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6화
장서열은 아무 말도, 불만을 표시하지도 않았다. 명정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그는 여인들을 존중했으나 입에 발린 말은 하지 못했다. 이것이 아마 그가 출중한 재능을 가지고도 냉궁으로 좌천된 이유이리라.
태자의 수발을 드는 일등 대태감의 복식은 가장자리에 선이 둘러진 암홍색 면포였다. 허리에는 복잡하게 수놓아진 부귀한 무늬와 함께 손바닥만 한 남색 허리띠가 둘러져 있었다. 양쪽으로 늘어진 먹빛 비단 끈은 명정의 몸을 더 커 보이게 했다.
“명정, 자네는 고향이 어디인가?”
순간 멍해졌던 명정은 바로 정신을 차렸다. 주인이 이름과 성을 함께 부른 건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그는 예를 갖추는 것을 잃지 않았다. 즉시 두 걸음 뒤로 물러선 명정이 시야에 태자가 들어오는 걸 확인한 뒤 몸을 굽히며 말했다.
“예, 황후마마, 노비는 승향承鄕 사람이옵니다.”
장서열은 고개를 숙인 채 계속해 책을 읽었다. 언젠가 명정이 승향은 가난한 곳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었다. 어렸을 때 궁에 팔려왔기에 가족에 대한 인상은 흐릿하지만 당시 늙은 태감이 그에게 많은 것을 알려줬다고 했었다.
“승향? 책에는 안 적혀 있군.”
명정은 살짝 긴장을 풀었다.
“예, 마마. 승향은 너무 작은 마을이라 책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군.”
장서열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기록 여부는 관심이 없다는 듯 계속해 책을 뒤적였다.
명정은 가만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태자에게 시선을 돌린 그는 태자가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리고 웃자 마찬가지로 부리나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잡고 있던 의자를 놓은 태자가 비틀거리며 명정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모습을 본 명정은 즉시 달려가 넘어지기 직전의 태자를 품에 앉고 함께 바보처럼 웃었다.
농교와 교대한 완정이 시중을 들러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완정의 시선이 빠르게 명정을 스치고 지나갔다. 완정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 살랑살랑 명정 옆을 지나갔다.
책을 뒤적이던 장서열이 돌연 입을 열었다.
“오늘 뿌린 향료의 향이 아주 좋구나.”
신선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은 은은한 향이었다. 평소 조로전에서 사용하는 향료를 줄이자 청아한 향이 났다.
향을 처방하며 태의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줄 거라고 했다. 아마도 완정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기기 위하여 이토록 소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리라.
완정의 얼굴이 즉시 붉어졌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쭈뼛쭈뼛 망설였다.
“노비는, 노비는…….”
갑자기 독서할 마음이 사라진 장서열이 금실로 이어진 책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마를 문지르며 약간 불편해진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완정은 노심초사하며 황후를 바라보다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명정을 쳐다보았다.
“명 공공, 황후마마께서 몸이 불편하시니 좀 주물러 주시는 게 어때요? 노비가 태자 전하를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명정의 손재주는 구염락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명정의 힘을 받으며 장서열은 구염락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근육을 풀어줄 때마다 스스로의 기술에 도취되어 한참을 자화자찬에 몰두했다. 거들먹거리는 구염락의 말투가 떠오르자 장서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퍼졌다. 분명 기술이 퇴보하고 있는데도 그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놀아 주던 사람을 빼앗긴 구염황은 언짢아졌다. 그는 어머니의 연탑을 짚고 빙빙 돌며 이따금씩 고개를 들고 투정을 부렸다. 높이 치켜든 작은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르는 모습은 너무나 귀여웠다.
구염황과 놀아 주면서도 명정의 힘은 전혀 약해질 줄을 몰랐다. 완정은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웃었다.
장서열은 눈을 감고 편히 쉬며 가끔씩 손을 내밀어 아들과 장난을 쳤다. 그녀는 아들이 쳐다보면 얼른 다시 눈을 감았다. 어린 아들은 어머니를 바라보며 옹알거리다 짧은 다리로 종종대며 신나게 연탑 주위를 돌았다.
미소를 띤 명정은 최근 태자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를 자랑스레 얘기해 주었다. 장서열은 명정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명정이 도가 지나쳐서가 아니라 그와 나누는 대화에 가책이 느껴져서였다.
명정은 수더분하고 점잖은 사람이었다. 궁녀들의 장난이 지나칠 때에도 그는 그저 어리숙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속으로 화를 삭일 뿐이었다. 덕분에 신분이 높은 대궁녀들은 더욱 자주 그를 괴롭혔다.
자신의 약점을 알게 된 후 명정은 조로전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 태자 옆에서 시중을 들었고, 일이 있을 때면 전전에 사람을 보내어 처리했다.
조로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며 명정은 매사 철두철미한 황제가 황후에게만큼은 매우 지극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끔 황자를 안고 지나가다 황후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간청하는 황제를 볼 때도 있었다. 명정이 오면 황제는 즉시 위엄 있는 모습으로 돌아와 엎드려 절을 올리는 태자의 인사를 받았다.
명정은 처음에는 놀랐으나 시간이 지나며 점차 이러한 모습에 익숙해졌다. 전전에서는 포악한 모습을 유지하는 황제지만 이러한 면모도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장서열은 이러한 상황이 매우 어색했다. 어느 순간부터 구염락은 명정이 있을 때에도 옆으로 다가와 농담을 건네곤 했다. 장서열은 왠지 모르게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언젠가 자신이 잠꼬대라도 하는 날에는 명정의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다행인 건 명정이 매번 구염황과 함께 있다는 점이었다. 구염락은 절대 아들 앞에서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는 매번 아들 앞에서 힘자랑을 통해 자신의 위대함을 보이고자 애썼다.
등불이 방 안을 환하게 밝혔다. 장서열은 세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몇 번을 봐도 셋이 함께 모인 그림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나는 너무 공손해서 눈에 거슬렸고, 하나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의기양양한지 알 수가 없었다.
셋 중에서 가장 생각이 없어 보이는 건 어린 녀석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방긋 웃는 모습은 절로 그녀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구염락이 죄목을 조사하고 그의 아들이 공부를 하는 동안, 장서열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따뜻한 물을 마시며 물었다.
“듣자 하니 헌원 상서가 헌원상을 한림원에 들이려 한다지요?”
명정은 즉시 태자를 안고 공손하게 자리를 떠났다.
장서열은 손에 든 잔을 만지작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들을 배웅한 구염락은 다시 돌아와 미소를 머금은 채 장서열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여유롭게 찻잔을 든 그가 한 모금을 마셨다.
“헌원가에게 들었나 보군.”
“네.”
잔을 내려놓은 장서열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페하, 적합하지 않습니다. 헌원상의 학문이 부족하지는 않지만 아들에게 신동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기 위해 헌원 상서가 물밑 작업을 한 것 또한 사실이지요. 주 태부를 스승으로 모신 헌원상이 서른 살쯤 한림원에 들어간다면 이상할 게 없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첩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친 장서열은 반박을 허용치 않는 진지한 얼굴로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구염락은 자기도 모르게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으나 마주한 그녀의 눈빛은 확고부동했다.
‘주소유, 과연 남편의 지위가 전생만큼 높지 않아도 끝까지 그와 애틋할 수 있을까? 내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그 잘난 아들을 얼마나 잘 길러 내는지!’
장서열이 끝까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구염락은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가 한 의자에 앉으려 했다.
하지만 장서열은 자리가 좁다며 그를 앉지 못하게 했다. 구염락은 그런 그녀를 손쉽게 제압하여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 장서열을 품에 안은 그가 의자를 전부 차지한 채 입을 열었다.
“왜 반대하는 거지? 헌원가와 돈독하잖아.”
사실 구염락은 장서열의 친구에게 잘해 주는 것으로 만정의 혼삿날 벌어진 일을 만회할 생각이었다. 헌원상은 장서열과 절친한 벗의 동생이었고, 심지어 헌원상을 한림원에 들이는 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로서는 그저 인심 한 번 쓰면 되는 일이었다.
구염락의 품에서 편하게 자리를 잡은 장서열이 강경한 어투로 말했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신첩이 헌원가와 친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녀의 동생을 한림원에 들이는 데 동의할 수는 없지요. 헌원가가 한림원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요.”
“…….”
“당신이 신경 써야 되는 쪽은 헌원가의 동생이 아니라 헌원가예요. 앞으로 태어날 헌원가의 아이나 잘 돌봐 주세요. 그래야 헌원씨 가문에서 헌원가의 위상도 더 높아질 테니까요. 하지만 한낱 첩실의 아들이 결코 적자 행세를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구염락은 한동안 가만히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전혀 번복할 의사가 없어 보이는 강경한 눈빛이었다.
순간 구염락의 눈에 궁금증이 일렁였다. 과거에 그는 장서열이 헌원상을 퍽 아낀다고 느꼈다. 그녀는 평소 헌원상에게 상냥한 태도를 보였고 심지어 도움의 손길을 내민 적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실은 헌원상을 한낱 서자로 여기고 있었다니. 구염락으로선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장서열의 눈빛은 거침이 없었고, 조금 전 한 말을 취소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심지어 마지막 말은 일부러 뱉은 것이었는데, 이는 헌원상을 등용해선 안 된다는 의견에 쐐기를 박기 위함이었다.
구염락은 이런 사소한 일로 장서열을 거스를 수 없었다. 게다가 평소 조정 일에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 아내의 의견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다만 구염락은 대체 헌원상이 어쩌다 장서열의 미움을 샀는지 그 이유가 알고 싶었다.
‘설마…….’
생각에 잠겨 있던 구염락의 머릿속이 갑자기 밝아졌다.
‘금용. 금용 때문이다! 서열이는 지금도 금용 때문에 화가 나 있는 거야. 혹시라도 금용이 기사회생하지 못하도록 미리 막으려는 게 분명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구염락은 참지 못하고 통쾌하게 웃었다. 아내의 차가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는 순간 마음이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좋아. 당신 뜻대로 하지.”
벌써 옛날에 치워 버린 상대를 장서열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저 누나와 동생은 다르다고 한 마디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질투의 화신께서는 이미 해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장서열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구염락을 바라보다 문득 두근거리기 시작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녀가 그를 노려보았다.
“왜 웃는 거예요? 숨 막혀요, 빨리 풀어 줘요. 아니, 힘을 주지 말고… 아! 구염락! 죽고 싶은 거예요?”
“하하! 겁 많기는.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이렇게 놀라다니, 자주 연습해야겠어.”
“이……!”
색마!