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9화
표정을 굳힌 명정이 납득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소아, 넌 아직 어리니 매사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네가 정녕 이런 말을 입에 올려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허튼소리를 한다는 얘기가 다시 한번 내 귀에 들리는 날에는 대야야가 아니라 내가 직접 너를 신형사에 보낼 것이다!”
신중치 못한 언행은 화를 불러 오는 법이다. 또 다시 신형사에 가게 된다면 소아는 정말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터였다.
명정의 말에 소아는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 저를 위해 하는 말인데 호의를 이렇게 무시해? 이러니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걷어차고 어리석게 계속 태감을 고집하다니!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것이냐!’
* * *
금용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탁자 위에 놓인 면포를 꽉 쥐었다. 그녀가 물건을 가지고 온 하인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 내 명주실로 짠 비단이 필요하다 했지, 이런 누더기 조각을 가져오라 했느냐? 네가 감히 상전을 등에 업고 사람을 업신여기는구나! 내 뜻을 부인에게 똑바로 전달해야 할 것이 아니냐!”
금용이 마치 불을 뿜을 듯 성난 눈으로 그녀들을 노려보았다.
‘죽으려고 들지만 않으면 무엇이든 뜻대로 하게 해 주겠다더니 뭐가 어째? 고작 이 년 만에 안면을 바꾸다니! 내 얘기가 폐하께 들어가면 네놈들은 반드시 그 뒷감당을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닥칠 화가 두렵지도 않단 말이냐!’
하지만 헌원 부인을 모시는 제일 고고의 표정은 평온했다.
“금 이랑, 도련님은 이제 석 달만 지나면 정실부인을 맞이하십니다. 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관습에 따라 이랑이 쓰는 물품은 결코 부인의 것보다 좋을 수 없습니다.”
금용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관습이라니 웃기지도 않구나. 나는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하사한 이랑이다. 감히 내 신분이 존귀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냐?
정실부인을 핑계로 날 압박할 생각일랑 말거라. 나는 두려울 게 없다! 내가 명주실로 짠 비단을 가져오라고 하면 그걸 가져오는 것이 너희의 일이다! 정 그렇게 정실부인께서 기분이 나쁘시다면 직접 나를 찾아오라고 해라! 너희가 무슨 상관이냐!”
형 고고는 냉정한 눈으로 금용을 바라보았다. 성장하면서 점점 더 예뻐진 소녀는 성질머리 또한 함께 나빠졌다.
“다들 물러가거라.”
형 고고의 한 마디에 주변에 있던 하인들이 우르르 나가자 금용은 당혹스러웠다. 서둘러 누구라도 잡으려 했을 때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순간 긴장한 금용이 뒷걸음질쳤다. 놀란 마음을 애써 진정하려는 얼굴이었다.
“뭘… 뭘 하려는 것이냐!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너희들에게는 나를 훈계할 권리가 없다……! 나… 나는 황제 폐하께서 너희 도련님께 하사한…….”
어두운 그림자에 숨이 막힌 금용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형 고고는 냉담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금 이랑, 부인께서 노비에게 이랑을 일깨워 주라고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하사한 사람은 일찍 죽어서는 안 되지만, 불치병에 걸리거나 찬바람을 맞아 감기에 걸리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요. 부인께서는 설령 폐하께 미움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가정의 평안을 깨트리는 근원을 처리할 생각이십니다.”
금용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녀는 속으로 마귀나 다름없는 헌원 부인을 몹시 원망했다.
“이런 대역무도한 것! 정녕 이 사실이 폐하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지도 않은 것이냐?”
“부인께서는 마음껏 고하시라고, 기꺼이 기다리겠다 하셨습니다.”
형 고고가 신랄한 눈빛을 던졌다. 금용은 순간 또 누군가가 자신의 목을 조른 듯 목구멍이 쿡쿡 쑤시는 걸 느꼈다.
얌전해진 금용을 보며 형 고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옷감들은 부인께서 친히 내리신 것입니다. 곧 새로운 안주인이 들어오실 테니 입고 인사드릴 만한 옷이나 몇 벌 만드십시오. 사람은 마땅히 분수를 지켜야만 평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말을 마친 형 고고가 자리를 떠났다.
금용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치솟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감히 또 나를 위협해? 이 마귀 같은 것, 어디 두고 보자!’
* * *
인파가 북적이는 초여름, 도박판을 나오던 장신성은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에 잠시 현기증이 났다. 그는 한바탕 욕지거리를 쏟아낸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재수 없게 또 다 잃다니!’
“장 대인, 다음에 다시 오시기만 기다리겠습니다요! 하하!”
콧방귀를 뀐 장신성은 수중에 남은 동전 두 닢을 만지작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세상에 이처럼 재수 없는 국장國丈(왕의 장인)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장신성은 부하에게 뇌물 열 냥을 받았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그는 땅도, 은자도 없이 궁상맞게 거리를 헤매는 처지였다.
그런 그가 이 나라 황후의 아버지라는 걸 누가 믿겠는가.
장신성은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행여나 잡혀갈까 감히 큰 소리는 내지 못한 채 작은 소리로 겨우 중얼거렸다. 그나마 파직당한 직후에는 국장이라는 이유로 동료에게 은자 몇 냥 정도는 빌릴 수 있었지만, 지금은 국장의 ‘국’ 자라도 꺼내는 날에는 곧장 내쫓기는 신세였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장신성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불효막심한 것들! 딸을 둘이나 헛키우질 않았는가! 하나는 부잣집에 시집을 가더니 아비를 나 몰라라 하고, 하나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으나 진작 연이 끊겼으니, 아주 하나같이 못돼 먹었구나!’
“이게 누구야? 장 대인 아니신가! 헌데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시는 거요. 갑시다. 같이 판을 벌여 봅시다!”
거리에서 지인들이 장신성에게 알은 척을 했다. 그들을 따라나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소맷부리를 더듬어 보니 정말로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그는 선뜻 따라나서지 못하고 난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장신성은 발걸음을 떼지 않은 채 무엇인가 바라는 눈치를 보였다. 소맷부리에 손을 넣고 있는 궁상맞은 모습에 일행 중 하나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뭐가 문제야? 돈이 문제야? 걱정 마! 내가 화압花押(서명)을 해 줄 테니 어서 가자고!”
돈을 빌려 주겠다는 말에 장신성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그는 방대한 이자에 대한 걱정은 뒷전에 내팽개쳤다.
* * *
조로전은 시원하고 쾌적했다. 개나리색 감견坎肩(소매가 달리지 않은 옷)을 입은 구염황은 명정의 다리 위에 앉아 점심을 먹었고, 장서열은 창가에서 붓글씨를 연습하는 중이었다. 주위는 아주 고요했다.
문밖에서 누군가에게 보고를 들은 농교가 황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마마, 서 귀인마마가 태의를 청했다고 합니다. 진맥을 한 호 태의가 말하기를 병이 위중하다고 했답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감기인 줄 알고 방치하였는데, 요 며칠 기침이 멈추지 않고 얼굴이 노랗게 변했을 뿐만 아니라 기절까지 하여 그제야 태의를 청했다고 합니다. 이미 시기를 놓친 탓에 일 년 정도는 충분히 보양을 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붓을 놓은 장서열이 농교가 건네주는 수건에 손을 닦았다.
“어디가 안 좋다더냐?”
농교가 고개를 저었다.
“보름 전 정자에서 달구경을 하다 감기에 걸렸다고 합니다. 약을 먹기는 하였는데 증세에 맞지 않는 것이라 병세가 심해진 듯합니다.”
농교의 말이 전부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외에 다른 원인을 찾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장서열은 절대 소인배가 아니었다. 하지만 서풍화가 병에 걸린 시기는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장서열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구염락은 벌써 삼 개월간 어떠한 후궁도 찾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시기에 때마침 서풍화가 병이 난 것이다.
정말로 서 귀인에게 다른 문제가 없다고 해도 조사가 필요한 일이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서 귀인을 가지고 어떠한 구실을 잡으려는 것이라면…….
“이상이 없어야 할 터이니 송 태의에게 꼼꼼히 지켜보라 일러라. 오후에 본궁이 직접 서 귀인을 보러 갈 것이다.”
“네, 황후마마.”
다음으로 서 귀인의 병세를 전해 들은 건 구염락이었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황후가 처리하였다고?”
진 공공이 즉시 몸을 숙이며 답했다.
“네, 폐하.”
“알았다.”
구염락은 더는 묻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계속해 국사를 처리했다.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은 형부 상서는 대체 어제 올린 상소문에 어떤 문제가 있기에 이렇듯 황제가 언짢아 보이는지 알 수 없어 전전긍긍했다.
* * *
“서 귀인, 어서 눕거라. 몸이 편치 않으니 충분히 몸조리를 해야지.”
서풍화에게 가까이 다가간 장서열은 그녀가 들어 올린 손을 잡아 다시 침대 위에 앉혀 주었다. 온화한 말투가 이어졌다.
“몸은 좀 어떠하냐?”
서풍화는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런 시기에 병이 났다는 건 누가 봐도 황제에게 수작을 거는 후궁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서풍화 역시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변변치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분명 후궁들은 자신이 과연 황제를 끌어올 수 있을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서풍화는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난 나머지 더는 살고 싶지가 않았다. 어찌 이렇게 조심성이 없었을까. 마치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외줄을 타는 기분이었다. 황후마마 역시 자신을 음흉하다고 여길 게 분명했다.
장서열은 창백한 얼굴로 연신 기침을 해대는 서풍화의 어깨를 급히 두드려 주었다. 병세가 어떠하냐는 물음에 송 태의는 충분히 보양을 해야 한다는 뻔한 답을 내놓았다. 병을 오래 끈 탓에 최대한 맞는 약을 쓰며 몸을 보양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한숨을 내쉰 장서열은 붉게 물든 뺨을 숙인 소녀를 바라보았다. 서풍화는 불안한 나머지 땀으로 흥건한 손바닥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장서열은 애석하다는 듯 서풍화의 손을 토닥이며 위로 섞인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침착해도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어린 소녀일 뿐이었다.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요양하거라.”
“마마… 소인은…….”
서풍화는 무언가 설명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았다.
오랜 세월 구중궁궐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장서열이 서풍화의 억울함을 모를 리 없었다. 그녀가 담담하게 서풍화의 손을 토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서 귀인, 지금은 요양이 가장 시급하니 쓸데없는 생각은 말거라. 서 귀인의 됨됨이는 본궁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어릴 적 알고 지낸 사이이지 않느냐.
어쩌면 그때 서 귀인은 너무 어려서 본궁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으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본궁은 서 귀인의 인품을 모르지 않는다. 몸을 잘 보양하고 부족한 게 있으면 사람을 보내 조로전에 알리거라. 본궁에게는 사소한 것도 굳이 감출 필요 없다.”
장서열은 웃으며 서풍화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