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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308)화 (308/449)

제308화

헌원가는 날이 밝자마자 황후에게 알현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장서열은 아직도 약간 피곤했다. 그녀는 바쁘게 움직이는 하인들을 내버려둔 채 농교에게서 받아든 꿀물을 한 모금 마셨다.

“궁 밖에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네, 마마. 그렇습니다.”

장서열은 한숨을 쉬며 수건으로 입술 주위를 닦았다.

“데리고 들어와서 잘 대접하거라. 한 시진 후에 볼 것이다.”

장서열은 우아하게 하품을 했다. 호갑護甲(손가락에 끼우는 장신구)은 물론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손가락은 마치 어린아이의 것처럼 희고 수려했다.

화 마마는 멀지 않은 곳에 선 왕 마마를 경계하듯 쳐다보며 다급히 황후에게 다가왔다. 옥대玉臺 위에 놓인 빗을 든 화 마마가 세수 중인 황후를 기다리며 언제든 빗질을 할 수 있게 채비를 했다.

한편, 장서열은 헌원가를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성질 급한 건 여전하군. 홀몸도 아니면서 이렇게 빨리 달려오다니, 당자가 걱정이 태산이겠어.’

한 시진 후, 몸단장을 마친 장서열은 넓은 소매에 땅에 끌릴 정도로 긴 주홍빛 치마를 입고 있었다. 치마에 수놓아진 정교한 꽃무늬로 인해 그녀는 마치 꽃 위에 내려앉은 선녀처럼 가냘파 보였다. 평소 당당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자태였다.

조로전에 들어선 헌원가는 높은 곳에 앉아 있는 황후를 보자 즉시 긴장을 풀었다. 그녀는 작은 입을 삐죽삐죽 내밀다 한달음에 서열 언니에게 달려가 팔을 끌어안고 원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황후마마! 지난 번 폐하께서 무슨 말을 하셨는지 모르시지요? 글쎄, 제 어린 동생에게 살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즉시 손수건을 꺼내 든 헌원가가 눈물을 닦았다. 장서열이 웃어 보였다.

“알았다, 알았어. 본궁도 다 알고 있으니 억지로 울 것 없다.”

헌원가는 계획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겸연쩍은 듯 혀를 내밀며 웃었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다시 탑에서 내려가 공손하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황후마마를 뵈옵니다. 마마, 천세 천세 천천세.”

장서열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일어나라. 너에게 이런 인사는 받을 수 없구나. 괜히 무릎을 꿇었다가 기운이라도 빠지면 다 본궁의 탓이 될 텐데, 그렇다면 내가 당 대장군을 무슨 낯으로 보겠느냐.”

마침 이러한 허례허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헌원가 역시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바로 고자질을 이어갔다.

“마마,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앞으로 상이가 어찌 얼굴을 들고 살겠습니까! 소인,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나서 이렇게 시시비비를 가리러 왔습니다.”

장서열은 헌원가를 바라보며 농교가 가져 온 물을 받아 들었다.

“얼굴을 들지 못할 게 뭐가 있느냐. 듣자 하니 네 동생의 생모가 아직 건재하다지? 상이가 너무 높은 자리에 오르면 너와 헌원 부인께도 좋을 일이 없다.

너는 상이를 아끼고 상이 역시 너희 모녀를 존경하지. 하지만 그 존경심을 끝까지 네 손에 쥐고 있을 생각을 해야지. 지금은 네 동생이 너희 어머니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지만, 앞으로 상이의 부인이 될 사람은? 상이의 정혼자가 누구인지 잊었느냐?”

장서열이 잠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본궁이 굳이 명문가 출신인 주씨 가문 아가씨의 인품을 논할 필요야 없겠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영당令堂과 맞먹는 세력을 갖고 있지. 그래, 상이가 더 높은 지위에 오른다고 치자. 헌데 이제 그 옆에는 명문 세가 출신인 부인까지 있구나. 앞으로 아들을 향한 네 아버지의 편애가 결코 덜하지는 않을 터, 그때가 되면 과연 너희 어머니께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으냐?”

말을 마친 장서열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헌원가를 바라보며 웃었다.

순간 장서열의 뜻을 깨달은 헌원가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구구절절 옳았다. 헌원씨 가문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일들을 누가 감히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지만 상이는 제 동생이고, 그래도 상이가…….”

“본궁도 안다. 하지만 급할 게 뭐가 있지? 상이에게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적자냐 아니냐는 폐하의 말 한 마디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후에 상이가 가정을 이루고, 너희 집안에서 어머니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을 때 다시 와서 은상恩賞을 청하도록 해라. 그게 밑도 끝도 없이 본궁에게 달려오는 것보다 훨씬 나을 테니까.”

“…….”

“혈육이 없는 게 차라리 감사한 일일 수도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장서열은 다른 깊은 뜻이 있다는 듯 웃으며 헌원가를 바라보았다.

헌원가 역시 바보는 아니었다. 그녀는 황후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았다. 이미 출가한 이상 그녀가 아무리 집안을 자주 살펴본다 해도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와는 더더욱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여전히 헌원씨 가문을 편히 누비고 집안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다면 장서열의 말을 따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인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헌원가는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 어머니가 끝까지 가문의 권력을 장악하길 바랐다.

헌원가 한 사람만을 위한다면 그러한 부귀영화는 없어도 그만이었다. 물론 헌원상은 좋은 동생이었고 그녀 역시 당연히 동생을 지지해 주고 싶었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당연했다.

장서열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헌원가는 철부지 어린애가 아닐 뿐더러 판단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평소 티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모를 리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 의연하게 일어난 헌원가가 황후에게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황후마마,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겨듣겠습니다.”

장서열은 은은한 미소를 보였다.

헌원가는 더 이상 동생을 언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최근의 안부와 먹는 것, 몸의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이 흐른 후 헌원가는 아직 더 놀고 싶은 마음을 누른 채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떠났다.

* * *

반쯤 열린 창문 안, 장미목 탁자 위로 약을 빻는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양쪽 허리에 검은 비단을 늘어뜨린 그의 암홍색 면포가 이따금씩 바람에 흔들렸다.

네 쪽 병풍으로 분리된 방 안 침대 위에는 어린 주인이 잠들어 있었다. 그 옆에서 마마嬷嬷가 어린 주인에게 부채질을 해 주었다.

탁자 앞에 선 명정은 태자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산사나무 가지를 갈았다. 설탕물에 가루를 섞어 전하께 드릴 생각이었다.

고요한 가운데 창 밖에서 불어온 바람 소리가 가루를 빻는 소리를 덮었다. 갑자기 조용히 문이 열리며 회녹색 옷을 입은 어린 태감이 나타났다. 그는 크지 않은 눈을 부릅뜨며 경계하듯 민첩하게 주위를 둘러본 뒤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왔다.

이상하리만치 희고 보드랍게 생긴 녀석이었다. 비록 지위가 낮은 회녹색 태감복을 입고 있었지만, 보통의 소태감 같지 않게 순종적인 모습이 지워진 진지한 눈빛에는 한기가 깃들어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게 다 거슬린다는 듯 거칠면서도 짜증과 조바심이 뒤섞인 눈이었다.

나이가 어려 인내심이 부족한 탓인지, 아니면 괜히 성질을 내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말투부터 버릇이 없고 무례했다.

“어이! 어제 내가 물어본 거 생각해 봤소? 생각 다 했으면 어서 이 몸에게 말을 해 보라고!”

앉으라는 권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멋대로 명정의 맞은편에 앉은 그는 명정이 손질한 산사 열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를 흘낏 한 번 쳐다본 명정이 가루를 빻는 맷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조금만 먹으시게. 많이 먹으면 이가 시릴 테니.”

처음 그가 나타난 날부터 명정은 이미 그에 대한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그는 입궁한 지 일 년이 된 태감 소아小芽로, 함부로 입을 놀린 죄로 보름 전 대태감에 의해 신형사에 갇혔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모든 사람의 예상을 깨고 고문을 버틴 후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 나왔다.

“어이! 내가 물어봤잖소. 대체 소원이 무엇이냐고! 이 몸에게 말해 보라니까?”

소아는 속으로 근엄한 표정 좀 그만 짓고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차지 말라고 외치고픈 마음을 참았다.

명정은 온화하게 웃는 얼굴로 소아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품는 포용적인 눈빛이었다.

“그런 말투로 앞으로 어찌 주인의 시중을 들겠는가. 돌아가면 또 대야야大爺爺께 혼이 나겠어.”

“내가 혼이 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소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죽은 몸뚱이를 잠시 빌려 쓰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대체 소원이 뭐냐니까!”

그는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 악독한 여인이 그리도 쉽게 구염락과 또 혼인을 해 버리다니!’

그는 부귀영화를 포기한 명정을 볼 낯이 없었다.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명정의 작은 부탁쯤은 꼭 들어 줘야 했다. 이렇게 작은 일조차 해결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천상에서 승급을 하겠는가.

하지만 구염락 부부의 인연은 무슨 짓을 해도 갈라놓을 수가 없었기에 그는 명정을 회유해야만 했다.

소아가 즉시 아첨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보세요, 명정 형님. 무슨 대단한 소원이라도 괜찮으니 좀 얘기를 해 봐요. 예를 들어 셀 수 없이 많은 금은보화, 마음을 움직일 만큼 아름다운 여인, 절대적인 권력 등등, 뭐든 다 좋아요! 태감만 아니면 된다고요! 명정 형님, 어서요. 제발 하나만 말해 봐요.”

‘태감으로 살다가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들먹거리던 녀석이 갑자기 수심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명정은 웃으며 산사 열매를 하나 더 건넸다.

“됐으니 장난 그만하고 어서 돌아가시게. 대야야께 잡히면 또 혼쭐이 날 테니.”

소아는 손에 들린 새빨간 열매를 보며 절망했다. 그는 계속해 불쌍한 척을 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명정 형님, 세상이 평화롭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그냥 평범한 소원 하나 말하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단 말인가!

그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사람들은 다들 나름의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이를테면 대태감이 되고 싶다든지, 대주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고 싶다든지, 여인들에게 용맹하다는 칭송을 받고 싶다든지. 심지어 황족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별별 소망들이 다 있는데, 어찌 그 흔한 것이 명정에게만 없단 말인가.

하다못해 진 공공에게도 소원이 있었다. 그는 황제가 백 세까지 장수하길 빌었다. 그렇다면 명정은 구염황의 장수라도 바라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쓸데없는 소원을 들어 주는 것으로 책임을 회피한다면 미안한 일이 되기는 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뭐라도 빌어야 들어줄 것이 아닌가!

명정은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침착하게 웃었다.

“당연히 바라지. 어서 가 보시게.”

또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셈이었다. 벌써 보름이나 시간을 끌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소아는 단념하지 않고 또 물었다.

“형님은 정말 소원이 없는 거요? 아! 완정처럼 예쁜 누이를 부인으로 맞이하는 건 어때요?”

소아가 일부러 귀여운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그런 표정을 짓는 스스로에게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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