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7화
첩실의 아들일 뿐이다.
황제는 이 한마디로 헌원 상서의 제안을 기각했다. 그의 발언은 연경의 귀족들에게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헌원상을 달리 보게 된 사람들의 시선은 묘했다. 연민도, 안타까움도 있었으나 결국 파고들면 고작 그 정도일 뿐이라고 고소해하는 시선이었다.
연로한 헌원오마는 황궁에서 나오다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놀란 나머지 손발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찌 그런 말을… 어찌!’
헌원상은 그가 평생에 걸쳐 어렵게 얻은 유일한 아들이었다. 하나뿐인 아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의기양양하던 헌원상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오늘 황제가 한 말은 그의 일생을 결정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헌원 부인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녀는 어렵게 얻은 아들을 끌어안고 한바탕 울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친아들이 아니었기에 유감스러운 마음이 그리 절절하지는 않았다.
얼마 전 회임을 한 헌원가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동생을 찾아왔다. 그녀는 확고한 시선과 신중한 말투로 부모님과 흐느끼는 모든 이랑들 앞에서 동생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상심할 게 뭐 있어! 그저 황은이 닿지 않았을 뿐이야. 우리에겐 아직 과거 시험이 남아 있잖아. 우리 가문에서 최소한 거인擧人(향시에 합격한 사람)이 안 나오겠니?”
헌원상이 누이를 바라보았다. 헌원가는 격려하듯 동생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낙담하지 마. 사실 폐하께서 틀린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니지. 하지만 첩실의 아들이 뭐가 어때서? 엄밀히 말하자면 폐하께서도… 어찌 되었든 능력만 있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어! 자, 상아. 이 누이에게 대답해 봐. 재자才子가 누구지?”
헌원상이 즉시 자세를 바르게 했다.
“저요!”
기력 넘치는 대답에 헌원가가 웃으며 격려하듯 동생의 어깨를 쳤다.
“잘했어! 역시 우리 헌원씨 가문의 아들다워!”
주위에서 흐느끼던 여인들은 남매의 장난에 결국 눈물을 거두고 웃었다.
“두 분도 참, 아가씨와 도련님처럼 스스로 허물을 들추어내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이 이랑은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바람처럼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헌원가를 보는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 했다.
헌원 상서는 조금도 낙담하지 않는 딸의 모습을 보며 애석함에 한숨을 쉬었다.
‘이리도 기백이 넘치는데, 시대를 잘못 만났구나…….’
헌원 부인 역시 자랑스러운 시선으로 딸을 쳐다보았다. 우여곡절 끝에 회임을 한 딸은 이제 오히려 부모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내 딸이 참으로 많이 컸구나.’
저녁이 되자 퇴청한 당자가 아내를 데리러 왔다. 그는 화를 가라앉힌 장인어른과 서재에서 한 시진가량 이야기를 나눈 후 아내와 함께 저택을 떠났다.
마차에 오른 헌원가는 마차를 모는 심복 외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그제야 울분을 터뜨렸다.
“폐하는 어떻게 말을 그리 함부로 하실 수가 있지? 승낙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우리 가문을 그렇게 모욕할 게 뭐야! 첩실의 아들이면 뭐가 어때서? 속인 것도 아니고 벌써 옛날에 적모 밑에 들어와 엄연히 내 친동생이 되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옹졸하기는!”
화가 난 헌원가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마치 옷처럼 황제를 찢지 못하는 게 아쉽다는 투였다.
당자는 회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내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상황이 허락된다면 마음껏 웃전을 욕하는 건 큰 문제도 아니었다.
“폐하께서 고집스러운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야? 그냥 처남을 마음에 두지 않았던 거야. 다른 건 다 핑계지.”
이 말에 헌원가는 더 화가 났다.
“그게 변명인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변명을 할 거면 좀 그럴 듯하게 하지, 하필 상이의 아픈 곳을 찌를 게 뭐야? 앞으로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라고!”
당자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외쳤다. 우매하고 미련한 황제 같으니라고! 조상에게 노여움이나 사라!
“화내지 마, 화내지 마. 입궁해서 황후마마께 고자질하고 꼭 이 한을 풀자!”
헌원가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두고 보자고!”
당자는 얼굴에 진땀을 흘렸다. 설마 정말로 그렇게 할 생각인가? 이렇게 난폭할 줄이야.
“표정이 왜 그래?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당자는 즉시 고개를 움츠리고 죽은 척했다.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부인.”
* * *
세수를 마친 구염락은 침대 위에 누워 장서열을 귀찮게 굴었다.
“궁금해. 대체 헌원상은 어쩌다 당신에게 미움을 산 거지?”
장서열은 재빨리 배를 보호하며 자신을 간지럽히는 구염락의 손을 피했다. 눈처럼 흰 피부가 햇볕에 반짝이는 물결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뭐하는 거예요! 잠을 잘 때조차 가만히 못 있고, 그만 좀 해요.”
“말해 줘, 말해 줘.”
구염락은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장서열의 일이라면 아무리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모두 알고 싶었다.
“사람을 싫어하는 데 이유가 있나요?”
장서열은 구염락의 손길을 피해 멀리 달아났다. 큰 침대 안으로 도망치는 그녀를 보며 구염락이 익살스러운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당연하지!”
구염락은 격렬하게 장서열을 품속으로 끌어안고 그녀의 이마를 자신의 가슴에 붙였다.
“말해 줘!”
그는 장서열의 입에서 자신이 생각한 그 말을 들으며 꼭 기뻐하고 싶었다.
장서열은 눈을 흘기며 일부러 하품을 했다.
“졸리네요. 잘 자요, 폐하.”
“장서열, 서열아… 서열 누님…….”
장서열은 눈을 감은 채 구염락을 무시했다. 눈을 감은 그녀의 머릿속으로 과거 구염락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그때 구염락은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왜 상아를 희생시키고 금용의 딸을 도운 거지?’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무슨 일이든 신경 쓰기 귀찮았던 건지도 모른다.
당시 구염락의 눈에 든 사람이 몇이나 됐겠는가. 심지어 그는 자신의 자식조차 귀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만약 전생에서 금용이 한발 앞서지만 않았다면 금용의 말로 또한 그녀보다 나을 것이 없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장서열 자신이었고, 그녀는 헌원상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부모의 묵인과 방임이 없었다면 아들이란 작자가 감히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그들은 아들이 최고 관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모든 걸 모른 척했다. 그렇다면 마땅히 죗값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정말로 소수가 모두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지금은 장서열이야말로 주도권을 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조른 후에도 아무 수확이 없자 결국 구염락은 할 수 없이 향기로운 아내를 품에 안은 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한편, 그들과 달리 쉽사리 잠을 청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시각 내명부의 여인들은 황후 외에 그 누구도 편안히 잠들지 못했다.
궁에 들어온 지 어언 두 달, 후궁들은 모두 분수와 본분을 지키면서도 마음이 불안했다. 황제를 경외하고 웃전과 마주치는 걸 두려워하는 이들은 몸을 사렸지만, 이 또한 성정이 온화한 사람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만나지도 못하는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길이 없지 않은가! 이대로라면 대체 어떻게 감정을 키울 수 있겠어?’
등불 아래 오휘미는 젖은 머리카락을 다듬고 있었다. 팔뚝 굵기만 한 촛불이 비단으로 덮인 화장대를 밝게 비췄다. 고급스러운 가구의 가운데에는 그녀의 품계를 알려 주는 작은 진주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교하게 박혀 있었다.
연지와 분까지 모든 것이 갖춰진 화장대 위에는 다 마시지 못한 조화죽棗花粥이 놓여 있었다. 눈처럼 하얀 사발의 가장자리에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한 청화靑花가 그려져 있었는데, 이는 여인의 섬섬옥수보다 매끄러웠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쉰 오휘미가 손에 든 옥빗으로 빗는 둥 마는 둥 긴 머리를 다듬었다.
황후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후궁들은 입궁한 그날부터 먹고, 입고, 사용하는 모든 것들을 전부 최상품으로 사용하는 호사를 누렸다. 여인들은 매달 태의에게 진맥을 받았으며, 하인들 역시 무시하는 기색 없이 최선을 다해 시중을 들었다.
북쪽 기후에 익숙해 그다지 매끄럽지 않았던 오휘미의 피부는 단 두 달 만에 곱고 부드러워졌다. 더 이상 갈라지지 않는 손톱에는 분홍빛이 감돌아 등불 아래 반짝일 정도였다.
그러면 뭘 하겠는가. 이렇게 아름다워져도 보고 좋아해 줄 사람이 없는 것을!
오휘미의 입가가 비아냥거리듯 올라갔다 다시 내려왔다. 어차피 황후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오휘미는 이렇게 필요한 것만 채워 주면 후궁들이 마음 편히 처소를 지킬 거라 믿는 황후의 생각이 가소로웠다.
시침은커녕 황후에게 문안 인사도 드릴 수 없는 후궁들이 오로지 조로전만 드나드는 황제를 마주칠 기회는 없었다. 게다가 평소 황제가 출입하는 곳은 일각 전에 장소를 정리해 두기에 더욱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규칙은 죽은 것이고, 사람은 살아 움직인다.
과연 황후는 후궁들이 영원히 황제를 만나지 못하도록 모든 걸 통제할 수 있을까? 물론 황후의 계략이 끝까지 먹힐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고, 오휘미는 황후가 실패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고 생각했다.
막아 두는 것보다 오히려 열어 놓는 것이 나을 수도 있지 않은가. 황후가 계속해 황제를 향한 후궁들의 마음을 막는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오휘미는 황후가 빈틈없이 완벽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후궁들을 황제 앞에 더욱 자주 노출시켜 아주 지겹도록 보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다 질리면 자연스레 별것 아닌 게 될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억눌러 두기만 하면 아무리 아름답지 않은 여인이라도 언젠가 황제의 눈에는 미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달 동안 오휘미 역시 황후가 황제에게 얼마나 지극한 총애를 받고 있는지를 몸소 체감한 상태였다. 지난 번 잠시 궁을 떠나려는 찰나, 저 마마가 굳이 황후를 잘 모셔야 한다고 일러준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궁에서 황후의 지위는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됐어.’
빗을 내려놓은 오휘미는 비단결 같은 긴 머리카락에서 그대로 물이 떨어지게 내버려 두었다. 촛불이 비친 작고 귀여운 소녀의 얼굴에 따뜻함이 더해졌다. 비록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아름다운 외모는 아니었지만 맑고 우아한 건 분명했다.
‘일단 황후마마의 통제를 따르며 어떻게든 하는 데까지 해 볼 수밖에.’
처음으로 시침의 저주를 깰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그날이 온다면 혹여나 황후가 추태나 부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오휘미는 냉정하고 믿을 만한 아첨꾼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