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0화
서 귀인은 얼굴을 더욱 붉혔으나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황후마마께서 적극적으로 과거의 친분을 언급한 것이 그녀를 더욱 감동시켰다.
서 귀인은 궁에 들어온 후 줄곧 본분을 지키고 웃전을 잘 섬겨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러 왔다. 그녀는 혹시라도 황제와 황후가 서풍엽의 사촌동생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못마땅해할까 두렵기도 했다. 어쩌면 두 사람이 과거에 맺었던 혼사 문제로 폐하께서 자신에게 화풀이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황후마마께서 이토록 따뜻하게 대해 주시다니!’
서풍화는 이제껏 줄곧 얹혀 있던 가슴 속 돌덩이가 마침내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황후마마, 굽어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빈첩, 너무나 감격스럽사옵니다.”
장서열은 고개를 끄덕인 후, 어찌 병세가 이렇게 심해질 때까지 깨닫지 못한 것이냐고 물었다.
서풍화도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찬바람을 맞은 날부터 쉽게 졸음이 몰려 왔고, 약을 먹은 뒤에는 증세가 더 심해졌다. 잠에서 깼을 때 이불이 온통 땀에 젖어 있는 날이 늘어났다.
하지만 서풍화는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고, 단지 조심성이 없어 병세를 악화시킨 탓이라고만 여겼다.
서풍화에게 위로의 말을 몇 마디 더 건넨 장서열은 약재를 남긴 뒤 처소를 떠났다.
* * *
조로전으로 돌아온 황후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왕 마마는 명정에게 태자를 데리고 나가라는 눈짓을 했으나, 이를 목격한 장서열은 손사래를 치며 남아 있으라고 명했다. 어차피 명정은 함부로 입을 놀리는 사람이 아니기에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었다.
자리에 앉아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신 장서열이 왕 마마에게 물었다.
“왕 마마도 뜻밖의 사고라고 생각하느냐?”
왕 마마는 몸을 숙이며 말했다.
“황후마마, 감히 노비가 함부로 추측할 수는 없으나, 설사 서 귀인마마가 부주의했다 해도 곁에서 시중을 드는 하인들까지 그토록 부주의했을 거라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장서열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양매 하나를 입에 넣었다.
“그래… 어쩌면 하인이 주인을 괴롭힌 것일 수도 있겠지. 주인이 줄곧 총애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하인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온전히 마음을 쓰기가 어려웠을 테고…….”
왕 마마는 황후를 따라 웃어 보였다. 잠시 깊어졌던 눈가의 주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전과 달리 지금은 그리 행동하기가 어렵습니다. 폐하께서 후궁을 바로잡으신 이후로 궁녀들은 아무리 게으르고 싶어도 불충을 저지르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
장서열은 웃음을 머금은 채 자신의 다리 위로 기어오르는 작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밖의 그림자는 산처럼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평온했던 마음이 동요치기 시작했다.
“요즘 어린 궁녀들이 본분을 잊어버릴 만큼 푹 빠져 있는 놀이가 있는지 알아보거라.”
“네, 마마.”
갑자기 화 마마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 노비가 조사하겠습니다. 왕 마마 앞이라면 어린 궁녀들은 겁을 먹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화 마마는 절대 공을 세우고도 으스대지 않겠다는 얼굴로 황후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서열은 화 마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 마마가 수고를 좀 해 줘야겠다.”
화 마마는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다.
“황후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노비, 절대로 마마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마마의 걱정을 덜어 드리겠습니다!”
장서열의 시선이 왕 마마를 향했다. 왕 마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자진해서 심부름을 하겠다는 사람을 말릴 이유는 없었다. 그로 인해 화 마마가 자신보다 우위에 섰다고 착각하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옆에서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감격에 차 있는 화 마마를 보자 장서열은 순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화 마마는 왕 마마와 비교하면 분명 고단수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처음 장서열이 입궁했을 당시 별 볼 일 없는 태자의 후궁을 모시게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화 마마는 충성심이 있었고, 일처리가 부지런했다. 큰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는 것도 장점이었다. 곁에 두어도 별 지장은 없을 정도면 충분했다.
장서열은 두 하인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둔 후 고개를 숙여 아들의 손을 잡았다. 작은 코에 머리를 콩콩 부딪치자 아이가 꺄르륵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장서열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농교와 완정은 조용히 왕 마마와 화 마마를 쳐다보았다. 엄격하면서도 냉정한 왕 마마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반대로 화 마마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농교와 완정은 고개를 떨군 채 왕 마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토록 냉정하게 감정을 절제하는 모습이라니. 두 사람은 아직 자신들은 멀었다는 걸 느끼며 앞으로 행동거지에 더욱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그날 밤, 모두가 쉬는 틈을 타 소아는 또 다시 명정에게 갔다. 그러나 내실의 주렴에 손이 채 닿기도 전, 자객으로 오해한 명정에 의해 그는 하마터면 팔이 끊어질 뻔했다.
순간 바닥에 엎드려 꺽꺽 울 만큼 큰 고통이었지만 그는 명정에게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또한 잠들어 있는 어린 아이를 배려하기 위해 차마 ‘악’ 소리도 내지 못했다.
‘대체 나는 왜 이리 운이 나쁜 거지? 금방 잘못을 만회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처참한 꼴이라니!’
바닥에 붙어 일어나지 못하는 소아를 보며 명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곧장 내실로 들어갔다. 소아는 즉시 울음을 그치고 벌떡 일어나 명정에게 달려갔다. 그는 명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성심껏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형님, 형님! 어떻게 소원은 좀 생각해 보셨어요? 아주 위대하고 웅장한 소원 말이에요.”
이제는 소원이 세계 정복이라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부채를 든 명정이 어린 주인의 더위를 식혀 주었다. 소아를 바라보는 눈빛도 다시 부드러워졌다.
“계속 이렇게 물어보는 걸 보니 진정으로 알고 싶은가 보군.”
소아가 즉시 가슴을 곧게 폈다.
“당연하죠! 혹시 제가 형님의 소원을 이뤄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 반드시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해요.”
소아의 득의양양한 얼굴에도 아랑곳없이 명정은 은은하고 따뜻한 표정으로 열심히 부채질을 했다. 근엄하고 충직한 얼굴이었다.
“네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내게는 소원이 없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스스로 걸어온 길을 믿는 사람이야. 어쩌면 죽을 때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해 있는 것이 내 소원일지도 모르지.”
순간 소아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과시하던 자신만만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세상에 이런 인간도 있다고?’
물론 위험한 일도 전혀 거리끼지 않는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는 됐지만, 이런 우매함은 차라리 병에 가까웠다.
“하… 하지만 누구나 바라는 게 하나쯤은 있을 수 있잖아요! 형님이 지금 바라는 건 뭐예요?”
“태자 전하께서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지.”
“차라리 벼락으로 나를 쳐 죽여요!”
어찌 이다지도 답답한 손님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과거의 명정에게는 분명 소원이 있었다. 심지어 끝도 없는 슬픔이 담긴, 너무나 강렬한 소원이었기에 영겁의 시간을 사는 그조차도 차마 무시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소아는 눈앞의 명정이 정말로 과거의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적어도 그때의 그는 묻는 대로 답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었지만 눈 속에는 믿음이 가득했다. 죽어도 흩어지지 않을 만큼 강렬했던 눈빛은 아무런 욕심도 없는 지금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명정이 계속 이런 식이라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것 같은데…….’
명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아는 문득 새로운 생각에 사로잡혔다.
‘만약… 만에 하나 명정이 전생의 일을 기억한다면… 그러면 다시 소원이 생기지 않을까? 그 여자를 위해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던 그때의 집념이 떠오른다면……!’
생각하면 할수록 묘안이었다.
과거에 소아는 명정의 전생과 마음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장서열을 알기 전 명정이 꼭 지금과 같았다. 그에게는 딱히 추구하는 것도, 스스로를 타협하게 만드는 일도 없었다. 그는 어떤 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만족했으며, 어디에서나 뿌리를 내렸다.
그런 명정에게도 난관은 있었다. 그는 어디서나 할 일을 해냈지만 또 어디서든 웃전과 어울리지 못해 여러 가지 이유로 쫓겨났다. 그가 냉궁으로 오게 된 것은 기회와 인연이 들어맞은 결과였다.
그쯤 나이가 사십 줄에 접어든 명정은 융통성이 생겼고, 덕분에 자신의 뜻에 반한다고 해서 굳이 아랫사람들의 방종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가 냉궁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다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줄곧 평온하던 명정의 마음은 폐후가 나타난 후 변했다. 정을 품게 된 그는 그녀를 위해 원칙을 깨뜨리는 것도 불사하며, 죄인에게 규정을 넘어서는 옷과 장신구들을 추가로 구입해 주었다.
소아는 당시 명정이 평생토록 모은 재물을 전부 그 악독한 여인을 위해 쓴 건 아닐까 의심했다. 장서열은 죽을 때까지 미쳐 있던 걸 제외하면 먹고, 입고, 쓰는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정말 사람마다 정해진 운명이 있는 것인가. 구염락의 여인들은 죄다 억울함을 토로하며 다시 살게 해 달라고 졸랐지만 유일하게 장서열 한 사람만 그 기회를 얻었다. 그것이 누군가 그녀를 위해 판을 뒤집어 주었기 때문이라니.
아무리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려 해도, 소아는 대체 장서열이 어찌하여 지금도 여전히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명정과 혼인하는 게 뭐가 어때서? 한평생 서로 오손도손, 전생에 너무 많이 누린 것을 갚으며 산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치 있게 죽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소아와 동료는 분명 그런 삶을 만들었었다. 명정이 누구도 원하지 않는 악독한 폐후와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그들의 실수로 인해 명정이 슬퍼하지 않도록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게 다 뭐란 말인가.
소아는 거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구염락 같은 남자가 얻지 못할 여인이 어디 있다고! 그런데 왜, 어째서, 하필이면 그 여인만 고집했단 말인가!
하지만 소아에게는 세상의 경계를 넘어 구염락의 일에 관여할 만한 힘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황제가 머무는 전전조차 들어갈 수가 없었다.
구염락은 지나칠 정도로 강한 용의 기운을 타고난 자였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근처에는 얼씬조차 않는 게 현명했다.
소아는 죽도록 울고 싶었다. 죽을 때까지 고독할 운명인 구염락은 아무런 대가 없이 이토록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데, 정작 명정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니!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명정!”
고개를 돌리던 명정의 눈앞으로 한 줄기 은색 빛이 스쳐 지나갔다. 빛은 빠르게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전생의 기억들이 밀려들어왔다. 힘이 풀린 명정은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