 또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과거에 장서열은 황제를 사랑했다. 비록 온전치 못한 정신이었지만 어쩌다 보이는 작은 행동과 무심결에 내뱉는 말에서 명정은 그녀가 제 부군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명정 역시 대주국에 그러한 황제가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환생 후 황제를 향한 그녀의 집념이 줄어든 것은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구를 사랑하는 거지?’

상관이 없을 리가. 오랜 시간 매일같이 함께 지낸 여인이다. 태감인지 아닌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명정 또한 한 여인을 사랑한 남자였다. 그 역시 곁에 있는 여인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런데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다니! 그래 놓고 자기들 잘못이 아니라고 발뺌까지 하고 있질 않은가.

심지어 그녀가 황제와 혼인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니. 소아의 말을 듣던 명정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 오는 걸 느꼈다. 원치 않는 혼인을 한 것이라면 대체 그녀에게 무슨 자유가 있겠는가.

명정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되도록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잘못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그녀의 일생조차 바로잡지 못한 자들이라면 더더욱 자신의 앞에 존재할 가치가 없었다.

심지어 소아는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되살렸다. 이건 꼼수를 부려 책임을 회피하려던 수작에 불과했다. 명정은 왠지 그녀가 끝내 순탄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냉궁에서 우울하게 생을 마치는 것보다는 낫잖아…….’

명정은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손에 든 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곧 딸을 얻게 될 것이고, 이렇게 귀여운 아들도 있었다. 이렇게 계속 평온하게 살 수 있다면 분명 그녀에게는 자신과 함께하는 것보다 더욱 기쁜 일이 될 것이다.

명정은 마지막 순간 그녀의 눈에 차 있던 눈물을 기억하고 있었다.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가끔 정신이 맑을 때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는 원한과 자조 섞인 감정이 얽혀 있었다.

‘그렇다면…….’

명정은 지금의 그녀가 좋다고 생각했다. 까마득히 높은 신분에 사랑스러운 아이들. 그녀에게는 건강한 어머니와 앞날이 창창한 오라버니가 있었고, 심지어 원수 같은 헌원상을 벼슬길에 오를 수 없도록 짓밟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명정이 도울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잘 되었어.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소아는 혹시라도 명정이 그 악독한 여인과 함께 살게 해 달라면 어쩌나 줄곧 고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완전히 다른 일을 상상하며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뒤, 명정에게서 계속 아무 말이 없자 용기를 낸 소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 혹시 궁을 나가고 싶지는 않으신지…….”

“그 후에는?”

명정이 냉담한 말투로 빠르게 말을 받아쳤다. 무시하는 얼굴에도 아랑곳없이 소아가 우쭐대며 말했다.

“당연히 ‘진짜’ 남자가 되는 것이지요! 천하의 부자가 되어 미녀들을 품에 안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겁니다.”

“그 다음은?”

명정의 말투가 더욱 차가워졌다. 소아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바른 자세로 선 채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그… 그 다음에는… 아들과 손… 손자들을 보시고, 두말할 것 없이 높은 사람이 되는 거죠……!”

명정은 냉랭하게 웃었다. 소아를 보는 눈빛에는 마지막 남은 온기마저 다 사라지고 없었다.

“참 빠르기도 하군요. 처음부터 갖지 못한 것을 이제 와 가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잘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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